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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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구나. 이런 곳에 발을 들여도 될까 약간 고민되었으나 태헌이 들어가는데 연서 홀로 밖에서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사무실 내부는 우드톤과 블랙의 조화로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느껴지던 태헌의 향과 사무실의 방향제가 한데 섞여 묘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에 놀라 연서가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 태헌이 창을 등진 책상으로 향했다.
그가 서류 하나를 챙긴 후 벽에 붙은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잠깐 자리 비워야 하니, 여기서 기다려.”
“저 혼자 여기에, 있어요?”
“문제 있나?”
“하지만…….”
차가운 시선이 연서에게 무심하게 닿았다.
“이사님 바쁘신 거면 저 먼저 돌아갈게요. 시간도 많이 늦었고요.”
아직 사지 못한 마카롱도 마음에 걸렸다. 줄을 서서 사는 곳이라 너무 늦으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토 달지 말고 기다려.”
“그럼 부르신 이유라도 말씀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납득하지 않을까요.”
외딴섬 같은 곳에서 태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라면 연유라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연서의 당돌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녀와서 얘기해.”
무시당했단 생각에 뺨이 붉어졌다. 당혹스러움을 읽었을 텐데도 태헌은 그저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갔다.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이사님! 저기, 이사님!”
이사님? 이사 새끼야!
쾅. 연서의 부름은 무시된 채 사무실 문이 닫혔다. 힘이 쭉 빠진 연서는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며 머릿결을 정돈했다. 날갯죽지까지 닿는 긴 머리칼을 묶듯이 들어 뜨거워진 목덜미를 식혔다.
“하…….”
두리번거리다 모르겠다 싶어 족히 소파의 한 귀퉁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내심 힘들었던 건지 두 다리가 편안해졌다.
너무 늦게 돌아가면 안 되는데. 연서가 시계를 흘긋거린 후에 사무실 안을 천천히 눈에 담기 시작했다.
장식장은 대체로 깔끔했고 언뜻 보이는 기다란 책상 위도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소파는 상석과 그 양옆으로 길게 늘어진 자리로 이루어져 족히 열 명은 수용 가능해 보였다.
눈앞 테이블의 상판 유리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마치 지나온 복도 바닥처럼 결점이 없었다.
벽 한쪽엔 문 없이 세워둔 가벽이 있었다. 그 뒤에 공간이 따로 있는 것 같았으나, 거기까지 들어가 볼 용기는 없었다.
연서는 입구 쪽에 자리한 초록 식물을 바라보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무실을 울리는 전화 소리에 눈꺼풀을 번뜩 젖혔다.
태헌의 책상 위에서 내선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태헌의 비서나 관련 직원이 받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이 벨 소리가 뚝 끊겨 안도하는 찰나였다.
전화가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는 몇 번 정도 끊어졌고 다시 울리길 반복했다.
급한 일일까. 태헌이 일정이 틀어졌다며 사무실로 올라오자고 했고, 급히 자리를 비운 거로 보아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진 것 같았다. 계속 울리는 전화가 연서를 불안하게 했다.
문득 중3, 열여섯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날 연서는 술 취한 부친의 행패에 질려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날도 이렇게 전화가 계속해서 울렸다. 그게 일터에 나간 엄마가 병원에 실려 갔단 소식인 걸 알았다면, 외면하지 않았을 텐데.
“아휴.”
생각이 너무 갔네. 그냥 받으면 될 거야. 부재중이라고 전하면 되겠지.
연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상 받으려고 결정하자 태헌의 책상까지 가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달칵.
-아! 드디어 받으셨다. 신 비서님!
“아, 저는…….”
-어? 누구십니까? 이거 이사님 사무실 번호 맞는데?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의아하게 바뀌었다.
그러게. 누구라고 소개해야 하는 걸까. 잠깐 머리가 멈췄으나 연서는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사님 댁에서 일하는 한연서라고 합니다. 지금 이사님께서 사무실을 비우셔서 대신 받았습니다.”
-아, 그래요? 근데 이사님 댁이라면…….
남자가 연서의 신상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눈치로 말끝을 흐렸다.
“아, 저는….”
강 여사의 간병인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우 회장이 타계한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강 여사의 건강 상태는 대외적으로 극비였다.
“이사님을 개인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오늘 부르셔서 왔고요.”
-아, 그러시구나. 참, 혹시 신 비서님은 안 계십니까? 급한 일인데.
의심을 씻었는지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연서가 고개를 젓자 남자가 말했다.
-그럼 메모 하나만 전해주세요. 이사님 오시면 바로 건네드리면 됩니다.
메모, 메모. 메모지를 찾으려 두리번거렸으나 태헌의 책상에선 메모지 비슷한 걸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볼펜도 없어 보였다. 케이스에 고이 잠든 고급 만년필을 쥘 순 없어 머뭇대는 사이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이게 꽤 중대한 사안이라 바로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총괄 현 부사장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연락드렸습니다. 결함 리콜 건입니다. DO2 엔진 이물질 콘로드 마모 이상 품질 검사 중에 공정 과정에서 관리법 위반한 혐의를 발견했습니다.
연서의 숨이 잠시 멎었다. 함부로 들어선 안 될 이야기를 전해 받은 것 같은데, 이렇게 쉽게 얘기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의심을 안 한다고 해도 그렇지…….
하긴, 감히 태헌의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들어오면서 봤듯이 보안이 철저한 곳이었다. 그러니 남자도 쉽게 입을 연 것일 터다.
“그럼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아, 내 정신 좀 봐. 품질 보조 TF팀 주동원 팀장입니다. 그럼 그렇게 말 좀 부탁드립니다. 제가 외부에 있어서요, 회사 들어가는 시간이 걸리는데 이사님은 연락이 안 되지, 아주 죽겠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예예.
한 팀장은 살았단 투로 호탕하게 인사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달리 메모지를 발견하지 못한 연서는 어찌할까 고민했다.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고 태헌이 나타났다. 그의 무표정한 낯에선 그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연서는 이리로 걸어오는 태헌을 의식해 책상에서 조금 물러났다.
“거기 뭐 볼 거라도 있어?”
메마른 눈동자가 연서에게 날아들었다. 연서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대꾸했다.
“전화가 왔었어요.”
“무슨 전화.”
피곤한 투로 말하며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주 팀장님이란 분이셨는데, 품질 보조 TF팀 주동원 팀장이요.”
“주 팀장이 왜. 그쪽이 직접 전화를 받았어?”
“네. 계속 울리기에…….”
연서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멋대로 전화를 받았으니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었다.
“메모 남겼나?”
태헌이 책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연서와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그가 아슬아슬 스쳐 지나갔다.
그것만으로 연서의 가슴이 점점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의 날카로운 태도 덕에 가득 찬 물병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처럼 몸이 굳어갔다.
메모를 찾는지 책상 위를 바라보던 그가 눈을 거뒀다. 그러곤 연서를 바라보았다.
“한연서 씨는 한 번 들어선 머리에 입력이 안 돼? 왜 재차 묻게 할까.”
예상보다 모진 추궁에 굳어 있던 연서가 입을 열었다.
“결함 리콜 건이라고 했습니다. DO2 엔진 이물질 콘로드 마모 이상 품질 검사 중에 공정 과정에서 관리법 위반한 혐의를 발견했고 꽤 중대한 사안이라고……. 총괄 현 부사장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연락드렸다고 했습니다.”
연서 조금 전 들었던 내용을 거의 똑같이 전달했다. 그러자 태헌의 눈매가 어째 더욱 사나워진 것 같았다.
연서는 그 이상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맞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왜 자꾸 태헌 앞에 서면 머저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제법 야무지단 말도 많이 듣고, 맡은 일엔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태헌의 시선엔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머리가 아주 백치는 아닌가 보네.”
그래, 이런 식이니까.
사람을 비웃으며 끌어내리니까. 그래서 태헌 앞에 서면 발가벗겨진 것처럼 수치스럽고 당혹스러웠다.
“저도 이 정도 기억력은 있어요.”
“뭐?”
태헌이 의자에 앉으며 헛숨을 내뱉었다. 연서가 빤히 그를 마주하자 그가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참 겁이 없어. 우리 한연서 씨는.”
그거야 당신이 자꾸 사람을 깎아내리니까….
똑똑똑.
누군가 사무실 밖에서 노크했다.
“들어오죠.”
태헌은 방문자를 이미 알고 있던 양 바로 들어오란 허락을 하며 책상 위의 버튼을 눌렀다. 아마도 사무실 문을 여는 버튼 같았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안경을 낀 보통 체격으로 단정한 회색 슈트 차림이었다. 날이 선 바지 주름에서 그의 단정함이 엿보였다.
“신 비서, 자리는 왜 비웠습니까.”
“죄송합니다.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약국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자리를 비울 땐 보고 먼저 해야지. 기본 아닌가.”
“이사님께서 급히 대표님을 만나신다고 하셔서 방해하면 안 되겠단 생각에…….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여기, 한연서 씨가 주 팀장 전화를 받았습니다.”
숙인 앞머리가 바르르 진동했다.
“예?”
“회사 기밀을, 이렇게 외부인이 들어도 되겠어요?”
고개 숙인 신 비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아닙니다.”
“아니면 쭉 아니게 합시다. 예외 만들지 말고.”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나. 옆에 선 연서는 신 비서와 함께 낯빛이 하얗게 질려갔다.
“신 비서, 그 자리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말하죠. 대체할 사람은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한국 들어온 지 이제 사흘째야. 벌써 혼선이 오면, 앞으론 불 보듯 뻔하지. 난 실수를 만회할 인력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완성형 비서가 필요한 거지.”
태헌의 추궁이 매섭게 날아들자 신 비서의 두 손이 안쓰럽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연서는 어쩔 줄을 모르고 바짝 마른 입술을 질끈 물었다.
전화를 받지만 않았어도 신 비서가 이렇게까지 혼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연서는 괜히 자신 때문에, 낯선 사람 앞에서 혼나는 신 비서에게 미안했다.
“이미 신뢰를 잃은 것 같은데.”
보다 못한 연서가 결국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제 잘못이에요. 제가…….”
“넌 입 다물어.”
하지만 연서에게 돌아온 건 차가운 일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