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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6화 (6/85)
  • 6화

    *

    갑작스레 눈치가 좋아진 스스로에 놀라며 연서가 손에 쥔 땀을 숨기려 주먹을 말아쥐었다.

    “승빈이가 워낙에 잔정이 많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쌍한 걸 그냥 못 뒀죠. 동정심이 많고 사람 좋아해선.”

    승빈의 배려가 마치 봉사활동이라 못 박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란 소리 같았다.

    전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는데. 태헌에게 그런 얘길 들어서인지, 우 상무의 하얀 뺨이 뱀의 거죽처럼 느껴졌다.

    “그래, 지난 일주일 동안 어머니 말수는 줄지 않으셨고?”

    “네. 평소와 같으셨어요.”

    드디어 시작됐구나. 연서가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오미자 음료가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웠다.

    사실 연서는 따뜻한 음료를 선호했다. 늘 이곳에서 대접받는 얼음 섞인 음료를 전부 비우느라 돌아가는 길엔 배가 아팠다.

    입술만 축이고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우 상무의 태도가 호의가 아니었다면 연서도 예의 차릴 이유가 없었다.

    “그간 어머니께서 말벗은 좀 만나셨나. 어때요, 지내시기 불편해하진 않으시고?”

    “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윤 여사님, 김 관장님, 유 대표님이 찾아오셨어요.”

    “그래요. 더 찾아온 사람은?”

    “달리 없었었습니다.”

    “누구, 다른 사람 얘기를 한다든가…….”

    이제야 눈에 보이는 것들에 연서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이 선생님의 건강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음?”

    어디선가 아날로그 벽시계의 초침이 들려왔다.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을까.

    한동안 우 상무는 말이 없었다. 대신 의미심장하게 연서를 바라보았다.

    넌지시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우 상무의 시선에 슬슬 등줄기에 땀이 배어났다. 강 여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처럼 무뎌선 안 됐다.

    떠보기라도 해야지.

    태헌이 알면 괜한 짓이라고 타박할지 몰라도, 어차피 그조차 완벽히 믿지 못한다.

    “혹시 태헌이한테 무슨 말을 들었어요?”

    “우 이사님이라면 어제 뵙긴 했습니다.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는데……. 왜 그러세요?”

    연서는 제 연기실력에 감탄하며 모르는 척 물었다. 생각보다 우 상무의 눈치가 좋을지도 몰랐다.

    “그러는 연서 씨는 왜 갑자기 이런 게 궁금하죠?”

    어린애를 대하듯 우 상무는 평소처럼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게 사실, 선생님께서 겉으론 손님을 반기시지만, 혹시나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건 아닐까 염려되어서요. 건강검진 결과도 좋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여러 사람을 만나시는 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여쭤봤습니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연서가 눈을 내리깔며 곤란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할 순 있지요.”

    “그럼, 만남을 조금 줄이시면 어떨까요?”

    “집에만 있으시면 적적하실 텐데, 만남을 제한하면 오히려 활기를 잃으실 건데.”

    차라리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편이 강 여사에게 좋을 수도 있겠단 계산이었다. 그래야 우 상무가 계략을 꾸미지 못할 거란 생각이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연서가 빙그레 웃었다.

    “듣고 보니 상무님 말씀이 맞네요.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승빈이 말이에요.”

    “네?”

    “내 자식이지만, 다루기 힘든 아들 녀석이라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이 잘 안 왔다.

    “혹시 연서 씨한테까지 손을 댈까 걱정이에요. 그렇게 안 보여도 여자관계가 복잡한 녀석이라……. 눈앞의 미인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을 건데…….”

    연서가 뜻밖의 소리에 놀라 두 손을 저었다.

    “아뇨.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우 상무가 지갑을 꺼내 오만 원 권을 여러 장 챙겨 내밀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연서가 멀뚱하니 그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택시 타고 돌아가요. 승빈이한텐 내가 인사 따로 전하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따로 연락하는 일 없습니다.”

    “그래요, 믿어요.”

    이유 없이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오만 원짜리 몇 개가 자신의 가치 같다면 너무 확대 해석이겠지.

    연서가 숨을 크게 내쉰 뒤 말했다.

    “그럼 주신 건 잘 쓰겠습니다.”

    한 번 받은 돈 봉투, 두 번은 못 받겠나. 이미 우 상무에게서 월급을 받고 있었다.

    그래, 이거로 우리 선생님 좋아하시는 마카롱이나 사 가야지, 인사를 마친 연서는 감옥 같았던 서재를 빠져나왔다.

    관리인이 건네준 보약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연서는 오랜만에 친구 지영을 만나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러 수다를 떨었다. 지영은 나날이 피부가 좋아진다며 연서의 신수가 훤해진 데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빚쟁이에 쫓기지도, 배를 곯지도 않고, 부친에게 얻어맞는 일도 없으니 살이 오르긴 했다.

    잘 먹고 잘 자는 게 누구에겐 쉬운 일이겠지만, 연서에게 가장 간절한 일이었다. 다만 그 간절함을 강 여사의 신변을 이용해 해소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지영과 헤어지고 유명한 디저트 가게를 향하던 도중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빠앙. 골목길로 들어선 차를 피하느라 한 번에 남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나야.

    왁자지껄하던 주변의 소음이 단숨에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우태헌이 전화를 할 수도 있단 사실을 새삼 깨닫자 돌연 옥에 갇힌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세원 자동차 본사로 6시까지. 도착하면 입구에서 내 이름 대고.

    “네?”

    -소풍 나온 것 같아? 때 되면 돌아와야지.

    “저기…!”

    연서의 말이 끝나기 전에 통화가 종료되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무례함에 치를 떨면서도 연서는 착실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5시 30분, 시간이 촉박했다.

    길든 개처럼 허겁지겁 택시를 잡아탄 연서는 쫓기듯 발을 동동 굴렀다.

    “기사님, 조금만 더 빨리 가 주세요.”

    연서의 옆으로 회색 도시가 빠르게 스쳐 갔다. 사람 기죽이는 세원 자동차 빌딩 앞에서 연서가 머뭇대다가 다른 사람의 틈바구니에 섞여 로비로 들어섰다.

    높은 층고와 경호원, 안내데스크 직원까지, 모든 게 화려한 느낌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병원에서 근무했던 연서지만, 이런 분위기엔 영 면역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까지 많았다.

    “한연서 씨.”

    복잡한 인파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경고음처럼 들려왔다. 연서가 뒤로 돌자,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은 곳에서 태헌이 차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냉랭한 시선이었다.

    “이사님.”

    “일정이 틀어졌어. 잠깐 올라가지.”

    위라면, 사무실?

    “뭐 해, 따라오지 않고.”

    술렁이는 시선들이 태헌에게, 그리고 연서에게 닿고 있었다. 그걸 태헌만 모르는 듯했다.

    아니, 시선에 익숙한 사람이라 무딘 걸까.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연서는 우물쭈물, 바닥만 내려다봤다. 반대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사원들이 태헌에게 인사를 건넸다.

    태헌이 해외에 오래 있던 걸로 아는데, 그를 알아보는 직원들이 많았다. 새삼 우 회장의 핏줄을 타고난 그가 어떤 존재인지 실감 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금빛 카펫을 밟았을 우태헌. 이 세계에서 그의 곁에 서려면 높은 기준을 통과해야 하겠지.

    어쨌든 연서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이는 아니란 소리였다. 임직원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당도한 연서는 어디쯤 서야 할지 계산한 후 태헌의 뒤쪽에 공기처럼 자리 잡았다.

    높은 층에 머무른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바람과 다르게 이쪽을 흘끔대는 시선은 점점 많아졌다. 의문과 궁금증이 담긴 눈빛은 꽤 부담스럽게 연서를 더듬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차림에 조금 더 신경 쓸걸.

    정장을 입은 회사원들 사이에서 캐주얼은 입은 건 연서뿐이었다. 연한 색 청바지와 카디건 차림은 묘하게 겉돌았다.

    연서는 가만히 제 옷장 속 사정을 더듬어 보았다.

    연서는 패션에 소질이 없었다. 대학 시절엔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자연스레 옷과 화장품, 향수엔 문외한이 되었다.

    대학병원에서 일할 땐 선배들의 눈치 때문에 늘 단정한 옷만 고수했다. 그 뒤엔 쭉 용인에서 머물렀기에 거추장스럽지 않은 옷을 선호하게 되었다.

    격식 있는 자리에 나갈 때 입던 정장, 그걸 입었으면 나았을까.

    아니, 그 고리타분한 정장은 연서를 잠시 가려주었을지 몰라도, 태헌의 곁에 선 이상 이목을 피하진 못했을 터다.

    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게 이렇게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연서는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태헌을 따라 냉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가 길쭉한 손가락으로 18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바람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서는 고개를 조금 들어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 너른 등과 고개를 올려야만 보이는 머리. 태헌은 뒷모습만으로 날카로운 분위기가 났다. 밀폐된 곳에 단둘이 있으니 긴장감이 짙어졌다.

    특유의 시원하고 묵직한 냄새가 폐부를 조여왔다. 아무래도 우 상무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묻기 위해 부른 것 같았다.

    나중에 집에서 들어도 될 이야기 같은데 굳이 이곳으로 호출한 태헌의 저의가 잘 읽히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남자였다.

    그를 훔쳐보다가 들킬까 싶어 고개를 숙였다. 연서의 손바닥에 땀이 올라왔다.

    “한연서 씨.”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태헌이 엘리베이터 밖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아, 네.”

    연서가 급히 몸을 움직였다.

    매끄러운 바닥은 때 하나 묻지 않은 것처럼 새하�다. 연서는 조심조심 귀퉁이가 닭은 운동화를 디디며 그를 뒤따랐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층은 고요했지만 태헌의 걸음이 빨라 주변을 제대로 살피진 못했다.

    복도 가장 끝에 자리한 이사 사무실 앞에서 그가 멈추었다. 태헌의 지문을 인식하자, 사무실 보안이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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