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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5화 (5/85)
  • 5화

    *

    그를 거슬러선 좋을 게 없었다. 힘없는 연서에겐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우 상무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길 기원할 수밖에.

    “네.”

    태헌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연서가 눈을 크게 뜨며 그의 곁을 스쳐 지났다. 그러다 종종걸음으로 속도를 냈다.

    검은 세단의 운전석에서 낯익은 남자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우 상무의 장남, 우승빈이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한 그는 태헌만큼은 아니지만 큰 키에 좋은 체격이었다. 가끔 이곳을 찾아와 강 여사의 말동무를, 연서에겐 벗 노릇을 해주는 몇 안 되는 좋은 사람이었다.

    오늘도 그의 두 손에는 선물이 가득했다. 연서가 뛰어가자 그녀를 발견한 승빈이 웃어 보였다.

    “연서야, 아침부터 운동했어?”

    “네. 어쩐 일로 일찍 오셨어요?”

    “아, 시간이 좀 남아서. 오는 길에 윤해 이모님 모셔왔어. 오늘 서울 간다며. 이따가 같이 올라가자.”

    승빈의 시선이 올려묶은 연서의 머리의 너머로 닿았다. 그가 바라보는 쪽은 태헌이 있는 곳이었다.

    연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진작 간 줄 알았는데 태헌이 이곳을 보고 있었다.

    가만히 멈춰서 직시하는 시선에서 음기가 느껴지는 듯해 연서는 얼른 고개를 거두었다.

    최대한 마주치지 말자.

    말을 섞을수록 그에게 책잡히는 기분이었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거듭 확인하는 것 같아서 그가 껄끄러웠다.

    “이게 누구야? 언제 왔어!”

    승빈이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태헌을 반가워했다.

    “잘 지냈냐?”

    큰 소리로 안부를 묻기도 했다.

    사이가 좋은 걸까? 우 상무를 생각하면 그의 아들인 승빈과 태헌이 어떤 관계인지 쉽사리 가늠되질 않았다.

    연서가 다시 뒤를 흘긋 보자 태헌이 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못 들었나 봐요.”

    “설마. 원래 저런 녀석이야. 같이 있기 불편하지 않았어?”

    “네. 그거 이리 주세요.”

    연서는 눈치를 보며 승빈이 든 물건을 받으려다가 제지당했다.

    “됐습니다, 한 선생님.”

    윤해는 이미 사라진 뒤였기에 승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아, 배고프다. 아침 먹을 시간이지?”

    “네. 선생님은 먼저 식사하셨어요. 지금은 주무셔요.”

    “그럼 우리끼리 먹자. 할머니 깨우지 말고.”

    자는 강 여사를 당장 깨우라던 누가 생각났다. 연서는 웃으며 토스트는 어떠냐고 물었다.

    태헌이 산책에서 돌아오기 전에 빨리 먹어 치워야지, 연서는 다짐했다.

    *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승빈을 향해 뛰어가던 연서의 모습이 태헌의 머릿속에 박혔다. 산책하는 태헌의 의식을 차지한 건 우습게도 그런 것들이었다.

    그넷줄을 꽉 쥐고 겁먹은 듯 눈을 굴리던 여자라든가. 봉투를 쥐고 입술을 바르르 떨던 모습이라든가.

    머리를 비우려 택한 걸음이 되레 무거워졌다. 태헌이 산속에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식, 웃음이 샜다.

    금방 뽑은 것처럼 길가에 아무렇게 버려진 잡초 뭉치는 연서의 소행이었다. 이걸 어떤 모습으로 뽑았을지 상상했다.

    쭈그리고 앉아 하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문질렀으려나. 바지가 조금 올라가 뽀얀 다리가 더 드러났겠지.

    이딴 생각을 왜. 문득 불편해졌다.

    시차 적응을 하기도 전에 용인으로 급히 내려오느라 머리가 고장 난 게 분명했다. 태헌은 과부하 걸린 머리를 털어내려 오늘 일정에 대해 곱씹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자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거실에서 흘러나왔다.

    둥근 테이블 앞에 강 여사와 승빈이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함께 앉은 연서는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다.

    간병인이 아니라 강 여사의 손녀라 해도 어울릴 법한 친화력이었다.

    승빈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할머니.”

    “벌써 가누? 태헌이 얼굴도 못 봤겠네.”

    “나중에 서울에서 보면 돼요. 그리고 올라가면서 연서도 데리고 나가려고요.”

    “그래, 우리 연서 오랜만에 쉬는데 할미가 너무 오래 잡아뒀다.”

    아니에요, 연서가 말갛게 웃으며 손수건으로 강 여사의 입가에 묻은 찻물을 닦았다.

    “연서야, 나도 여기 묻었는데.”

    승빈의 말에 연서가 토끼 눈이 되었다. 승빈이 한쪽 뺨을 들이대며 능청스럽게 구는데 그걸 받아치지도 못하고선 쩔쩔맨다.

    서투른 여자.

    “그러고 보면 승빈이가 연서한테 무르다.”

    “연서가 착하잖아요. 옮았나 봐요. 그렇지, 연서야?”

    “그럼 우리 연서 어떻누?”

    “음? 좋죠. 그럼 저 주실 거예요?”

    승빈이 입을 크게 늘여 웃었다. 연서의 얼굴은 못 봐줄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태헌이 걸음을 옮겼다. 이딴 대화를 엿듣고 있던 시간이 아까워 짙게 고인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거실로 들어선 태헌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장성한 손주 둘이 모인 게 기분이 좋은지 강 여사의 표정이 무척이나 환해졌다.

    “태헌이 왔구나. 아침은 먹은 게야?”

    “커피면 됩니다.”

    태헌이 눈을 내리깔아 연서를 바라보았다. 엉거주춤 일어나는 모습이 꼭 태헌에게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너는 형한테 인사도 안 해?”

    승빈이 웃는 얼굴로 묻자 태헌이 자리에 앉으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한연서 씨랑 같이 나간다며.”

    “응. 연서 데리고 나가려고.”

    “허튼짓 말고, 잘 데려다줘.”

    연서는 벌써 윤해에게 강 여사를 맡기고 달아난 뒤였다.

    태헌이 그녀가 앉았던 빈자리를 보며 입을 닫자, 승빈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뭔가 말이 미묘하다?”

    “뭐가.”

    태헌이 다리를 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연서 데려다주라는 게 꼭 네 사람인 것처럼 들리잖아.”

    승빈이 웃었다. 묘한 기운이 소리 없이 마찰했으나 승빈이 일어나며 은밀한 충돌은 금방 증발했다.

    “그럼 저 가볼게요, 할머니.”

    “그래, 큰일 하는데 붙잡아두면 안 되지. 서울 가면 우리 연서 맛있는 것 좀 먹여라.”

    “하하하. 진짜 저한테 시집 보내실 거예요?”

    승빈이 가볍게 강 여사를 안은 뒤 허리를 폈다. 주려면 빨리 달라고 헛소리를 늘어놓은 승빈이 거실 밖으로 사라지자 공간이 적막해졌다.

    태헌은 복희가 내온 커피를 가만히 들이켰다. 곧 현관 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승빈이 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연서가 다급하게 만류하는 실랑이가 꽤 즐겁게 느껴진다.

    뭐 하는 짓들인지. 태헌이 눈을 내리깔며 진하게 커피가 우러난 찻잔을 눈으로 살폈다.

    “할미는 승빈이 말고 태헌이가 연서 데려갔으면 쓰겠다.”

    “그만하시죠. 손주마다 한연서 붙여보실 생각입니까?”

    “연서 불쌍한 애다. 태헌이 너도 그렇고.”

    “불쌍한 영혼끼리 위로하는 것보다, 한연서를 수양딸 삼으시는 게 빠르겠네요.”

    한연서가 난 사람은 난 사람이다. 강 여사를 이렇게까지 휘어잡은 걸 보면.

    “그거야 할미 욕심이지. 그랬다간 우리 연서 누가 지켜주누. 사방에서 물어뜯을 건데.”

    태헌이 눈을 옆으로 돌렸다. 커다란 창밖으로 넓은 평야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저 먼 곳에 길을 따라 사라져가는 세단이 어느덧 개미처럼 보였다.

    “저 여자 정말 위하신다면 괜한 소리 삼가세요.”

    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슈트 단추를 여몄다. 출근까진 시간이 좀 남았으나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우승빈 저 양아치 새끼가 여자를 어떻게 가지고 놀든 상관없었으나 연서와 눈이라도 맞아버리면 곤란했다. 연서를 이용해 우 상무를 엿 먹일 생각이었으니.

    한연서에게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수줍게 웃을 때가 아니란 걸 깨우쳐줘야지.

    어디선가 또다시 햇볕 냄새가 났다. 그게 참 거슬렸다.

    *

    우 회장의 본가에 올 때면 그 크기와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평화로운 용인 집과는 다른 느낌의 커다란 저택. 높은 담과 대문에 가린 저택은 본채와 별채로 나뉘어 있었고 정원도 넓었다.

    그리고 많은 사용인이 오갔다. 조용한 건 비슷하지만, 이곳의 침묵은 냉기가 가득했다.

    마지막 돌계단에 올라서며 연서가 하늘을 바라봤다. 뿌연 서울 하늘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오셨어요?”

    “네. 안녕하셨어요.”

    “상무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리 없이 다가온 관리인이 연서를 우 상무의 서재로 안내했다.

    우 상무는 항상 본가에서 연서를 만났다. 달리 만날 곳이 없긴 했지만, 출근할 시간에 집에 머무는 게 조금 기이하다 여겼다.

    똑똑똑.

    관리인이 노크한 뒤 연서에게 눈짓했다. 들어가도 좋단 소리였다.

    “감사합니다.”

    웃는 얼굴로 인사한 연서가 묵직한 서재 문을 밀었다. 끼이익, 작은 소음이 천둥처럼 느껴졌다.

    태헌을 통해 우 상무의 시커먼 속셈을 엿본 뒤였다. 전처럼 우 상무를 보고 편히 웃기 어려울 터다.

    잘해야 할 텐데. 걱정이 먹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연서가 발을 옮기자, 창가를 등지고 있던 우 상무가 퍼터를 거뒀다. 퍼팅 연습 중인 듯 우 상무가 굴린 골프공이 매트 위를 구불구불 지나갔다.

    “안녕하셨어요.”

    “왔으면 거기 앉아요.”

    “네.”

    걱정했던 것보단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연서는 늘 그랬듯 소파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탁.

    작은 타격음이 들려왔다. 우 상무가 숙였던 허리를 펴며 골프공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훑었다.

    네모난 안경알 속에서 선한 눈매가 번쩍거렸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그의 미간이 약간 좁아졌다.

    우 상무가 퍼터를 내던지듯 세웠다. 지적이고 차분한 이미지의 그에게서 처음으로 거친 면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전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모습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연서는 자리에 앉은 채 긴장한 어깨를 조금 내려놓았다.

    잘할 수 있어. 평소처럼. 주문을 되뇌었다.

    잠시 후, 길을 안내했던 관리인이 차를 내왔고 때맞춰 우 상무가 상석에 앉았다.

    “마셔요. 오느라 고생했어요.”

    “네. 우승빈 부장님께서 오시는 길에 태워주셨어요.”

    찻잔을 들어 올리던 우 상무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아주 찰나여서 눈치채기 어려운 미묘한 불쾌감이 그에게 머물렀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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