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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4화 (4/85)
  • 4화

    *

    우 상무에게 실컷 정보를 떠벌리곤 책임지지 않은 채 달아나려는 이기심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위선까지 떨어보겠다는 건가.”

    이제 와 강 여사를 위하겠단 결정은 위선이 맞을지 몰랐다. 하지만 우 상무의 속셈이 의심되는 이상 이 일을 계속할 순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가면 할머님은.”

    “…….”

    “한연서 씨를 많이 믿고 의지하는 것 같던데, 책임감 없이 나가버리면 상심하지 않겠어?”

    “…….”

    “살아계시는 동안엔 몹쓸 상황을 보지 않게 해드려야지.”

    강 여사의 말에 의하면, 태헌은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 아픈 손가락이라고 했다. 애틋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손주, 우태헌.

    그런 그도 나름대로 강 여사를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그가 우 상무와 같은 사람이 아니란 걸 장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선생님께 이 일을 말씀드려볼까?

    아니, 아니다. 이런 일을 의논하기엔 그녀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배 아파 낳은 아들에게 시꺼먼 속내가 있고, 손주는 그를 경계하고 있단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저녁 식사 때도 그녀는 우 상무를 두둔하려 들었다. 설마 제 아들이 그럴 리 없단 마음일 터다.

    그렇다고 우 상무를 의혹을 낱낱이 파헤친 뒤 증거물을 갖다 댈 수도 없었다.

    그럼 분명 쓰러지실 거야.

    “당장 한연서 씨 그만두면, 새로운 간병인을 꽂아야 하는데 그 스트레스는 누구 몫이지?”

    “…선생님께서 힘드시겠죠.”

    이야기가 지루한 듯 소파 헤드에 등을 받친 그는 좀 전보다 나태해 보였다.

    “그리고 내가 귀국한 시점에 한연서 씨가 나간다, 그럼 우 상무가 가만히 있으려 들까. 제 짓을 들킨 걸 알고 입막음을 하려들 텐데.”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제가 뭐라고.”

    “그러니까 하겠지. 너 하나 치우는 게 뭐 대수라고.”

    연서의 숨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사채만으로 세상의 모든 불행을 짊어진 사람처럼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젠 원치도 않은 첩자가 되어 있었다.

    내릴 수 없는 기차에 탄 것 같았다. 종착지를 모른 체 이중 첩자가 되어 달려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할머님 사실 날, 얼마 안 남았어.”

    친절히도 종착지를 정해주는 태헌은 죽음에 무감한 사람처럼 냉정해 보였다. 강 여사의 죽음을 함부로 말하는 그를 역시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 상무는 더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강 여사의 곁에 남아 그녀를 돕자.

    이 집에서 일하는 다른 이모님들은 20년도 넘게 세원 본가에 지냈다. 그녀들까진 우 상무가 회유할 순 없을 거다. 그러니 연서만 잘하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테이블로 다가갔다. 무릎 높이의 테이블 위 봉투를 움켜쥐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했다.

    손에 쥔 돈 봉투가 무거웠다.

    “6개월이면 우 상무가 한연서 씨 의심하는 단계는 지났겠지만, 내가 왔으니 혹시 모르지. 떠보려 할지도. 당분간은 평소처럼 보고해.”

    “그럼 나중에,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차마 강 여사가 죽고 난 뒤란 말이 나오지 않아 표현을 어렵사리 우회하자, 태헌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동굴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경고처럼 들려왔다.

    “잘해 봐. 혹시 알아, 남은 사채라도 갚아줄지.”

    뜬구름을 잡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태헌도 돈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데 능숙한 것 같았다. 급격히 피로가 몰려들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가 보겠습니다.”

    연서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태헌의 날카로운 시선이 따라붙어 그녀를 머리끝부터 아래까지 훑어내렸다. 노골적인 탐색이었다.

    “멍청한 짓 하지 마.”

    혹여라도 우 상무에게 들켰단 얘기를 하지 말란 소리 같았다. 그랬다간 태헌의 말대로 처리란 걸 당할지 모르니, 가만히 있는 게 득이란 건 연서도 알았다.

    연서가 입꼬리를 올려 간신히 웃었다.

    “선생님께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대답 없는 그를 두고 연서가 물러났다. 문을 열고 그의 방을 벗어났는데도 그의 손바닥 안에 빨려 들어간 착각이 들었다.

    재앙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연서가 알고 있는 세상의 이치는 그랬다.

    태어나 가장 평온했던 6개월의 시간. 태헌은 그녀가 얻은 평화의 부조리함을 비웃으며 굴러들어왔다.

    필시 재앙이었다.

    *

    연서가 나간 문을 넌지시 바라보며 태헌이 턱을 문질렀다.

    저 여자의 보고를 받으며 우 상무는 어땠을까. 그 정보에 따라 웃기도 하고, 화도 냈으려나.

    얌전한 장혁의 얼굴이 여러 모양으로 변했을 걸 상상하자 이 상황이 조금은 흥미로워졌다.

    우 상무는 세원 그룹의 최대 주주인 강 여사가 누굴 만나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을 터다. 제 몫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기색이면 조처하기 위해 탐색견 중 하나로 연서를 이용한 것이고.

    강 여사는 따뜻하고 상냥한 것에 약했다. 태헌이 보기에 연서는 무해한 도화지 같았다.

    우 상무가 사채를 떠안은 그녀의 처지를 이용해 강 여사의 옆자리로 밀어 넣은 건 좋은 판단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니 겁도 없고, 의심도 안 하고 최선을 다했겠지.

    하지만 태헌이 귀국한 이상, 연서의 쓰임은 달라져야 했다. 우 상무도 바보가 아니라면 언젠간 연서가 이중 첩자가 되었단 걸 눈치챌 거다.

    그런데도 연서를 잡아둔 이유는, 단순한 치기와 호기심에 가까웠다.

    「우리 연서 어떠누.」

    연서가 없는 틈에 강 여사가 자꾸 태헌을 떠보았다.

    「우리 태헌이 색싯감으로 저런 아이가 좋지. 착하고 선해. 할미 눈감기 전에 우리 태헌이 결혼하는 걸 봐야 할 텐데….」

    태헌의 약혼녀로 거론되는 후보가 얼마나 쟁쟁한지 알면서, 강 여사는 헛된 바람을 늘어놓았다. 태헌은 단조로운 연서의 이력서를 구기듯 내려놓았다.

    겉으론 수그리는 척하나, 꼿꼿한 자존심이 있는 여자.

    연서는 꺾기를 좋아하는 인간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눈을 내리감은 태헌은 차갑게 머리를 굴렸다.

    강 여사의 말대로 한연서와 결혼이라도 한다고 하면, 우 상무는 어떻게 나오려나. 놀라 자빠지려나.

    우 상무는 이미 태헌의 아내 후보로 제 쪽 사람을 추려놨을 터다. 세원에서 혼맥을 맺는 일엔 장남의 입김이 세게 작용했다.

    우 상무가 꼴사납게 뛰어다니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

    코끝에 묘한 햇볕 향이 머물렀다. 밤인데도.

    *

    이슬을 머금은 흙바닥이 푹신하게 연서의 신발에 감겨들었다. 이곳은 강 여사의 사유지로, 용인 집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작은 산이었다.

    산책길을 내어둔 터라 연서는 아침마다 쾌적하게 운동할 수 있었다.

    새벽 4시쯤 깬 강 여사가 조식을 먹고 잠들었다. 보통 두 시간 정도 아침잠을 이루니, 그 사이 시간에 산책했다.

    연서는 간간이 허리를 숙여 길 위로 돋아난 잡초를 뜯어 옆으로 던졌다. 빠른 속도로 걷기와 잡초 제거를 반복하니 이마에 땀이 맺혔다.

    더위가 찾아드는 시간이 빨라져 갔으나 나무 그늘은 꽤 시원했다. 푸른 나뭇잎 아래를 누비며 연서는 어제 일을 되짚었다.

    “하……. 바보.”

    모른다고 해서 면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의적이었든 아니든, 연서는 강 여사에게 몹쓸 짓을 했다.

    태헌의 말대로 우 상무가 다른 뜻이 있는 거라면, 연서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갖다 바친 꼴이었다.

    강 여사의 건강 상태뿐 아니라 누굴 만났는지, 어떤 선물을 받고 어떤 선물을 돌려보냈는지. 그런 세세한 것까지 보고했다. 깨닫고 보니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

    “미쳤던 거야.”

    과오가 줄줄이 떠올랐다. 기억이 찾아들 때마다 연서의 자괴감이 짙어졌다.

    오늘 아침에도 강 여사는 깨자마자 연서에게 먼저 잘 잤는지 물었다. 그녀는 연서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기만했단 생각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내리막길이 보이여 뛰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여 불순물 같은 잡생각을 떨쳐내려 함이었다.

    한달음에 집이 보이는 곳까지 이동했다. 근방의 집들은 이곳에서 한참이나 멀리 있어 이런 연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끽해야 경호팀 정도. 그러나 낯선 인영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태헌이었다.

    그는 어제와 다르게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다. 연서처럼 산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새였다.

    연서는 걸음을 늦추곤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앞으로 오기에 빨갛게 상기된 뺨을 어색하게 움직여 미소를 만들어냈다.

    “안녕하세요.”

    태헌은 인사 대신 연서의 모습을 느릿하게 훑었다. 운동복을 갖춰 입은 그와 상반되는 추레함이 연서는 문득 창피해졌다.

    뛸 생각으로 가볍게 입은 반소매 티셔츠와 무릎 위로 올라온 반바지 차림이 그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그녀가 흙이 묻은 손끝을 뒤로 보내며 입을 열었다.

    “모르실 것 같아서……. 저 오늘 휴일이에요. 본가에서 선생님 모시던 분 내려오시면 그때 서울 올라가요.”

    월요일은 연서의 휴일이었다.

    “서울?”

    “우 상무님 보고 본가에서 선생님 보약도 받고 겸사겸사요.”

    휴일이라고 말한 게 무색하게 연서의 월요일은 촉박한 편이었다. 연서의 시선이 태헌의 등 뒤쪽으로 향했다. 검은 세단이 골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윤해가 탄 차일 거다. 아니나 다를까. 멈춘 차에서 윤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윤해, 그녀는 연서가 오기 전에 강 여사를 모신 간병인으로 5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그녀가 이쪽을 보지 못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연서가 고개를 거두며 태헌에게 물었다.

    “우 상무님께는… 어떻게 말하면 될까요? 대면할 땐 선생님 일상을 구체적으로 물으시는 편이에요.”

    “어제 말했듯이 당분간 평소처럼 보고해.”

    “……전부 다 말해도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선생님이 곤란해질 텐데….

    “누굴 못 믿는 거야. 설마 내가 할머님을 위험하게 할까 봐?”

    “…….”

    연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이라도 강 여사에게 해가 되는 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호흡이 빨라졌다.

    “주제넘게 굴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반복해서 당부하게 하지 마.”

    “…….”

    “대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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