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래.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농담하신 거야.
생각에 잠긴 연서를 향해 강 여사가 물었다.
“연서야, 그리 재미없누?
“그럴 리가 있겠어요? 선생님,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특히 새우장이 맛있었어요.”
연서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웃었다. 다만 머릿속은 치열했다.
설마 아주 귀국한 건 아닐 거야. 여기도 잠시 들른 걸 테고. 태헌이 이곳에 오래 머무를 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닐 터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태헌이 먼저 의자를 빼고 일어났다. 듣던 중 다행이었다. 전화가 오는지 태헌은 액정이 밝아진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연서의 낯이 저도 모르게 환해졌다.
“당분간 이곳에 머무를 겁니다.”
멈춰선 태헌이 고개를 살짝 돌려 연서를 보았다. 순간 실룩이던 연서의 입꼬리가 굳었다.
뭐?
“그럼 한국엔 아주 들어온 게야? 미국서 하던 일은?”
“최종 단계입니다. 한국에서 마무리할 겁니다.”
그러냐며 밝게 웃는 강 여사와 눈이 마주친 연서는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이건 필시 나쁜 징조였다.
*
강 여사는 식사를 마치고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연서는 약을 챙긴 뒤 그녀가 잠들 때까지 말벗을 했다.
문제가 없다면 이대로 새벽까진 쭉 주무실 터다. 점점 이르게 잠들고 새벽같이 일어나시니 연서도 그에 맞춰 움직여야 했다.
강 여사의 방을 나온 연서는 그 옆쪽에 붙은 작은 방으로 향했다. 언제든 강 여사에게 달려갈 수 있도록 가장 가까운 방에 연서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연서 씨.”
우태헌?
낮은 목소리였다. 덫에 걸린 동물처럼 뻣뻣해져 뒤돌아보자 어김없이 태헌이 서 있었다.
가벼운 슬랙스에 티셔츠. 아까보단 편해진 차림의 그에게서 어렴풋한 샴푸 향이 났다.
연서가 쓰는 복숭아 향이 아닌, 시원하고 청량한 냄새. 그가 낯선 남자란 사실이 새삼 상기되었다.
“네, 부르셨어요?”
“이력서 있나?”
“이력서요?”
“질문엔 답을 해. 두 번 묻지 말고.”
“죄송합니다. 이력서는 없습니다.”
갑자기 이력서는 왜? 연서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혹시 내가 간병인으로 적합한지 확인하려는 걸까.
우 상무를 통해 면접 없이 채용된 연서는 따로 이력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태헌 입장에선 궁금할지로 몰랐다.
“없으면 작성해서 가져오죠. 내 방은 위층 끝이고.”
연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태헌이 돌아섰다. 그의 슬리퍼 소리가 적막한 복도를 서늘하게 문지르며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연서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노트북을 켜 이력서를 출력하고 마른침을 넘겼다.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서울 소재의 간호대학을 나와 대형병원에 취직했다. 그리고 스물여덟의 적지 않은 나이가 됐다.
빼어난 스펙이 없으니 자신감이 떨어졌다. 설마 돌아가라고 하진 않겠지. 실직은 한 번이면 족했다.
연서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가지고 2층으로 올라갔다.평소엔 들를 일이 거의 없는 2층에서 묘한 한기가 느껴졌다. 분명 태헌이 있기 때문이리라.
강 여사의 말론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다. 태헌이 당분간 이곳에서 기거한다면 2층은 저주받은 성처럼 음산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발을 뗐다.
-똑똑똑
“들어오죠.”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소리가 바로 들려와 연서는 움찔했다. 들어가면 안 될 곳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 들었다.
심호흡한 연서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와 책상, 붙박이 옷장, 소파가 전부인 깔끔한 방은 태헌을 담기에 조금 작아 보였다.
연서가 머무는 방보단 세배쯤 컸지만, 그는 이런 곳보단 초호화 호텔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러니 빨리 그런 곳으로 가버렸으면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연서는 잘 봐달란 의미로 사죄의 말을 덧붙였다.
“가져와요.”
창가를 등진 소파에 앉은 태헌이 다리를 꼰 채 고개를 까딱했다. 연서가 그의 앞에 공손하게 이력서를 내밀었다.
“앉고.”
“네.”
가만히 서서 멀뚱거리고 있던 연서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그의 대각선에 자리한 1인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별 볼 일 없는 이력서를 유심히 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우 상무 수법치곤 허접하네.”
“네?”
“우 상무한테 얼마 받아요?”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될까 싶어 우물쭈물 시간을 끌었다.
“얼마, 받냐고.”
“…월에 500만 원이요.”
“간호사로 근무할 때보단 잘 벌고.”
“…네.”
“우 상무 레이더치곤 보수가 적네.”
우 상무 레이더?
“사채업자에게 쫓긴다며. 빚이 3억인데 한 달 이자만 475만 원, 간신이 이자만 면하는 수준이겠고.”
그걸 어떻게… 아세요?
“양심 판 대가가 헐값인 건 알고 있나?”
혼란스러움을 정돈하지 못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이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 상무한테 따로 해주는 게 있을 텐데.”
“…혹시 일과를 보고하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매일 자정쯤, 강 여사의 식사량과 수면 시간과 특이사항 등이 적힌 메시지가 우 상무에게로 전달이 되었다.
이력서에서 눈을 뗀 태헌이 턱을 들어 연서를 바라보았다.
“보고하든, 반대로 할머님께 우 상무의 말을 전하든, 불필요한 정보가 오갔겠지.”
우 상무에게 하루 한 번, 강 여사의 건강을 보고하는 것은 채용될 당시 명시한 계약사항이었다. 자식이 부모 걱정을 하는 게 당연하다 여겼고 그에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강 여사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녀의 컨디션이 좌우되었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면역력이 급격히 저조해졌기에 필요한 확인이라 생각했다.
“우 상무가 끄나풀 역할을 잘해주면 할머님이 돌아가신 뒤에 돈을 더 얹어주겠다고 하던가?”
끄나풀이라니. 연서는 한 번도 자신의 입장을 그렇게 해석해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맞잡은 손에 힘을 준 연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모를 만큼 멍청한 건가. 어느 쪽이든 비위 상하긴 마찬가지지만 솔직하게 역겹네.”
차가운 손가락을 꾹 말아쥔 연서가 곤죽 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오늘은 이렇게 보고하려나. 우태헌이 와서 식사량이 많아지셨고 평소보다 기분이 좋으셨다.”
“…….”
“하지만 건강에 큰 차도는 없었다.”
연서가 보고하려던 내용과 비슷했다.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태헌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다른 날은 이렇게 말했으려나. 강 여사의 용인 땅은 누굴 준다더라. 강남의 빌딩 한 채는 누굴 주고,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세원 건설 연 이사더라.”
태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섭게도 전부 사실이었다.
“아직도 감이 안 와?”
우 상무에게 강 여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달하는 건 어디까지나 몸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곁에 두지 못한 아들의 근심을 더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 상무의 효심을 안타까이 여겨 최대한 꼼꼼히 강 여사의 일과를 전달했었는데….
그게 잘못된 거였어?
“제가,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연서의 목소리가 숨길 수 없이 떨려오고 있었다. 태헌이 소파 팔걸이에 얹은 손가락을 툭툭 내리치며 초침을 세듯 했다.
“할머님이 세상을 뜨면, 누가 가장 좋을 것 같아?”
“좋다니. 그런……. 사람이 명을 다했는데, 그런 게 말이 되나요?”
“적어도 우장혁 상무는 좋아하겠지. 유산 정리 잘하면 나름 배 불릴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할머님 주변 조사가 필요했을 거고 밀착 감시를 할 사람이 필요했겠지?”
“그게, 저…… 인가요?”
“떠먹여 주니까 머리가 좀 돌아가나?”
그러니까 우 상무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통해 강 여사를 감시했단 걸까.
하지만…. 두 분은 분명 사이가 좋았다. 강 여사는 늘 웃는 얼굴로 장남을 맞이했다.
또한 사람 좋은 얼굴의 우 상무를 생각하면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우 상무님이 다른 생각이 있어서 저한테 그런 보고를 받으신 거란 말씀이신 거잖아요, 말도 안 돼요….”
연서의 음성엔 확신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흐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은 가족이잖아요.”
“한연서 씨도 사채 빚 안긴 작자와 서로 반길 사이는 아니지 않나. 세상엔 여러 가지의 관계가 있어. 함부로 재단하지 말고 냉정하게 생각해야지.”
“저는, 정말 몰랐어요.”
“하도 아둔해서 신선하긴 하네.”
태헌의 질책은 억울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강 여사가 걱정이었다.
혹시 그간 자신의 언행으로 강 여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차라리 탐욕스럽게 굴어. 멍청한 것보단 나을 테니까.”
그가 소파 테이블 위를 눈짓했다. 그 위에는 하얀 봉투가 있었다.
“이게 뭐예요?”
연서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한연서 씨 목숨값. 이제라도 머리 잘 굴려 봐.”
연서는 떨려오는 팔을 뻗어 봉투를 열어보곤 손을 굳혔다. 수표였다.
그녀의 목숨값이라면 싸구려일 게 분명한데, 어째선지 그 금액을 확인하기 두려웠다.
0의 개수가 많을수록 감당해야 할 죗값이 무거우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 이건 무지했던 연서의 죗값이었다.
“앞으론 내게 보고한 후에 우 상무한테 연락해.”
“우 상무님께… 보고를 계속하라는 말씀이에요?”
“그래. 대신 내게 먼저 하고, 그다음이 우 상무야.”
연서가 첩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거라면, 이건 앞으로 이중 첩자가 되란 소리였다.
머리 잘 굴리라는 말은 아마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쳐진단 뜻이겠지.
연서는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한숨이 시큰하게 터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강 여사님께 해가 된다는 걸 안 이상 저는…….”
“양심을 챙기겠다?”
태헌이 조소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