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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2화 (2/85)

2화

*

강 여사는 눈이 어두워 멀리 있는 반찬을 보기 어려워했다. 평소엔 침실에서 밥상을 받을 만큼 연로했다.

그럴 때마다 연서가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주곤 했다. 얼른 반찬을 살핀 연서가 평소처럼 즐겨 드시는 찬을 앞접시에 놔주었다.

“간장 조금 찍어서 드셔요.”

미나리에 둘둘 말린 삶은 고기는 치아가 불편한 강 여사도 소화하기 무리가 없었다.

“할미는 됐으니까 우리 연서 먹어라.”

“저도 먹고 있는걸요.”

연서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태헌과 눈이 마주쳤다. 짙고 고요한 눈동자다.

사실은 그가 무서웠지만, 긴장을 떨쳐 낼 겸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사님도 맛있게 드세요.”

미쳤나 봐. 내가 차린 것처럼 말했어.

연서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강 여사가 먹을 만한 반찬을 골라내는 데 집중했다. 간간이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날 뿐 오가는 대화는 많지 않았다. 강 여사가 물으면 태헌이 짧게 대답하는 식이었다.

연서는 어쨌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염원하며 밥알을 깨작거렸다.

“연서야, 너 새우장 먹을 줄은 아니?”

“그럼요, 먹어본 적 있어요.”

강 여사는 연서를 아이 보듯 했다. 맛있는 음식이나 선물이 들어오면 연서를 먼저 챙겼다.

그녀는 그런 점이 송구스러우면서도 처음 받는 내리사랑에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오늘은 할미가 발라줄게, 기다려 보거라.”

강 여사는 버젓이 앞에 있는 손주를 두곤 연서의 숟가락에 새우 살을 발라 얹었다. 시력도 좋지 않으면서 이렇듯 정성을 쏟아 연서를 챙기는 일은 흔했다. 그러나 태헌이 보고 있으니 민망함이 물 끓듯 피어올랐다.

“정말 맛있어요. 선생님도 어서 드세요.”

“할미라고 부르라니까 그런다. 우리 연서는 착해서 그런가, 참 조심성이 많다.”

태헌 들으라는 듯 강 여사가 침침한 눈을 그쪽으로 보냈다. 그러더니 유심히 그의 안색을 살폈다.

“어째 우리 태헌이는 할미보고 웃음 한 번 안 짓누.”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습니까.”

태헌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조금 전 태헌은 잠든 강 여사의 침실에 무턱대고 쳐들어갔다. 연서가 말리려 했으나 그의 빠른 걸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태헌의 부름에 놀라 일어난 강 여사를 향해 그는 안부 대신 쓰디쓴 질책을 내뱉었다.

「이 꼴이 다 뭡니까.」

「태헌이야? 세상에. 우리 태헌이가 온 게야?」

「건강검진 결과를 왜 속였습니까? 대체 왜요, 무엇 때문에. 저를 웃음거리로 만들 작정이었습니까?」

그의 사나운 추궁에도 강 여사는 우리 태헌이 왔냐며 한 번 안아보자 팔을 벌렸다.

한 번 안아드릴 법도 하건만, 태헌이 얼굴에 써 붙은 차가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끝내 포옹하지 않았다. 대신 굳은 얼굴로 연서를 눈짓했다.

「이 여자는 또 뭐고.」

「할미 간병인이다. 예쁘지 않누?」

「어디서 굴러왔는지 묻는 겁니다.」

강 여사는 종종 입버릇처럼 태헌에 대해 이야기했다.

능력 좋고 똑똑한 데 반해 인간미가 없어 걱정이라며, 그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많이 생겨야 할 텐데, 하는 노파심을 드러냈다.

직접 만난 태헌은 상상 이상이었다. 연서가 만난 그 누구보다 오만하고 무례했다. 신랄하고 무자비했다.

그리고 그 성격은 지금 이 식탁 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느긋했으면, 저 모르게 장례라도 치르셨겠습니다.”

태헌은 힐난하며 전보다 부쩍 쇤 강 여사의 흰머리를 심란하게 바라보았다. 머리칼을 깔끔하게 빗어 넘겼으나 곳곳에 깃든 세월의 흐름은 숨기지 못했다.

영상통화를 나눴던 지난달보다 주름의 음영이 더 깊어졌다. 여든둘의 적지 않은 강 여사의 나이는 태헌의 근심이었다.

“할머님 죽는 날을 저만 몰랐겠네요. 그걸 바라십니까?”

“예끼, 할미 아직 안 죽는다.”

“누구 작품입니까.”

“나다. 내가 그랬어. 우리 태헌이 큰일 하는데 걱정 끼치면 안 되니 말하지 말라 그랬다.”

“우 상무가 말 그렇게 맞추자고 합니까?”

딱딱한 음성에서 노기가 번들댔다. 우장혁 상무는 강 여사의 장남이자, 태헌에겐 큰아버지였다.

강 여사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라온 기획 우장혁 상무와 세원 홀딩스 우이혁 부사장.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밥그릇 싸움을 치열하게 했다.

그리고 태헌은 차남 이혁의 아들이었다.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증거를 바탕으로 장혁을 경계하고 있었다.

태헌은 처음부터 강 여사가 용인 집에서 머무는 게 마음에 차지 않았다. 용인에서 한적하게 머무르길 원하는 강 여사의 뜻이 우 상무 일가에 밀려 유배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단 걸 알 텐데도 그녀의 고집은 무쇠 같았다.

강 여사의 선택에 태헌은 혀를 내두르면서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강 여사의 마음이 편해야 했으니.

동시에 태헌은 한국을 떠나야 했다. 3천억을 투자한 미국 진출을 준비 중이었고 현지 기업을 인수해 본격적인 미국 사업에 발을 들였다.

부친 이혁을 믿고 출국해 간간이 강 여사의 건강에 대해 보고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 전, 강 여사의 건강검진 결과가 원본으로 발송되며 그간 보고되던 정황이 허구였단 걸 알게 되었다.

우 상무가 점점 나빠지는 강 여사의 상태를 눈속임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부친을 닦달했으나 몰랐다는 변명뿐인 대답이 돌아왔다.

우 회장이 죽기 직전 태헌에게 강 여사를 부탁했다. 너만 믿으마, 하던 말엔 애정도 있었으나 태헌의 능력을 인정한단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를 증명하듯 태헌은 누구보다 많은 유산을 증여받았다.

우 회장이 세상을 뜬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 강 여사의 입김은 이제 우 회장이 살아있을 때만 못했다.

본래도 모질지 못한 강 여사는 권력이나 정치에 관여하기보단 남은 생을 유유자적 한가로이 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강 여사의 죽음을 기다리는 패륜적 인간이 몇 있었는데, 첫 번째 위험인물이 우 상무였다. 우 상무가 건강검진 결과를 속인 이유는 뻔했다. 강 여사가 건강해 보이도록 둔갑시키고 뒤에서 작당을 벌일 작정이었을 거다.

태헌이 방심한 사이 강 여사의 죽음을 준비하고 유산을 최대한 많이 상속받으려 수를 쓰려는 거다.

태헌에게 실책은 용납되지 않았다. 완벽해야 하며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루어야 했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올바른 이치였다.

우 상무가 눈에 훤히 보일 만큼 더러운 수를 썼다면 그 싹을 잘라야 옳았다. 그러나 강 여사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우장혁이가 내 아들이다. 내 첫정이라 이 말이야. 태헌이 네가 암만 예뻐 봐야 내 아들만 하겠누?”

“평생 자식들에게 호구 잡혀 사셨으면, 이젠 털어내셔야죠. 할머님께서 이러시면 우 회장님께 할 말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태헌의 눈동자가 연서를 향했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연서는 공연히 생수만 들이키고 있었다.

“본래 있던 간병인은 어쩌셨습니까.”

“윤해 말하는 게야? 주에 한 번 이리 오기로 했다. 대학 다니는 아들을 챙겨야 해서 용인까지 오긴 어렵다더구나.”

“그래서 이 여자를 들였습니까? 우 상무가 추천한 사람을 의심도 없이?”

“국한 병원 간호사였어. 병원에서 연이 닿은 게야. 이 착한 애를 왜 의심하누. 이 기회에 내 사람으로 삼은 것뿐이다.”

“간호사 출신이요.”

“그래, 화를 내도 할미한테 내야지, 연서는 죄 없다. 어째 그리 무례하니, 태헌아.”

태헌의 어둑한 시선이 연서를 해체할 듯이 꼼꼼했다. 연서는 자신을 바닥까지 끌어내릴 것 같은 날 선 관찰에도 기죽지 않고 옅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겠지.

태헌은 분명 강 여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날아올 만큼 할머니를 따르는 손주.

모르는 간병인이 강 여사 곁을 떡하니 지키고 있으니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죄가 없다.”

태헌이 나직하게 발음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파고들던 시선이 사라진 후, 그녀는 남몰래 한숨을 토해냈다.

목을 조르지도 않는데 숨 막히는 기분이었다.

“태헌아, 할미 많이 늙었다. 살아있는 동안 내 새끼들 웃는 얼굴이나 원 없이 보고 싶구나.”

“음식 식습니다. 우선 드시죠.”

태헌은 필시 할 말이 있는 더 눈치였으나 말을 아끼고 식사를 이어갔다.

밥을 코로 마신 것 같은데, 어느덧 밥그릇이 비었다. 대기하던 복희 이모님이 후식을 내왔다.

강 여사는 깊은 맛이 도는 수정과를 쭈글쭈글한 손으로 연서 앞에 놔주었다.

“연서야, 참 시원하고 달다. 너도 먹어봐라.”

“네. 향이 아주 좋아요, 선생님.”

“그렇지? 적당히 찬 게 우리 연서 좋아할 줄 알았다.”

저녁 식사를 했으니 이제 태헌은 돌아가려나. 아니면 내일 아침에 떠나려나.

연서는 지금처럼 함께 식사하는 상황이 두 번 다신 없었으면 했다. 만약 내일도 태헌이 이곳에서 밥을 먹는다면 강 여사는 연서를 다시 이 자리에 앉히려 들 터였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은 걸 보며 흐뭇하게 웃는 강 여사의 얼굴에서 지난날의 기억이 스쳤다.

「태헌이한테 딱 우리 연서 같은 색시가 있었으면 좋겠어.」

「정 줄지 몰라 제 부모도 포기한 녀석이다. 우리 연서처럼 마음 고운 아이가 태헌이 곁에 있어 주면 할미는 지금 눈 감아도 여한이 없다.」

설마 그때의 일을 현실로 만들고 싶으신 건 아니겠지. 잠깐 상상했다가 연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말도 안 됐다. 태헌과의 격차는 우주와 개미굴처럼 멀었다. 아무리 강 여사의 뜻이라고 해도 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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