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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1화 (1/85)

도망 비서

1화

*

6월. 막바지로 치달은 봄 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지대가 높은 곳에 지어져 볕과 풍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주택은 동화 속 집처럼 아름다웠다.

연서가 상주 간병인으로 이 별장에 온 지는 6개월째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세원 그룹 수장 우 회장의 아내, 강 여사를 간호하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하고 낮잠이 든 강 여사의 평온한 얼굴이 오후 햇볕처럼 따스했다. 연서는 침대맡에서 물러나 조용히 강 여사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앞마당은 푸른 잔디가 빼곡했다. 양옆으로는 무성한 나무가, 탁 트인 시야로는 평야가 펼쳐졌고 저 멀리 산이 보였다.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이 맞닿은 평야는 서울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강 여사가 노후를 보낼 거처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마음이 편해야 몸의 병도 완화되는 법이니.

연서는 주방으로 통하는 옆문으로 빠져나와 뒤뜰로 향했다.

주택 뒤쪽 주차장이 보이는 공터는 연서의 휴게실과도 같았다. 나무 벤치를 지나 우 회장의 손주들이 즐겨 탔다던 그네에 앉았다.

한들한들한 바람이 연서의 앞머리를 장난스레 헤집어 놓았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근심이 없어졌다.

연서는 고개를 뒤로 꺾고 끼익끼익, 그네를 흔들며 무념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쩌면 이곳의 평화에 동화되어가고 있는지 몰랐다. 아버지의 사채를 떠안았단 불행이 안개에 가린 듯 희미하게 느껴지곤 했다.

8개월 전이었다. 평생 아버지를 쫓던 사채업자들은 연서가 근무하던 병원까지 찾아왔다. 온갖 행패를 부리며 난장을 피웠고 결과적으로 연서는 실직했다.

이후, 강 여사의 첫째 아들 우장혁 상무의 제안으로 이곳에서 일하게 됐다. 안하무인이던 사채업자는 감히 세원 그룹 사모 강 여사의 거처까지 쳐들어오지 못했다.

“휴….”

연서는 강 여사의 건강검진 결과가 부쩍 나쁘게 나왔던 일주일 전을 회상하며 쓰게 한숨 쉬었다. 올해 여든둘이 된 강 여사의 건강이 나날이 악화되었다.

근무하던 병원에서 처음 강 여사를 만났으니, 해를 세어 보면 그녀와 함께한 세월이 벌써 3년이었다. 강 여사가 보인 인자함과 포용력, 따스한 정은 눈물이 날 만큼 감사했다.

하지만 헤어짐을 준비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연서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 채 염원했다.

조금만 더 오래 사셨으면. 건강하셨으면.

얼마나 지났을까. 흘러가는 구름 구경을 하는데,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이쪽으로 다닐 만한 사람이 없는데.

손님이나 짧게 머물다 가는 가족들은 아닐 터다. 대부분은 정면에 있는 주차장을 이용했으니.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복희 이모님은 한창 식재료를 손질 중이고 영례 이모님은 잠깐 아들 집에 가신다며 외출하셨다. 가드들은 정원과 대문 근처에서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기에 그쪽도 아닐 터다.

누가 온단 말은 없었는데….

연서가 그네에서 내려와 바로 서는 순간이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머리칼, 날카로운 눈썹, 감정 없는 동공까지. 우 회장의 젊은 날을 반쯤 닮은 모습을 한 남자였다. 그는 연서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일정한 보폭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너른 어깨가 흔들림 없이 가까워졌다.

분명히 그 사람이었다. 언젠가 강 여사가 사진첩에서 보여준 손주, 우태헌.

그리고 잠깐 마주쳤었던…….

강 여사는 우 회장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과 딸 둘을 보았고, 슬하에 손주를 여럿 두었다. 그녀의 차남이 낳은 핏줄이 태헌이었다. 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귀국한 걸까.

연서의 긴 수색을 알아차린 것처럼 태헌도 그녀의 손에 잡힌 그넷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서를 주시하는 남자의 길쭉한 눈매는 서늘하고 차가웠다.

아차. 너무 빤히 보았다.

연서는 그넷줄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모래 장난을 치던 아이처럼 놀라 허둥대면서도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우태헌 이사님 맞으시죠?”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굽니까.”

태헌의 목소리는 단조로웠으나 그 울림이 깊고 압도적이었다. 가라앉은 눈빛은 불쾌함을 표출하는 것 같기도, 무심한 것 같기도 했다.

연서가 얼른 고개를 숙여 포식자의 비위를 능숙하게 맞추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연서라고 합니다.”

이 집을 찾는 우 회장의 핏줄들에게 하듯이 정성 들여 허리까지 숙였다. 그러나 태헌은 인사를 받는 대신 등을 보이며 집 안으로 향했다.

“할머님은.”

“주무십니다. 괜찮으시면 한 시간 정도 기다려 주시겠어요?”

연서가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말하자 발을 멈춘 태헌이 천천히 뒤돌았다.

“그래서 그쪽은 뭡니까.”

“네?”

“가사 도우미치곤 어린데.”

“상주 간병인이에요.”

“간병인이라고.”

말을 곱씹는 태헌의 낮은 음성이 어쩐지 벼락처럼 느껴졌다. 태헌의 눈치를 보며 연서가 답했다.

“…네.”

“누구 추천으로 들어왔습니까.”

“우장혁 상무님께서 제안해 주셔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는 어딘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왜 그러시지?

“우 상무가 한연서 씨를 여기 꽂아둔 덴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네?”

“몰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질책이 담긴 음성에 어깨가 굳어버렸다.

혹여 간병인으로서 마음에 차지 않는 걸까.

막막한 분위기 속에서 연서가 머뭇머뭇 말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하긴 했나 보네.”

“…….”

“아니면, 결백해요?”

대체 왜 그는 화가 난 걸까. 아니야. 이해하려 하지 말자.

연서가 차갑게 식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진 잘 알고 있다. 연서가 만나온 사람 중, 세원 그룹 일가는 그중에서 가장 최상위에 자리한 부류였다.

이런 자들은 어쭙잖게 과시하지 않았다. 조용히 짓밟을 뿐. 태헌의 손짓 한 번이면 연서의 인생은 시궁창에 처박히고도 남았다.

다만 연서는 이미 밑바닥을 배회 중이었고 이 이상 불행해질 수는 없었다.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 바짝 기는 것이 연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죄송합니다. 모시는 동안 거스르지 않게 잘하겠습니다.”

“이 집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본인 혼자고?”

“…네.”

눈동자를 굴린 연서가 한 박자 늦게 대답하자 태헌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다시금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로 연서가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이사님, 선생님께서 방금 주무셔서 그러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지금 기분이 바닥이야.”

“네?”

“두 번 말해야 하나. 한연서 씨는 사람 말을 잘 못 알아들어?”

“….”

“나서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교육받은 게 없나 봐.”

고저 없이 말하는 태헌의 뒤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는 먹구름처럼 연서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압박감에 연서가 숨을 삼켰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얇은 티셔츠를 입은 연서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침실은 이쪽이에요.”

그녀가 굳은 채 앞장섰다. 폭풍 전야 같은 초조함이 몰려오고 있었다.

*

주택의 다이닝룸에 크게 난 창으로 어둠이 깃들었다. 저녁 하늘에 미처 물러가지 못한 햇살이 몇 줌 머물렀다. 그 색이 기묘하고 예뻤다.

그림 같은 풍경이 보이는 곳에 길고 커다란 식탁이 있었다.식탁은 정갈하고 푸짐한 음식으로 가득 채워졌다. 주방 일을 도맡는 복희 이모님이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했다.

‘우리 태헌이 입맛이 까다로우니까 찬을 많이 하기보단 메인에 신경 쓰는 게 좋을 게야.’

강 여사가 상차림에 각별한 지시를 내렸다. 세원 그룹의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별장의 문턱을 드나들었으나 오늘처럼 강 여사가 직접 복희 이모님을 찾아 부탁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 여사의 장남인 우 상무가 왔을 때도, 차남과 딸들이 방문했을 때도 보이지 않던 환대였다.

유독 이사님을 아끼시는 거겠지. 종종 연서에게도 태헌을 거론하며 사진을 보여줄 만큼 애정이 각별해 보였다.

식탁 앞에 다다른 강 여사의 휠체어가 멈췄다. 그녀가 잘 차려진 상 위를 만족스레 둘러보았다.

“지 여사가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셔요.”

복희 이모님이 고개를 꾸벅 숙이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났다. 휠체어를 밀고 온 태헌이 움직였다. 상석에 강 여사를 앉힌 뒤 그 우측에 착석했다.

본래 휠체어를 미는 건 연서의 몫이었기에 할 일을 빼앗긴 그녀는 멋쩍게 그 뒤에 서 있어야 했다.

“연서도 앉거라.”

강 여사의 권유에 연서는 태헌의 눈치를 살피곤 조심스레 입을 뗐다.

“오늘은 두 분께서 오붓하게 식사하세요. 저는 방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할미가 앉으라면 앉는 게야. 늙은이 목 빠지겠다.”

강 여사가 짐짓 엄하게 일렀다. 연서의 혀끝에 하지만, 하고 부정의 말이 쓰게 머물렀다.

오랜만에 귀국한 손주와 밀린 이야기를 나누셔야 할 텐데.

한편으론 태헌과 함께 식사하는 걸 마다하고 싶기도 했다. 아까부터 태헌은 연서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연서가 제아무리 사회생활에 능숙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무시는 솔직하게 괴로웠다.

“선생님.”

연서가 부드러이 웃으며 애교를 담아 그녀를 불렀다. 식사 자리에서 빠지고 싶단 의미였다.

“지 여사 성의를 봐서라도 앉거라. 이걸 우리 둘이 무슨 수로 다 먹누.”

그러나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분이 아닌데. 연서가 곤란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거절도 적당히 해야 예의지.”

돌연 태헌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라면 분명 식사를 함께하는 걸 불쾌하게 여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제가 방해될 것 같아서요.”

“이렇게 지체하는 게 더 방해 같은데.”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단 걸 깨달은 연서가 태헌의 맞은편의 의자를 뺐다. 바른 자세로 앉자 강 여사의 따뜻한 눈길이 와닿았다.

“할미랑 겸상하기 싫은 게야?”

“그런 소리 마세요. 선생님이랑 보내는 시간은 항상 좋은걸요.”

눈썹을 살짝 늘어뜨린 연서가 섭섭함을 내비치자 강 여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먹자.”

강 여사가 숟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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