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15 (8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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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5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선물을 주고받고 가족이나 연인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날이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우리 집에는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였다. 파티용품점에서 산 여러 가지 장식으로 꾸며둔 덕분에 전구를 달지 않았는데도 아주 화려했다. 오늘은 지인들끼리 모여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유리아와 나는 여럿이 모여 오늘 하루를 끝마치는 대신 둘이서 단란히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선물을 주고받는 날 답게, 나는 여러 사람과 선물을 나눴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특수 제작한 볼펜이었다. 시중에서 거래되고 있는 것과 달리 받을 사람의 이름과 함께 예쁜 문양을 새겨 넣었다. 그것을 유리아와 가게의 직원들에게 선물하고, 지인들과 동네 아이들에게도 하나씩 건네주었다. 선물을받은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행복해졌다. 물론 주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볼펜을 건넨 만큼 많은 선물을 받았다. 받은 물건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유리아가 준 분홍색 목도리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선물도 모두 좋았지만, 그녀의 것만큼 좋지는 않았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나는 하나 남은 선물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소파에 늘어졌다. 이것은 이즐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항상 내 옆에서 얼쩡거리던 그는 오늘만큼은 전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찾아가 봤지만 외출한 상태였는지 노크를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행방불명됐던 그가 모습을 보인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이미 저녁 식사는 끝난 상태였고, 자기 전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나는 이즐리의 선물을 그 집 우편함에 넣기 위해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홍색 목도리를 두르고 두꺼운 겉옷을 입었다. 때마침 우리 집 앞으로 찾아온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우물쭈물거렸다. 그래서 나는 산책을 하자고 말하며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둘이 있으면 이즐리가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이즐리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멈춰 섰다. 그는 부끄러워하면서 겉옷 주머니에서 선물을 꺼냈다.

“메리 크리스마스.”

검은 상자에 노란 리본이 묶여 있었다. 내가 선물을 받자 그가 작게 속삭였다.

“너무 늦게 준 건가?”

“늦지 않았어요. 12시가 지나지 않았는걸요. 아직은 크리스마스예요.”

“……사실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너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어. 그런데 네가 선물을 좋아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 돼서, 이렇게 시간이 걸려버렸네.”

그는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 왜 그런 걱정을 한 걸까. 이 안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든 나는 기쁘게 받을 자신이 있었다. 본래 선물이라는 것은 물건 자체보다, 상대방을 위해 고민해서 선물을 고른 그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뜯어봐도 돼요?”

이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아름다운 은색의 목걸이가 있었다. 목걸이 끝부분에는 물방울 모양의 보석이 달려 있었다. 보석은 분홍보다는 붉은색에 가까운 색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나는 걱정스레 내 얼굴을 훑어보는 이즐리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예뻐요. 고마워요, 이즐리.”

그제야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도 줄 게 있어요.”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선물을 꺼내 이즐리에게 건넸다. 이즐리가 놀란 얼굴로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나한테 주는 거야?”

“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네, 이즐리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이거 꿈 아니지?”

이즐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뺨이 뻘겋게 달아오르자 그는 손을 놓고 꿈이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이즐리는 내가 자신에게 선물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는 내게 선물을 받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이즐리는 조심스레 선물을 건네받곤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그때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명한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진다. 순간, 내 눈이 잘못된 건 줄 알았다.

이즐리는 울고 있었다.

“……울어요?”

“아니, 아니야. 안 울어.”

이즐리가 커다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런 목소리로 안 운다고 말해도 믿어줄 사람은 없다. 왜 갑자기 눈물을 터뜨린 걸까? 내 선물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길래 이러는 걸까? 울고 있는 이즐리가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팔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울지 마요.”

“안 울어…….”

“거짓말. 울고 있잖아요. 솔직히 말해봐요.”

“……그래, 울어! 울고 있다고…….”

“왜요……?”

“네가 선물을 줬다는 게, 너무 기뻐서…….”

이즐리가 흐느꼈다.

“라일라 너한테 선물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너한테, 나는 그저 귀찮고 무서운 사람이잖아. 싫다고 거절해도 질기게 쫓아온 짜증나는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한테 선물을 줘서 고마워.”

“……고개 들어봐요.”

“지금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우느라 못생겨졌을 거야.”

“괜찮으니까 얼른.”

이즐리는 내 말대로 얼굴을 들었다.

못생겨지기는 무슨.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눈가와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는 점 뿐이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젠 알아요. 이즐리가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사실은 훨씬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즐리, 이즐리는 저랑 유리아를 위협할 건가요?”

“아니…….”

“절 협박할 건가요?”

“아니.”

“절 때릴 건가요?”

“아니! 절대 그러지 않아. 널 상처 입히는 건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게 나라고 해도……!”

“네. 알아요. 그래서 이즐리가 무섭지 않아요.”

"……."

“가끔 절 따라다니는 이즐리를 귀찮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죠. 아주 가끔이요. 대부분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당신과 그 많은 이야기를 나눴겠어요. 이제 전, 이즐리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친구……?”

“그래요. 친구요.”

이즐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늦게 말해서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물기가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가 하얗게 빛을 낸다. 그것은 내게 햇빛이 비친 수면을 떠오르게 했고, 보석함 속에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붉은 보석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난 처음으로 이즐리의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피처럼 붉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감상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이즐리의 눈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문득, 저곳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즐리의 뺨을 감싸 안고 있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쳤구나, 라일라.

요즘에 나는 정말 이상하다. 이즐리와 닿지 못해서 사람처럼 안달 난 사람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셸리가 사라졌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이런 행동이 그를 오해하게 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없다.

“……함부로 만져서 미안해요.”

나는 손을 떼려고 했다.

그때, 이즐리의 손이 내 손을 감싸 안았다.

“계속.”

그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이렇게 있어줘.”

“……아.”

눈에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 린다.

단지.

단지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울 정도로 감동을 받는다.

내 손이 닿았다는 것만으로 얼굴이 그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는 눈만큼 빨갛게 달아오른다. 자신에게 얕은 상처조차 내지 못할 작은 여자아이를 겁내고 두려워한다.

사랑이라는 건 뭘까?

그게 도대체 뭐길래 저렇게 거대하고 강한 남자를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리는 걸까? 그게 뭐길래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남자를 떨게 만들고, 언제나 오만한 웃음을 띄던 남자를 눈물짓게 만들까? 모든 사람들을 우습게 알던 남자에게 배려심을 불어넣어주는 걸까?

나는 모르겠다.

가족의 사랑은 알고 있다. 서로가 있음에 안정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받는 사랑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남녀 사이의 사랑은 잘 알지 못한다. 타인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는 사랑을,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사랑을, 서로에게 닿고 싶게 만드는 사랑을 모른다.

이때까지 나는 한 번도 남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나게 된 남자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를 사랑한 적은 없었다. 그 남자를 선택한 이유는 단지, 그와 함께한다면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준수한 외모에, 친절한 성격. 직업은 7급 공무원으로 안정성 있었다. 함께 삶을 꾸리기에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세 번의 만남 이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했었다. 다른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데이트를 하고, 웃고 떠들고, 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1년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 전부 너 때문이야! 다른 여자를 만난 건 전부 너 때문이라고……!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다.모든 것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내 탓이라고 말했다. 나를 원망하며 자신을 정당화했다.

- 그렇다고…… 바람을 피우는 게 정상은 아니지. 넌 네가 잘했다고 생각해?

그때 나는 화를 냈다.

바람을 피운 것은 전부 네가 모자라기 때문이니 비겁하게 변명을 하지 말라고 했다. 네 말은 전부 틀렸다고 잘못한 것은 너 하나뿐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틀리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래, 맞다. 그의 말대로 나는 사랑을 모른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사랑해본 적 없다.

유리아를 사랑하지만, 이즐리가 말하는 사랑은 알지 못한다.

가진 것을 전부 내어주고 싶고,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함께 밤을 보내고 싶은 그 마음을 모른다. 수많은 로맨스 소설을 읽고 또 읽어서 그게 무엇인지 이론으론 알고 있지만 결국에는 모른다.

그저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감정이라고 예상할 뿐이다.

하지만.

“……절 좋아하는군요?”

이즐리를 보고 있으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웅. 정말로.”

아주 조금이지만,

“정말로 좋아해.”

알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별거 아닌 선물에 울음을 터뜨리는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손안에 들어온 온기가 로맨스 소설 같은 달콤한 환상을 꿈꾸게 해 준 걸 지도 모른다.

나는 저 너머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겨울 하늘에 별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 가고 봄이 올 것이다.

하얀 눈이 녹고, 시리기만 했던 겨울바람은 따스한 꽃향기가 되어 다가오겠지. 그때가 되면 한겨울에 날 찾아온 초대받지 못한 손님도 언젠가 사랑하는 소년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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