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2
어젯밤, 눈이 펑펑 내렸다.
새까만 하늘이 하얗게 뿌옇게 변할 정도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상은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눈이 바닥에 폭신하게 쌓였고 집과 우편함은 흰색으로 뒤덮었다. 나는 부엌 창가에 비치는 하얀 세계를 감상하다가 컵에 따뜻한 우유를 부었다. 이제 꿀을 타면 맛있는 꿀 우유가 완성된다. 나는 컵을 들고 거실의 창가로 향했다. 소파 사이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 나와 유리아 몫의 꿀 우유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하루 눈이 많이 와서 옷가게를 쉬기로 했기 때문에, 유리아는 소파에 파묻힌 채 여유롭게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건 누구한테 줄 선물이야?”
“아, 이건 엠마한테. 노란색 장갑이야.”
“잘 어울리겠네.”
이 세계에도 크리스마스가 있었다.
모든 것이 전생의 크리스마스와 똑같았지만 시행하는 날짜가 달랐다. 지금은 12월로부터 한참 지나간 날이었지만, 아직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멀었다. 나는 소파 팔걸이에 놓아두었던 책을 다시 들어 올렸다. 유리아에게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까, 생각하면서. 여유로운 한때였다.
그 뒤로 평소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이즐리가 찾아오고, 꽃을 건네고, 집 주변을 걸으며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오늘은 출근을 안 하나요?”
“응, 오늘은 안 하는 날.”
이즐리가 쉬는 날이라서 좋다는 말을 늘어놓을 때, 하얗고 동그란 무언가가 그의 옆 얼굴을 강타했다. 그건 눈덩이였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눈덩이가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무 뒤에 숨어 킥킥대는 동네 아이들이 보인다.
아, 너희가 던졌구나. 이 장난꾸러기들.
“……괜찮아요?”
나는 다시 이즐리에게 눈을 고정했다. 내가 식빵을 던졌을 때는 무섭게 받아치던 이 사람이 눈덩이를 맞다니,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생각해서 일부러 맞아준 것 같았다.
“당연히 괜찮지. 하나도 안 아파.”
이즐리는 얼굴에 묻은 눈을 탈탈 털어내고 뒤를 돌아보았다.
“너희들…… 눈을 던졌겠다?”
아이들이 까르륵거렸다.
“들켰어!”
그들은 다시 눈을 뭉쳐 이즐리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눈 뭉치 하나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그때 거대한 손이 눈 뭉치를 막았다. 이즐리의 손바닥에 막혀 박살 난 눈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무어라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그는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5대 1의 불리한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본래라면 한 명쪽이 불리해야 했지만, 이 싸움에 선 다섯 명 쪽이 심하게 밀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눈 폭격기라도 된 것 같은 이즐리에게 쫓기며 도망갔다. 그것이 즐거운지 하하호호 웃는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나는 눈싸움을 하다 말고 내게 찰싹 달라붙은 셸리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아이들은 지친 모양인지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즐리도 똑같이 하늘을 바라보며 눈밭에 누웠다. 이런 감상을 느끼는 것이 부끄럽지만, 눈밭에 누워 있는 이즐리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게 핸드폰이 있었다면 무의식적으로 그의 모습을 찍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마구 저어 그런 생각을 멀리 날려버렸다. 그리고 이즐리에게 다가갔다. 눈을 잔뜩 맞아서 옷에 눈들이 묻어 있었고, 얼굴이 평소보다 더 상기되어 있다.
“재밌어요?”
“재밌어.”
이즐리는 웃으며 말했다.
“좀 유치한가?
“뭐가요?”
“눈싸움으로 이렇게 즐거워하는 거.”
“그게 왜 유치해요. 저도 눈싸움하는 거 좋아하는걸요. 이렇게요.”
그러면서 나는 눈을 뭉쳐 이즐리의 얼굴을 맞췄다. 그의 오른쪽 눈에 떨어진 눈 뭉치가 하얗게 번졌다. 충격으로 부서진 눈은 얼굴의 곡선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즐리가 작게 웃었다.
“이즐리도 제가 유치해 보이나요?”
“……아니.”
“그런 거예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오히려, 귀여운 것 같아.”
그런 소리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는구나. 부끄러운 줄 모르는 건 아닌가. 아까까지만 해도 뺨과 코만 빨갛던 이즐리의 얼굴이 모두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귀랑 목까지 전부 사과처럼 변해 있었다. 나까지 부끄러워지는 것 같다.
“시끄러워요.”
나는 이즐리에게다시 눈 뭉치를 던졌다. 이번에 노린 건은 입이다. 이즐리는 에퉤퉤,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뱉어냈다.
“라라, 라라도 같이 놀아!”
그때 남자아이 중 하나인 데이비드가 그렇게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해맑게 웃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아이를 받아내려고 하다가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
쿵!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제임스는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제임스는 다른 아이들보다 크고 통통한 편이라, 몸 위에 올려두자 숨 쉬는 게 버거워졌다.
나는 가쁘게 숨을 내쉬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라일라! 괜찮아?”
이즐리가 내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도 전부 나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내 품에서 벗어난 제임스도 넘어질 줄 몰랐다며 나를 걱정한다. '괜찮아?'라는 말의 폭포 속에서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선 진정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깊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다들 진정해요. 전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 순간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나무를 지지대로 삼아 몸을 일으켰다. 그 후에는 상태를 확인해보기 위해 이리저리 걸어보았다.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영 걷기 불편했다. 결국 나는 얼마 걷지 못하고 근처에 버려져 있는 나무 상자 위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즐리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깐, 잠깐 실례할게.”
“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다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내 상태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괜찮으니 그만하라고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부러진 건 아닌 것 같아.”
“그 정도로 쉽게 안 부러져요. 그냥…… 다리를 삔 것 같아요. 아주 살짝이요.”
“많이 아파……?”
이즐리가 우울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다친 게 그렇게 슬픈 걸까? 나는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아니에요. 별로 안 아파요. 살짝 삔 것뿐이라니까요?”
“부축해줄게. 아니…… 내가 옮겨줄게!”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내 거절에도 이즐리는 굳건했다. 그는 나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 올렸다. 어찌나 가볍게 들어 올리던지, 순간 내 몸무게가 1킬로그램도 안 되는 줄 알았다.
“이 근처에 우리 집이 있는데 거기서 치료하자.”
집? 그 말을 들은 나는 그의 일방적인 제안에 놀라면서도, 한 번도 이즐리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처에 집을 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가 사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이즐리는 내가 사는 곳을 아주 잘 알고 있는데. 이렇게 보니 내가 참, 이즐리에게 무관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즐리가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싫으면 거절해도…….”
“좋아요.”
“어? 뭐라고?”
“좋다고요.”
평소라면 집으로 가자는 말을 사양했을 것이다. 그의 제안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10분 정도만 되돌아가면 우리 집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이즐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도련님이 청소는 잘하고 지내는지, 식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된 것이다.
이즐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이즐리가 사는 곳은 그가 말했던 대로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집은 다른 집보다는 큰 편이었고 붉은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마당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인지 적당히 풀들이 자라나 있었다.
거실은 심플하게 꾸며져 있다. 소파가 있고, 책상이 있다. 벽에는 그림들이 붙어 있고 벽난로 위에는 아기자기한 나무 조각이나 도자기 인형들이 세워져 있다. 적당히 전문가의 손길이 들어간 것 같았다.
저택에 살 때는 옷을 아무 데나 벗어두고, 방을 어지럽혀둬서 걱정스러웠는데…… 꽤 깨끗하게 지내는 것 같다.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서 그때는 왜 그랬던 걸까. 나를 괴롭히려고 그랬던 건가. 생각해보니 참 괘씸하다. 그래서 나는 이즐리를 째려보았다. 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 집에 들어오자 이즐리는 잔뜩 긴장한 것 같았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행동했고 말도 계속 더듬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곤 땀을 흘리기까지 한다. 벽난로에 불을 때지 않아서 집 안의 온도는 싸늘한 편이었는데.
“춥지? 잠시만.”
이즐리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벽난로로 향했다. 소파와 벽난로의 거리는 아주 짧았다. 그런데 이즐리는 벽난로까지 가는 길에 세 번이나 넘어지려고 했다. 보는 사람이 다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무사히 불을 때고 돌아온 이즐리는 내 겉옷을 받아 들고 옷걸이에 걸어주었다. 그 후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나의 신발을 벗기려고 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제가 벗을게요.”
이즐리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 웅…….”
그는 차갑게 적신 수건을 가지고 와서 내 다리를 냉찜질해주었다. 이즐리의 손이 닿을 때마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발을 만지게 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이때 나는 이즐리의 집에 온 것을 살짝 후회했다.
어느 정도 열이 내린 뒤에는 이즐리는 어디선가 붕대를 가져와서 발목을 꽁꽁 감쌌다. 붕대를 자꾸 바닥에 떨어뜨리는 등의 사소한 실수가 있었지만 꽤 괜찮은 솜씨였다.
“……능숙하네요. 응급 처치하는 법을 배운 건가요?”
“응, 훈련 같은 걸 하다 보면 다치는 일이 많거든. 그래서 조금은 배워뒀어.”
그는 붕대를 고정한 후 내게서 손을 떴다.
“배고프지 않아?”
나는 벽면 한쪽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열두 시가 넘은 시각. 슬슬 점심을 먹을 때가 다 되어간다. 식사를 하고 가라는 의미일까? 함께 밥을 먹다 보면 그의 식습관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즐리는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며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뒤 딱딱한 음식 재료를 써는 소리, 무언가 끓이는 소리가 차례차례 들려오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뭐 만드는 거예요?”
“아…… 그게 수프야, 수프!”
“이즐리가 요리하는 건 처음 봐요. 요리 잘해요?”
“요리는 지, 지금 만드는 수프 정도만? 엄청 잘하는 건 아니야…….”
“그동안 수프만 먹고 산 건 아니죠?”
“수프를 먹긴 하는데 거의 사 먹는 것 같아.”
“너무 사 먹는 건 안 좋아요.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게 더 건강에도 좋고 돈도 절약돼요.”
난 그 말을 내뱉자마자 이마를 짚었다. 진짜 나 왜 이러지? 또 오지랖을 부려버렸다.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이즐리는 기쁜 듯이 말했다.
“그럼 요리책을 사봐야겠네.”
짧은 요리 시간이 지난 뒤, 내 앞에 내밀어진 것은 닭고기랑 야채가 들어간 크림수프였다. 계속해서 나를 쳐다보는 이즐리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다 먹지는 못했다.
집에 갈 때는 그의 부축을 받아 걸었다. 또다시 이즐리가 나를 옮겨주겠다고 했지만, 다리 상태도 괜찮았고 그에게 업혀 가거나 안겨 가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유리아는 내 발목을 보고 바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리의 상태를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다. 유리아에게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날 동안은 내내 환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