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11 (8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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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1

해가 뜨는 아침. 유리아가 화병 속 꽃들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라라, 요즘 들어 도련님이…… 아니, 이즐리가 보이지 않네? 문 앞에 꽃만 놔두고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아. 무슨 일 있으신 걸까?”

“아마, 일자리를 구하고 있을걸.”

“응? 일자리?”

“……여기서 계속 살기 위해선 안정된 직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봐.”

이렇게 안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나는 직원에게 받은 사업 자료를 훑어보았다. 서류에는 판매량, 수익량등의 결과가 그래프화 되어 나타나 있었다. 이즐리에게 직장을 구하라고 말한 이후 나는 직원도 구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가게와도 계약을 맺었다.

사업은 순행 중이었다. 잘하면 가까운 시일 내에 직접 볼펜 가게를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런데 나는 가끔 허전한 기분이 느끼곤 했다. 무언가 빠진 게 있는 것처럼.

“그렇구나. 맞아. 여기서 오래 지내려면 돈을 벌 필요가 있지.”

유리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가 물을 갈고 있는 화병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꽂혀있는 붉은 꽃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바로 이즐리를.

그의 붉은 눈동자를 떠올린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하하."

너무 어이없는 사실이라,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류로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그래, 어이가 없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그동안 이즐리를 보지 못해서 허전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아니,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동안 그렇게 붙어 다니지 않았는가. 그럼 당연히 이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항상 약지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가 사라진 것처럼. 그 반지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고 하더 라도 항상 곁에 두고 있었던 존재이기에 부족한 느낌이 들고 마는 것이다.

좋아. 이제 됐다. 더 이상 이즐리 생각은 하지 말자.

나는 옆에 있던 책상 위에 서류를 놓아둔 채 소파에 파묻혔다. 지금 내게 필요한 생각은 최근 거래를 요청한 중소 상단과 계약을 진행할지 말지에 대해서였다. 난 소파 팔걸이에 두 팔을 걸어둔 채 소파에 늘어졌다. 얼마나 푹신하던지 침대 대용으로 써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가구를 들일 때 돈을 많이 쓰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똑, 똑, 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일까? 자신들이 알게 된 즐거운 이야기를 전해주러 온 동네 아이들일까, 쿠키가 잘 만들어졌다고 나눠주러 온 옆집에 사는 사람일까? 아니면 미카엘라나 엠마일지도 모른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 유리아가 먼저 선수를 쳤다.

“네, 나가요!”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고는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앗, 안녕하세요……?”

유리아는 깜짝 놀란 사람처럼 감탄사를 내지르더니 내 쪽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라라, 얼른 나와볼래?”

“응? 알았어.”

그곳에는 이즐리가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내게 꽃 한 송이를 건네며 말했다.

“안녕, 좋은…… 오후라고 해야 하나?”

“맞아요, 오후. 벌써 여섯 시가 다 되어가니까요. 오랜만이네요, 정말.”

“응, 몇 주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네.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어.”

이즐리는 내 눈치를 보며 한 글자, 한 글자를 조심스레 내뱉었다. 내가 자신이 한 말에 기분이 불쾌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은 나도 비슷한 기분이었는데.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를 신경 썼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게 부끄러웠고, 이즐리에게 희망 고문을 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라고 말할 뿐이다.

나는 꽃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문 앞에 꽃만 두고 가셔서 놀랐어요. 항상 직접 전해줬잖아요.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건, 직장을 구하고 계셨기 때문이죠?”

“맞아!”

그 질문을 기다린 사람처럼, 이즐리가 씩 웃으면서 제 발치에 있는 소년을 보여주었다.

“짠, 이게 내 직장이야.”

나는 그제야 그의 옆에 조그마한 남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어디에다 뒀길래 이 애를 눈치채지 못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는 눈에 잘 띄는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금발 머리와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볼살이 빠지지 않은 동그란 얼굴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입고 있는 겉옷은 섬세하게 자수가 들어가 있었고, 얼굴과 짧은 손톱에서 잘 관리한 태가 났다. 온몸으로 ‘나 귀한 집 자제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귀족 혹은 못해도 어느 잘 나가는 상단의 아들이겠지. 이즐리가 어디서 이런 아이를 데려온 걸까. 내 뒤에 있던 유리아를 힐끔거리던 소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거렸다.

“안녕하세요.”

예의가 바른 아이다. 나는 아이가 눈을 맞출 수 있도록 자세를 낮췄다.

“네 안녕하세요. 꼬마 신사분은 이름이 뭐예요?”

“빈센트 윌러예요.”

“전 라일라 핸슨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내가 손을 뻗자, 아이의 조그만 손이 얹혔다. 나는 그 손과 악수하려다가 멈칫했다.

……잠깐, 윌러라고? 윌러는 아리아를 다스리는 영주의 성이었다. 그렇다면이 아이는 영주의 아들인 빈센트 윌러가 되는 셈이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믿을 수가 없어 이름을 되물었지만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영주님의 아들이 맞냐고 묻자 이즐리와 빈센트 둘 다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빈센트에게 다시 한번 정중히 인사를 건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분이 직장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이 애의 가정교사가 됐어. 그러니까 내 직장이지.”

퍽, 빈센트가 주먹으로 이즐리의 다리를 때렸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즐리는 두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 놓았다. 빈센트가 주먹으로 손을 때리자 이젠 볼을 꼬집기 시작한다. 말랑말랑한 뺨이 치즈처럼 쭈욱 늘어났다. 정작 그 행동을 한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였지만, 내가 놀라고 말았다.

“잠깐, 잠깐만요. 영주님의 아들을 그렇게 다뤄도 되는 거예요?”

“응? 아, 괜찮아. 우리 친하거든.”

괜찮지 않은 것 같다. 빈센트의 얼굴에 짜증이 그득그득 묻어나고 있지 않은가.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미 이즐리는 죽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이대로 세워두는 것도 뭐해서 집 안에 들어갈 것을 권했으나, 빈센트는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괜찮아요. 저기 마차에 앉아 있으면 돼요. 선생님, 나 저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대로 저 멀리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귀족의 마차답게 크기가 크고 화려한 편이었다. 가문의 문양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아이는 총총 마차로 뛰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쯤 나는 아이가 이즐리를 부르던 호칭에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선생님이라니!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 아닌가. 빈센트가 이즐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즐리의 새로운 직업을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정도로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즐리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웃는지 궁금한 얼굴이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같이 산책하면서 이야기라도 나눌까요? 어떻게 가정교사가 됐는지 듣고 싶어요.”

“그래!”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은가요?”

“어, 어? 내가 기다린다고?”

이즐리는 그렇게 말하곤 민망한 듯 웃었다.

“아, 빈센트 말하는 거구나. 괜찮아. 어차피 너한테 소개해주려고 나온 거거든.”

나한테 소개해주려고 나왔다니. 설마 아무튼, 저렇게 말하는데 괜찮은 거겠지.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유리아에게 꽃다발을 맡기고 발을 옮겼다. 평소처럼 이즐리는 내 옆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허전함이 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직장을 구하는 일이 오래 걸렸네요. 많이 힘들었나요?”

“아니, 힘들지 않았어. 사실…… 일자리를 구하자고 생각한 뒤로 얼마 안 걸려서 저택에 취직했었어. 근데 취직하자마자 바로 말하는 것보다는 좀 자리를 잡은 뒤에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

“그럼 지금은 잘 적응했다는 말이네요.”

“물론이지.”

“……남의 밑에서 일하는 건데 괜찮은가요?”

“처음에 좀 어색했지만 익숙해졌어.”

“잘됐네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내 억지로 일자리를 구하려고 한 사람이다. 혹여나 그가 직장에서 잘 적응을 하지 못했을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와 도련님의 친근한 관계를 보면, 이즐리가 저택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은 대충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안심이 됐다. 그밖에 나는 친하게 지내는 고용인들이 있는지, 가정교사를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에 관해 질문을 했다. 그러다가 너무 오지랖을 부려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곤 사과를 했다. 다급하게 괜찮다고, 오히려 물어봐줘서 좋다고 말한 이즐리는 신이 나는 얼굴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사실…… 전 이즐리가 검과 관련된 직업을 고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연무장에서 매일 훈련을 하기도 했고, 훌륭한 실력도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이즐리가 경비병이나 호위 기사로 취직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검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글쎄……. 잘 모르겠어. 어머니가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셔서 시작했던 것뿐이거든. 다들 나한테 재능이 있다고 하니까, 그냥…… 그냥 계속했어.”

이즐리는 슬픈 듯이 얼굴을 찡그린다. 아마 공작을 떠올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가끔 「장미 저택의 비밀」의 외전을 읽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머스가 공자들의 과거 이야기가 나와 있는 그 이야기를 읽지 않았었다면, 이즐리를 동정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니까.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걸 느끼자마자 화제를 돌렸다.

“그럼 가정교사를 고른 이유가 뭔가요? 어린아이가 좋아서?”

“돈을 많이 준다고 하더라고.”

“아하…….”

나는 작게 감탄을 했다. 자본주의적 마인드로구나. 돈에 크게 연연해 한다는 이미지가 없었기 때문에 조금 놀라웠다.

“뭔가, 이즐리가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되네요.”

“사실 나도 그래. 처음 빈센트를 가르치게 됐을 때 어색해서 죽을 것 같더라고.”

이즐리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나한테 안 어울리는 직업인가?”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직업이지만, 꽤 잘 어울려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업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이 일이 적성일지도 모르지.

이즐리는 내 말을 듣고 화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나는 문득, 그의 얼굴이 참 잘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는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그 사실이 훅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땅콩이 들어 있는 조그만 초콜릿이었다.

나는 이것을 유리아에게 줄까 고민하다가, 그냥 포장지를 까서 입안에 넣었다.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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