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0
‘안 만난다고 하니까 억지로 만나게 한 거야?’
빈센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진짜…… 짜증나! 제멋대로야. 무슨 행동을 할지 예상할 수가 없어.’
빈센트에게 이즐리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보통 평민은 귀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법이다. 아무리 제 앞에 있는 귀족이 자애롭다고 하더라도 긴장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즐리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빈센트를 대하곤 했다. 머리를 쥐어박질 않나, 볼을 꼬집지를 않나. 자신이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뒷덜미를 잡고 옮기기도 했다.
좋은 사람처럼 실실 웃으면서도 그 속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면이 빈센트의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싫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면들이 가끔은 아주 가끔은 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화가 났다.
“……이즐리 선생이 날 불렀는데, 왜 빈센트 네가 여기 있는 거니?”
그 분노는, 백작과 눈을 마주한 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얼마 만이지. 이렇게 눈이 마주한 채 대화하는 건?’
빈센트가 아버지와 이렇게 직면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랜만에 일이다. 빈센트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과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다. 백작이 자신을 원망할까,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곧 겉으로 드러났다. 빈센트는 식은땀이 흘렸다. 아이는 손이 마구 떨려오는 것을 아빠가 눈치채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무언가 착각이 있던 것 같구나. 난 이만…….”
백작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더니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뒷모습이다. 빈센트가 항상 보아왔던 그 뒷모습이, 원망스러운 그 광경이 다시 나타났다.
그것이 빈센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또 피하는 거야?”
빈센트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해버린 순간, 이즐리의 계획에 빠져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있다 가는 무심코 제 부친에게 왜 피하냐는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빈센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안 돼……. 말하지 마. 아빠가 날 원망한다는 사실을 듣고 싶지 않아.’
그러나 입은 주인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미워서?”
백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 당혹스럽다는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그래서 피하는 거야? 내가 엄마를 죽였으니까?”
“뭐?”
“엄마가 멀리 떠난 이후 아빤 변했어. 날 피하기만 하고, 예전처럼 웃어주지도 않아. 나만 보면 슬픈 표정만 짓잖아……! 그래서 계속 사고를 친 거야. 그러면 아빠가 날 혼내기 위해서 찾아올 테니까……. 조금이라도 나를 봐주니까!”
"…….”
“왜 이젠 그렇게 해도 찾아오지 않아? 엄마를 죽여버린 나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은 거야? 그런 거지? 내가 원망스럽지? 살인마라고 생각하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니?”
백작의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아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백작은 빈센트의 두 손을 붙잡은 채로 애처롭게 물었다.
“엘바가 죽은 게 네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거니?”
“내 탓이니까! 내가 그날 엄마가 우물에 빠졌다는 걸 좀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엄마를 살렸을지도 몰라. 내가 다리를 다치지 않았으면 엄마가 그 우물에 가지 않았을지도 몰라…….”
“빈센트…… 아니야, 아니란다. 그건 그냥 사고였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너 같은 어린아이가 거기서 뭘 할 수 있었겠니? 내가 누군가를 원망하게 된다면 그날 두 사람의 곁에 있어주지 못한 나 자신을, 엘바를 그렇게 데려가버린 하늘을 원망할 뿐이란다.”
"……."
“난 너를, 단 한 번도 널 싫어해 본 적 없단다, 빈센트. 네가 엘바를 죽였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어. 정말이야.”
“거짓말쟁이. 내가 밉잖아……!”
“거짓말이 아니야…….”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눈가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러겠니? 어떤 부모가 자식을 미워하겠어? 어떻게 비겁하게 어른이 아이를 탓하겠니?”
백작이 빈센트를 꽉 그러안았다.
“……나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래.”
그 행동이 방아쇠가 되듯, 빈센트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등을 끌어안았다.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백작의 어깨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럼 왜 피한 거예요?”
“나는, 나는 단지…… 슬펐단다.”
“슬퍼요……?”
“그래…… 빈센트 너만 보면 자꾸 엘바가 떠올랐어. 네 엄마를 닮은 금발머리와 녹색 눈동자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오더구나. 나는 내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네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왔던 거야. 나의 이기심과 바보 같은 행동으로 너를 상처 입히고 말았구나.”
“흐윽…….”
“미안하구나……. 내가 다 잘못했어.”
백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널 사랑한단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해.”
그가 아들을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다시는 널 피하지 않을 거야……. 약속 하마. 제발 날 용서해주지 않겠니?”
빈센트는 흐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할게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정신이 팔려, 복도 끝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자에 숨어 있는 사람은 이즐리였다. 그는 벽에 기댄 채 미소 지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이즐리는 백작이 아들을 마주 볼 계기만 만들어진다면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은 쪽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백작은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때때로 백작이 빈센트를 바라보는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즐리는 이런 만남을 계획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그의 생각은 옳았다. 보아라, 지금 두 사람은 오해를 풀고 서로를 아껴주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가. 그것은 굉장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분명히 보는 사람은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광경일 것이다. 이즐리는 역시 기뻤지만 동시에 무척 괴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미소가 슬픔의 형태로 일그러졌다.
이즐리는 깨달아버린 것이다. 자신과 빈센트가 똑같다고 생각했던 것이 모두 착각이라는 것을. 그래, 달랐다.
똑같을 수가 없다. 그는 모친에게 사랑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부친에게 저리도 사랑받는 빈센트와 같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감히. 이즐리는 빈센트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밉다. 미워서 죽어버릴 것같다.
차라리 무시할걸. 신경을 쓰지 말걸.
두 사람의 사이가 악화하더라도 거들떠보지도 말걸. 그저 내 할 일만 할걸.
그는 빈센트를 질투하고 있었다. 빈센트를 도와줬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즐리에게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아홉 살 때였을까, 열 살 때였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 나이쯤에 이즐리는 친구의 저택에 놀러 갔었다.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친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옷을 입었고 저택의 풍경은 어땠고 날씨는 어땠는지, 전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그 날, 친구와 그의 어머니가 서로를 다정히 대하는 광경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웃고 떠들고, 손을 잡고, 뺨에 입을 맞춘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럽고, 또 부러워서 질투의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즐리는 별 것 아닌 일로 화를 내고, 말싸움을 하고, 끝내는 친구에게 달려들어 마구 주먹질을 했다. 두 사람은 데굴데굴 구르며 다투기 시작했다. 더 심하게 다친 것은, 아프다고 울어야 할 사람은 친구 쪽이었는데 이즐리 쪽이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너는 나보다 가난하잖아! 나보다 못생겼잖아! 나보다 힘도 약하잖아! 머리도 나쁘잖아! 친구가 많지도 않잖아!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잖아! 네가 뭘 했는데?
그런데 너 같은 게 왜 어머니한테 사랑받는 거야?
너는 나보다 모든 게 모자라잖아.
나는 죽도록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넌 그저 태어나기만 했다는 이유로, 그저 자식이라는 이유로 사랑받는다고? 그건 불공평해.
더러운 열등감. 추악한 질투…….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추잡한 감정들.
그것을 입 밖에 내보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날,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마주했던 이즐리는 커다란 중격을 받았다. 이런 상태로는 다시는 누군가와 어울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이리도 추한 인간과 웃고 떠들어줄 수 있을까? 이즐리는 누군가와 가까워질 때마다 이런 지옥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로는 그는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없이 살아갔다. 이즐리는 외톨이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라일라는 그런 인생 속에서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었다.
‘……친구라. 내가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라일라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텐데. 그 아이에게 난 그저 귀찮고 무서운 사람일 뿐이야.’
그때 이즐리는 코앞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던 사이 빈센트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즐리.”
이즐리가 있는 곳은 달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곳이었다. 다른 곳보다 그림자가 짙은 탓에 사람의 윤곽만 희미하게 드러날 뿐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이는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보고 있었지?”
이즐리는 놀란 마음을 삼키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아빠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당신이 저 멀리서 우릴 지켜보는 걸 발견했어.”
“……그렇구나.”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온 지 알아?”
“뭔데?”
“화를 내려고 온 거야! 왜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 누가 이런 짓 해달라고 그랬냐고! 진짜 짜증나…….”
“미안…….”
“그래도…… 오늘은 도움이 됐어.”
빈센트는 부끄러운 듯 중얼거리다가 대뜸 말했다.
“잠깐 몸 좀 낮춰봐.”
“왜?”
“잔말 말고.”
이즐리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더!”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자세를 낮추자 빈센트는 이즐리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즐리는 몸을 흠칫 떨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누가 무섭게 화만 내던 아이가 이런 짓을 할 줄 알았겠는가. 이즐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두 손으로 빈센트를 껴안았다.
‘아이를 안아본 적은 처음이야.’
그가 제일 처음 느낀 감상은 ‘작다’라는 것이었다. 이미 제가 가르치는 도련님이 작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포옹을 하자 그 사실이 더 가까이 와닿았다. 작고 가냘프다. 말랐고, 연약하며, 무력하다. 세게 껴안으면 부서져버릴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로 느낀 감상은 ‘따뜻하다’였다. 따뜻한 물을 잔뜩 넣은 가방을 안은 것처럼 어린아이라는 존재는 물렁거리고 뜨거웠다.
약하고 따뜻하고 말랑말랑해서.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빈센트는 한참 그러고 있더니, 이즐리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고마워. 이즐리.”
라고.
그 말을 들은 이즐리는 울고 싶어졌다.
“……그래.”
자기혐오를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 짐승도 아닌 사람이, 얼마나 멍청하고 어리석고 추악하면 이리도 순진무구한 태도로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아이를 미워할 수 있을까? 이렇게 어리고, 약하고, 따뜻한 아이를 증오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아이의 행복을 있는 그대로 기뻐해줄 수 없는 걸까? 자신을 끔찍하게 여기는 와중에도 여전히 빈센트를 질투하고 있다. 어머니와 저런 관계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이즐리는 정말 울고 싶었다. 그러나 남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눈물을 꾹 참고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즐리는 라일라가 보고 싶어졌다. 그 얼굴을 보면 그 지금 이 상황도, 제가 느낀 추한 감정도 전부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빈센트는 이즐리의 어깨를 쭉 밀었다. 그 약한 힘에 밀려난 이즐리는 손을 뗐다.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곤 쏜살같이 도망쳐버렸다. 복도에는 백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자는 손을 잡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즐리는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