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9 (7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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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

어렸을 적, 빈센트는 어머니, 엘바와 함께 아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에 피크닉을 갔다. 그곳은 유명한 꽃놀이 장소로 봄이 되면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곤 했다. 빈센트 백작은 그때 한창 바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걸 아쉬워하면서도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맛있는 걸 먹거나 근처에 있는 호수에서 배를 타고 놀았다.

엘바와 빈센트는 돌아가는 길에 까맣게 탄 집의 터와 우물을 발견했다.

정확히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커다란 화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때 마침 인근의 주민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두 사람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 길을 잃었습니까?

- 아니요.

- 그럼 다행이군요! 이런 좋지 않은 장소에 계셔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지 뭡니까!

- 좋지 않은 장소요? 그게 무슨 소리죠?

남성은 이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장소는 본래 한 여성이 홀로 살던 집으로, 어느 날 쓰고 있던 난로가 터지는 바람에 불이 났다고 한다. 겨우겨우 집을 빠져나온 여자는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우물까지 기어가다가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 죽은 여자의 영혼이 아직도 이 장소에 머물고 있다고 하지요.

빈센트는 잔뜩 겁을 먹었다. 그 자리를 떠나 꽃놀이 장소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도 그 끔찍한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그만,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빈센트의 무릎은 거친 땅바닥에 쓸려 심한 상처가 났다. 짐승이 손톱으로 긁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상처부위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걱정스레 빈센트를 내려다보던 엘바는 상처를 씻을 물을 가져오겠다면서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엘바는 돌아오지 않았다. 빈센트는 그녀가 호수 쪽에 갔을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빈센트가 타버린 집터를 지나갈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살…… 줘…… 죽고…… 않아…….

살려줘.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물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여성의 괴로운 목소리.

빈센트는 바로 남성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유령……?’

혹시 오래전 여기서 죽어 버렸다는 여자가 아닐까? 그 여자가 혼자 죽어버렸다는 게 원망스러워서 자신도 잡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빈센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이는 공포로 다리를 덜덜 떨다가 그 자리를 재빨리 도망가버렸다. 절뚝거리며 도착한 곳은 호수가 아니라 꽃놀이를 하는 장소였다. 빈센트는 돗자리를 지키고 있던 하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녀는 빈센트와 함께 엘바를 찾다가,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기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저희 마님 좀 찾아주세요. 제발요.

행방불명된 엘바가 발견된 곳은 우물 속이었다. 사인은 익사였다. 아들의 상처를 씻을 물을 뜨려다가 우물 속에 빠져버렸다는, 그리고 구해주는 사람 없이 몇 시간을 버티다가 힘이 빠져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는, 귀족의 죽음이라고 믿을 수는 없는 아주 허무하고 끔찍한 죽음이었다.

과거의 사건을 토로한 빈센트는 괴롭게 내뱉었다.

“내가 그때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그 목소리가 엄마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더라면…… 엄마는 죽지 않았을 거야……! 내가 엄마를 죽였어.”

이즐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아니야. 내 탓이야! 내 탓이란 말이야! 그래서 아빠가 날 보려고 하지 않는 거야. 엄마를 죽인 내가 싫으니까!”

“너희 아버지는 널…….”

원망하지 않을 거야.

이즐리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빈센트의 얼굴을 본 그는 무슨 말을 하든 아이에게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위로를 해줘도 소용없겠지. 저 아이의 아버지가 직접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 

빈센트는 울먹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빤, 내가 사고를 치면 혼내려고 찾아와 줬어. 그런데 요새는 어떤 짓을 하든 날 보러 오지 않아…….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지 다시 나를 봐주는 걸까? 어떻게 해야지 나를 피하지 않을까?”

빈센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하얗게 반짝인다. 그 모습을 본 이즐리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숨이 턱 막혀올 정도로 괴로운 통증이었다.

‘나랑 똑같아.’

부모의 관심을 끌어보려 애를 쓰는 것이.

이즐리는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계속해서 빈센트와 자신을 겹쳐보았고, 그래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그의 상처를 들추는 말을 했던 것은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깊은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즐리는 이제 빈센트에게 ‘네 탓이 아니야’, ‘사고였을 뿐이야’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의미 없는 위로를 건네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네게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면 지금처럼 행동하면 안 돼. 계속 그런 식으로 심한 장난을 치고, 남을 함부로 대하면 잠깐 관심을 끌 수는 있어도 오래갈 수는 없을 거야. 다들 너한테 지치고 말걸. 사고만 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나도 알아……. 그럼 나 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어떻게 해야지 아빠가 다시 날 봐주는데? 나는, 난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 미안하다고 말하면 다시 나한테 웃어줄까? 오히려 나한테 화를 내면 어떡하지? 미워 죽겠다고, 죽어버리라고 하면 어떡해?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버린 이후 아무도 그때의 일을 말하지 않아. 그래서…… 사과를 하는 게 무서워. 다들 묻고 있는 걸 말로 꺼내는 게 무서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도와줄게.”

“뭐?”

“너희 아버지랑 네 사이가 나아지도록 도와주겠다고.”

“자기가 뭘 도와주겠다고…….”

빈센트는 작게 코웃음 치다가 힐끔 이즐리를 바라보았다.

‘위로해주기 위해서 그냥 하는 말인 것 같았는데…….’

이즐리는 빈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아주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도와줄 건데? 뭔가, 방법이 있는 거야?”

“있지.”

이즐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법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를 들은 빈센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동의를 표했다.

“알았어. 한번 해볼게. 솔직히 믿기지는 않지만 당신이 계속 나만 믿어보라고 해서 속는 셈 치는 거야. 그런데, 잠깐만…….”

“응? 왜 그래?”

“아까 어머니라고 했지? 생각해보니까 이상하네. 당신, 고아라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어?”

“자기소개하면서 그렇게 말했던 거 똑똑히 기억해.”

이즐리는 제 실수를 눈치채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맞다. 성이 없다고 속였지.’

빈센트는 막 변명을 시작하려는 이즐리를 가로막았다.

“됐어. 변명할 필요 없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제대로 도와준다면 말이야.”

“……그거 참 고맙네.”

다음 날부터 말썽을 부리던 소년은 얌전한 아이로 변했다. 심한 장난을 치지도 않고, 남을 상처 주는 말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렇게 듣기 싫다고 난리를 피우던 수업을 꼬박꼬박 들었다. 넘어져서 상처가 난 하녀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거나 예법에 맞게 행동하는 모습이 마치 꼬마 신사 같았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동글동글한 얼굴에는 항상 걸려 있던 짓궂은 미소 대신 사랑스러운 웃음이 나타나 있었다. 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즐리가 제시한 방법은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사고를 치지 않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을 만한 모습으로 백작에게 다가가 보라고 했다.

빈센트는 자신을 외면하는 아버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꺼리면서도 용기를 냈다. 직접 책을 가지고 가서 읽어 달라고도 말하고, 함께 차를 마시자고 권했다. 백작과 고용인들은 그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백작은 하인을 통해 빈센트에게 네가 바뀌어서 기쁘다는 이야기나 칭찬을 전하기도 하고 이즐리를 직접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백작과 빈센트의 사이에 무언가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의 아들을 피했다. 책을 읽어 달라는 말에도 곤란하다는 태도를 취했고 함께 차를 마시자고 해도 일이 있다며 방문을 거절했다.

쾅!

“거짓말쟁이…….”

빈센트가 두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충격을 받은 책상이 작게 흔들렸다. 아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이즐리를 바라본다.

“소용없잖아. 칭찬을 해주면 뭐해? 겨우, 겨우 용기를 냈는데 다 소용없어. 당신을 믿지 말걸 그랬어.”

빈센트가 손가락을 뻗어 이즐리를 가리켰다.

“바보 멍청이! 못생긴 호박! 뽀글 머리! 읍, 읍……!”

이즐리는 빈센트의 입에 빵을 물려주었다.

“흐으으…… 소용없어…….”

아이는 빵을 먹으면서 울먹거렸다.

책상에 엎어져 흐느끼는 모습은 타인의 안타까움을 충분했다. 이즐리는 빈센트의 모습에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럼 직접 대화를 나눠볼 수 밖에는 없겠네.”

빈센트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대, 대화라고?”

“그래, 빈센트. 넌 한 번도 너희 아버지에게 널 왜 피하냐고 물어본 적 없지?”

“……그런 걸 어떻게 물어봐? 당연히 싫으니까 피한다고 할 거 아니야.”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아니야.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야. 무서워하지 말고 물어봐. 왜 나를 피하느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좋은 쪽으로 풀릴 때도 있거든.”

그러나 반대로 최악의 결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진실을 마주 보는 것이 언제나 좋은 쪽으로 풀리는 것은 아니니까. 세상에는 알 필요 없는 진실이 존재하고,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는 하얀 거짓말이 있다. 그러나 이즐리는 확신했다. 백작에게 어째서 피하냐고 물어도, 절대 빈센트를 아프게 만들 나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분명히.’

빈센트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왜?”

“자기 일이아니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신을 모를 거야.”

이즐리는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선명한 붉은색. 아이는 가끔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섬뜩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즐리라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동자는 서서히 눈꺼풀에 가려졌다. 이즐리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그래.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진짜 싫다고…… 어?”

빈센트는 깜짝 놀라 이즐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즐리가 자신의 제안을 강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즐리가 갑자기 오늘 하루 저택에서 자고 가겠다는 말을 해서일까? 이미 백작의 허락을 받았다며 웃는 얼굴이 묘하게 불길해서일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날 밤, 이즐리는 빈센트를 불러냈다.

빈센트는 귀찮다고 툴툴대면서도 이즐리가 부른 장소로 나왔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 밤에 보자고 하는 거야? 진짜…… 알 수가 없어.’ 

약속 장소는 1층 복도였다. 정원과 가까운 장소로, 옆면이 뻥 뚫려 있었다. 그래서 고개만 살짝 돌리면 겨울의 정원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밤이 되면 저택은 한적해진다. 지나가는 사람은 없고 발소리가 울린다. 빈센트에게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와 옷이 스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이는 벽면에 기대어 이즐리를 기다렸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다가왔다.

밤의 그림자에 뒤덮여 까맣게 칠해져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빈센트는 그 사람이 이즐리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이즐리,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부른거…….”

빈센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사람을 뒤덮고 있던 그림자가 걷혔다.

달빛을 받아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다. 얼굴이 하얗게 빛을 냈다.

“빈센트?”

이즐리가 아니라 빈센트의 아버지, 윌러 백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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