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8 (7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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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8

    다음 날 아침, 이즐리는 꽃 한 송이를 들고 라일라의 집 앞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릴려고 하다가, 바닥에 꽃다발만 내려놓고 곧장 몸을 돌렸다. 직장이 없는 사람은 싫다고 한 소녀에게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버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즐리는 이미 예법 선생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재의 직장에 완전히 적응하기 전까지는 취직에 성공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라일라를 만나지 말자고 자기 자신과 약속을 한 것이다.

    이즐리는 라일라의 붉은 뺨을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곤 영주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그는 주말을 제외한 일주일에 나흘 정도를 빈센트에게 예법을 가르쳐야 했다. 이즐리는 길을 걸으며 어제 만난 아홉 살 난 꼬마 아이를 떠올렸다. 젖살이 빠지지 않아 동글동글한 얼굴과 작은 손발, 그리고 아담한 몸집. 이즐리가 생각하기에 빈센트는 다른 또래 아이들에 비해서 조그만 편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비교하면 그랬다.

    ‘첫 만남부터 생선을 쏟았었지. 소문대로 엄청난 사고뭉치였어.’ 

    생김새도, 나이도, 태어나 자란 곳도 모두 달랐지만 이즐리는 빈센트를 보고 어렸을 적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 역시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는 만큼 사고도 많이 쳤었기 때문이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즐리는 빈센트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택의 대문 앞에 도착하자 미리 안내를 받은 경비병들은 고개를 숙이고 이즐리를 들여보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론 석고상 하나 없이 심심한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으로 걸어갔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즐리는 한창 복도를 쓸고 닦고 있는 하녀들과 맞닥뜨렸다.

    석류처럼 붉은 눈과 마주한 하녀들은 수줍은 듯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무료하고 짜증 나는 저택의 하루에서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여자 고용인들의 활력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잘생긴 남자라면 더더욱!

    이즐리는 빙그레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하녀들은 “꺅! 잘생겼어!”하는 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도망가버렸다. 이즐리는 그 모습에서 예전 파티나 사냥 대회에서 봤던 영애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간혹 저 하녀들처럼 행동하곤 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반반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상처럼 추켜세워주었고 멋대로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이즐리는 자신의 외모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대충 알았다. 자신이 웃어주기만 하면 사람들의 호감도 쉽게 살 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이즐리는 얼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만나는 고용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현관과 이어져 있는 2층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얼얼한 볼을 만지작거렸다.

    ‘어색하네……. 억지로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거. 남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은 귀찮긴 하지만…… 뭐, 생각만큼 나쁘진 않아. 계속 이렇게 지내다 보면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네. 아니, 익숙해질 거야.’

    2층 계단 끝에 도달한 이즐리는 커다란 액자가 붙어 있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딱 가족 그림이 걸려 있기 좋은 위치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이즐리는 그 흔적을 빤히 바라보다가 우연히 마주친 백작에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별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빈센트의 방까지 걸어갔다. 백작은 아이의 방문 앞에 다다르자 발을 멈췄다. 그리고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뭐지? 자기 아들과 마주치기 싫어하는 것처럼 구네.’

    이즐리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문을 열고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방에 있어야 할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보이지 않았다. 단지 빈센트의 전속 하인만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뿐이다.

    “도련님은 없나요?”

    “아무래도 수업을 받기 싫다고 숨으신 것 같으신 것 같아요. 제가 방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어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한번 찾아보죠.”

    “도련님께서 한번 숨으면 찾기 어려운데……. 저도 찾는 걸 도와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숨바꼭질은 특기거든요.”

    이즐리는 밖으로 나갔다. 어제 저택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그는 고민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즐리는 복도를 걸어 다니며 몸속의 마나를 움직여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여러 곳을 둘러보던 그가 빈센트를 찾은 곳은 창고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작은 방, 그곳에 놓여 있던 상자 안이었다. 꾹 닫혀있던 뚜껑을 억지로 열자 안에 있던 고정쇠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이즐리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뭐야! 어떻게 날……!”

    이즐리가 방긋 웃었다.

    “제가 남을 찾는 걸 좀 잘합니다.”

    그는 빈센트의 뒷덜미를 덜렁 붙들고 방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그러고 보니 저희, 수업 첫날이니까 자기소개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다른 분들께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전 이즐리라고 합니다. 성은 없고 평민이죠. 오늘부터 도련님의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으으!”

    “도련님은 빈센트 윌러라고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제 그 난리를 피우셨는데 모를 리가 없죠.”

    아이는 이즐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마구 버둥거리고, 옷을 붙잡은 손을 때렸다. 이즐리는 아프지도 않은지 빙그레 웃으면서 빈센트의 볼을 꼬집을 뿐이다. 자신의 행동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 빈센트는 버럭 소리쳤다.

    “누구 볼을 꼬집는 거야? 지금 네가 이러는 거 아빠한테 전부 다 일러바치겠어! 그럼 넌 아리아에 발도 못 들일걸?!”

    “소용없을 텐데? 그쪽 아버지가 도련님의 못된 버릇만 고쳐주면 어떻게 다루든 상관없다고 말했거든요.”

    실제로 백작은 어제 이즐리에게 아들을 변화시켜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했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빈센트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방에 도착한 빈센트는 소파에 앉혀진 채 강제로 수학 공부를 해야 했다. 물론 가만히 공부만 한 것은 아니다. 도망가려고도 해보고, 못된 장난을 치려고 하기도 했지만, 이즐리의 매서운 눈초리에 들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꿀밤을 얻어맞은 아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책을 들춰보았다. 이즐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삐뚜름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참 신기해. 어쩌다 내가 남을 가르치게 됐는지.’

    처음에 이즐리는 가정교사로 취직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적당히 돈을 많이 주고, 겉보기에도 괜찮은 직장을 구할 생각이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고민하던 그는 사람들이 영주가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곳에 비해 주급을 두 배나 준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에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 집 아들이 심각한 말썽꾸러기라는 것은 이즐리에게는 별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단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제국에서 조작한 서류를 가지고 윌러 저택으로 향했다.

    ‘일단 취직했으니 잘해봐야지. 그래야 똑바로 라일라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야. 벌써부터 보고 싶다……. 그냥 보러 갈까?’

    그러다 이즐리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야. 좀 더 버텨보자.’

    그렇게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났다. 그동안 이즐리는 점점 저택에 익숙해졌다. 고용인들과 그럭저럭 친해졌고 빈센트와의 사이도 많이 가까워졌다. 별것 아닌 일로 아웅다웅하기도 하고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도 했다. 서로 반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젠 흔한 일이다. 친해졌다고 빈센트가 도망을 시도하거나 장난을 치려는 빈도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빈센트는 질리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사고를 쳤고 그건 이즐리를 짜증 나고 귀찮게 만들었다.

    ‘나도 어릴 때 사고 많이 쳤었지. 그때 날 돌보던 고용인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즐리는 그런 빈센트를 보면서 많이 반성을 했다.

    저택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는 여러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윌러 백작 부인이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부터 빈센트가 심한 장난들을 치기 시작했고, 백작은 일과 영지 경영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백작이 자신의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이즐리를 고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아이와 얼굴을 마주 보는 행위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빈센트를 피하곤 했다. 빈센트가 백작을 찾아가는 일은 있어도 그 반대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빈센트는 가끔 우울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백작이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조합한 이즐리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어느 화창한 날, 디저트로는 부드러운 카스텔라와 함께 우유가 나온 날, 한 고용인이 도련님의 짓궂은 장난으로 걸레 빤 물에 엎어진 날, 이즐리는 대화 예법을 공부하고 있던 빈센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아버지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렇게 말썽을 부렸던 거지?”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서 자신과 형제들을 상처 입히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죽도록 노력해온 그이기에 알 수 있었다. 빈센트가 아버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고를 쳐왔다는 것을 말이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빈센트는 바늘에 찔린 사람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당황한 얼굴을 감추고 싶은 건지 깊숙이 고개를 숙인다. 작은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마구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맞잖아?”

    이즐리가 가볍게 부정하자 빈센트가 아까보다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니야.”

    “맞아.”

    “아니야!”

    아이는 고개를 들고 이즐리 쪽을 돌아보았다. 하얀 얼굴이 선혈처럼 빨갛게 변해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기는. 내 말이 맞잖아? 나는 알 수 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확신할 수 있어.”

    “네가 뭐라고 그렇게 말하는 건데?!”

    “나도 그랬던 적이 있거든.”

    “……뭐?”

    “나를 봐주지 않는 어머니의 관심을 끌어 보고 싶어서 사고를 치기도 하고, 반대로 얌전하고 어른스러운 어린아이인 척 해봤지. 남을 상처 입히는 일도 서슴없이 저질렀어. 그래서 알 수 있는 거야. 빈센트 네가 아버지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걸.”

    이즐리의 말에는 외면당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진정성이 있었다. 빈센트는 그 말에서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진심과 아픔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빈센트는 책상 위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사고를 치고 싶어서 친 건 아니야. 어른들에게 혼나는 걸 누가 좋아하겠어? 나는 단지, 그렇게 해서라도 아빠가 날 돌아봐주길 바랐어. 왜냐면 아빠는 나를…….”

    “피하니까?”

    “……그래.”

    빈센트가 코웃음을 쳤다.

    “인정하니까 이제 속이 시원해? 만족스러워?”

    “아니. 전혀.”

    “뭐야…… 그럼 왜 물어본 거야. 진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동안 방안에 머물고 있던 그 침묵을 깬 것은 빈센트의 목소리였다.

    “당신 말이 전부 맞아. 아빠 말이야……. 항상 나만 보면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피해.”

    아이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미운 거야. 왜냐면…… 내가 엄마를 죽였거든.”

    “……뭐?”

    이즐리의 눈이 혼란스레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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