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7 (7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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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7

    아리아의 영주, 윌러 백작에게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인 빈센트 윌러였다. 빈센트는 아무도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였다. 공부를 하는 것을 싫어해서 수업 시간마다 도망을 치기 일쑤였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해 고용인들을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물통을 엎어서 옷을 젖게 만들고,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하고, 뱀 인형을 던져 골리는 일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일어났다. 자애로운 영주, 친근한 귀족이라 불리며 칭송받는 윌러 백작의 아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백작은 아들의 못된 성정을 고쳐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격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을 예법 선생을 불렀지만 모두 빈센트의 행태에 지쳐 교육을 포기했다. 왕국 전역에 그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선생으로 지원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돈도 다른 곳에 비해 두 배나 높게 불렀는데도 불구하고!

    “애 엄마가 살아 있었으면 저 꼴을 두고 보지는 않았을 텐데……. 에휴.”

    백작은 자식과 죽은 아내가 겹쳐 보인다는 이유로 아들을 대면하기 힘들어했고, 심성이 여린 탓에 호되게 혼내지도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들이 저지른 사고를 전해 들으며 매일매일 한숨을 쉴 뿐이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달랐다.

    “백작님, 도련님의 예법 선생으로 지원하신다는 분이 계십니다.”

    보좌관이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해줬기 때문이다.

    백작은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네.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지……?”

    “그, 지원자 분이 평민인 데다 성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성이 없다는 말은 고아라는 소리였다.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것은 면접에서는 결점으로 여겨졌다. 출생 성분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불안한 사람을 어디에 쓰겠는가?

    ‘어디보자……. 18살 남자? 제국 출신인데 여기까지 온 건가?’

    백작은 보좌관이 건네준 문서를 대강 훑어보곤 말했다. 그는 서류를 보좌관에게 던지듯 건넨 후 버럭 외쳤다.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저 버릇없는 아들놈의 선생이 되어주겠다고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네!”

    “그분께선 예법을 배워본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도 없다고 하시는데요? 그래도 꽤 훌륭한 선생에게 배운 것 같습니다.”

    “됐네, 됐어. 사족은 더 이상 필요 없네. 중요한 건 출신이 아니라 실력이 아닌가? 일단 만나보고 판단하겠어.”

    “네 알겠습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그렇게 말한 백작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일순간 뻣뻣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정말 평민이란 말인가? 남자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앉아있는 자세, 찻잔을 잡은 손 모양, 홍차를 마시는 모습, 그가 행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예법 책에 나와 있는 내용과 완전히 똑같았다.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묘한 위압감이 풍겨왔다. 그는 한눈에 봐도 훤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나,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날이 서 있다는 표현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번듯한 이목구비 구석구석 한겨울에 맞는 바람처럼 싸늘한 기운이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분명히 갖춰 입은 옷은 평민들이 흔히 입을 법한 싸고 질 떨어지는 정장이었지만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기품 탓에 비싼 맞춤 정장처럼 보였다. 남자와 시선을 마주한 백작은 바늘로 쿡 찔린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그래서 인사를 받기도 전에 보좌관과 함께 도망가듯 밖으로 나가고 만 것이다.

    문을 등진 백작은 보좌관에게 속삭였다.

    “정말 저 남자가 평민이 맞는 건가? 귀족이 아니라?”

    “저도 저분을 처음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평민이 맞습니다. 여기 서류와 함께 제출한 신분증을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영주님,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아니 그래도 저건 너무……. 아무튼, 알았네. 자네 말이 옳아. 다시 들어가 보도록 하지.”

    두 사람은 다시 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작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백작은 맞은편에 앉아 남자의 모습을 힐끔힐끔 보았다.

    ‘붉은 눈이라…… 저렇게 선명한 적색의 홍채는 흔하지 않을 텐데. 빈센 제국의 에머스 공작이 저런 눈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었지. 혹시 이 사내, 에머스 공작의…….’

    백작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그 공작의 아들이 무엇을 하러 아리아까지 왔을까? 제국에 비하면 작고 별 볼 일 없는 이 땅에 올 리가 없다. 게다가 그 도련님이 예법 선생을 하겠다고 면접을?

    말도 안 되는 소리!

    ‘붉은 눈이 특이하기는 하나,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야. 우연히 저런 눈을 가지고 태어난 거겠지.’

    백작은 한 번도 에머스 공작을 본 적은 없었다. 이 작은 왕국의 사람들이 제국에 방문해본 적은 황제의 32번째 성탄제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게다가 황제의 선물을 가지고 나선 사절단에 백작은 속해 있지 않았다. 만약 그곳에 백작의 자리가 있었더라면 눈앞의 남자가 그녀와 똑같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백작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큼큼, 그래 당신이, 아니 자네가 우리 빈센트의 예법 선생으로 지원한 사람인가? 과연, 그 자리에 지원할 만큼이나 훌륭한 자세를 갖추고 있군.”

    “감사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는가?”

    그의 뒤에 서 있던 보좌관이 정정했다.

    “이름입니다.”

    “나도 알고 있다네.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이즐리 에……”

    “……에?”

    “실수.”

    남자는 고개를 저은 후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이즐리입니다. 성은 없고요.

    얼굴 만면에 환한 미소가 드리우자 남자의 인상이 한순간에 확 바뀌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한기는 사라지고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가 풍겼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끈이 헐렁하게 풀린 느낌이다. 그제야 백작은 마음 편안히 이즐리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렇군……. 이즐리로군.”

    이즐리는 의아한 듯 물었다.

    “전부 제가 준 서류에 나와 있지 않나요?”

    “아아, 그냥 한 번 더 물어본 거네. 이름 같은 건 직접 대면해서 듣는 편이 좋지 않은가?”

    “그건 그렇죠.”

    백작은 예법을 한번 테스트를 해봐도 좋겠냐고 물었고 남자는 흔쾌히 허락했다. 이즐리는 두 사람에게 완벽한 예법을 선보였다. 얼마나 놀라운 실력이던지, 보좌관은 물론이고 백작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이즐리가 식사 예법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이는 모습을 본 백작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이즐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실력도 뛰어나고 예의도 바른 데다가 사람이 참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과 잘생긴 얼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품은 타인의 호감을 이끌어내기 좋은 요소였다.

    백작은 이즐리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정원을 함께 걷자는 제안을 했다. 이즐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자, 두 사람은 식당 밖을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남은 서류를 처리해야 하는 보좌관은 그 자리에서 빠졌다.

    겨울을 맞이한 정원은 낮은 채도의 녹색과 갈색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꽃들은 시들고, 몇몇 나무는 잎을 잃고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계절 내내 장미가 화려하게 피어 있던 저택에서 살던 이즐리에겐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는 정원을 쭉 둘러보다가, 이내 관심이 사라진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즐리와 백작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백작은 제 옆에 있는 상대가 머리 하나 정도 크다는 사실을 깨닫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키가 무척 크군! 어느 정도 되는가?”

    “아마, 180 센티미터 후반이나 190정도 될 겁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네요.”

    “오호, 굉장하군……. 제국 사람들은 다들 자네 정도로 큰가?”

    “그렇게 크지는 않고, 주로 180 정도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쪽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평균 신장이 크다는 소리를 자주 듣곤 했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오늘 알게 됐군.”

    백작은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해 보이는 팔을 훑어보았다.

    “체격도 좋기도 하지. 기사가 되어도 손색이 없겠어.”

    “감사합니다.”

    “주변에서 다들 몸 쓰는 일을 하라고 했을 것 같은데 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가?”

    이즐리는 답변을 하는 대신 작게 웃었다. 백작은 그것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그래, 그래 알겠다. 학자 스타일인가 보군. 그런 일은 내키지 않았던 거지? 제국 출신이라고 하던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가?”

    “그건…….”

    그때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요! 그러시면 안 된다고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이즐리와 백작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부스스한 금발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띤 채 두 사람 쪽으로 마구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로 하녀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쫓아오고 있었다. 아이가 품에 안은 철통 안에서는 살아 있는 생선이 파닥거리고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소년은 그렇게 소리치며 두 사람에게 생선을 쏟아냈고, 백작은 체면도 생각하지 못하고 꽥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즐리는 백작을 안고 비린내의 폭포를 간단하게 피했다. 팔딱거리는 생선들은 두 사람에게 닿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이즐리는 자리에서 도망치려고 하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는 아이의 뒷덜미를 붙잡고 덜렁 들어 올렸다. 소년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발을 버둥거렸다.

    이즐리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건.”

    이즐리의 품에서 벗어난 백작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 아인, 내 아들인 빈센트라고 하네…….”

    그는 슬픈 얼굴로 빈센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 아이가 그쪽…… 영주님의 자제분이라고요?”

    “그래! 내가 빈센트 윌러다! 당장 이 손 놔, 멍청아!”

    아아…….

    “내가 예법 선생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잖아! 얘 쫓아내 버려!”

    백작이 식은땀을 흘렸다.

    ‘또 어디서 이 소식을 알고 온 건지…….’

    빈센트는 고용된 가정교사를 질리게 만들어서 쫓아내기도 했지만, 포기하고 돌아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지원자가 나타날 때면 다들 입단속을 단단히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빈센트가 매번 어떻게든 이 소식을 알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오늘도 저번처럼 지원자의 엉덩이를 뻥 차 버리기 위해 쏜살같이 달려온 모양이었다.

    빈센트는 이즐리를 향해 바보니, 멍청이니, 똥개니, 눈 빨간 토끼니, 당장 꺼져버리라니…… 별별 모욕적인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백작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빈센트! 그만하거라! 제발……! 그런 말을 하면 어 떡하니?”

    애절한 부탁이나 호통은 빈센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백작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러다가 이즐리 선생도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가면 어떡하지?’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즐리를 바라보았다.

    이즐리는 도망치는 대신 무표정하게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무시무시한 얼굴에 차가운 눈빛이 더해지자 보는 사람은 숨이 턱 하고 막혀올 수밖에 없었다. 빈센트는 겁먹은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흥……! 그, 그렇게 쳐다본다고 내가 겁먹을 줄 알아?”

    “그러니까…… 도련님?”

    이즐리는 섬뜩한 미소를 지은 채 작게 속삭였다.

    “시끄러워요.”

    아이들은 참 눈치가 빠르다. 어떤 상대에게 까불어도 될지, 안 될지를 무서울 정도로 빨리 알아차린다. 빈센트는 지금의 이즐리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하녀와 백작의 입을 떡 벌어졌다.

    아니, 그 ‘빈센트’가 꼬리를 말았다고?

    기적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아무도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를 말 한마디로 멈춘 것이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들었는데 더더욱 놓칠 수 없어졌군!’

    백작이 재빨리 이즐리의 왼쪽 손을 맞잡았다.

    “당장 고용하겠네! 내일부터 나와주게!”

    “어? 정말인가요? 그럼 저야 좋죠.”

    이즐리가 화사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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