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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7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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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저, 라일라. 미안해. 화났어……?”

이즐리는 내 눈치를 보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게에서 나온 이후로 말을 하지 않자 화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즐리.”

나는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전 화나지 않았어요. 좀 당황했을 뿐이에요.”

이즐리의 표정은 밝아지려다가 뒤이어진 말에 다시 어두워졌다.

“왜 그런 질문을 했나요? 미카엘라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에이런시아의 제자였던 사람이 여기에 왔다면 분명 그 나름대로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잖아요. 도련님처럼요. 평민으로서 살아가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조금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응…….”

귀족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것은 이제 그의 심기를 맞춰주려 노력하는 사람이 없다는 소리다. 아무도 그가 저지르는 무례를 넘어가 주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즐리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저도 죄송해요. 괜히 참견하고 가르치려 들어서요.”

내가 너무나 우습다. 무슨 자격으로 그를 가르치려 드는 걸까?

“아니야. 그렇게 해줘.”

이즐리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아직…… 이 삶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잖아. 네가 가르쳐주면 더 빨리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어쩌면 그가 평민으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즐리는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편이었다. 커다란 분란을 일으킨 적도 없고, 주변 사람들을 우습게 보며 큰 무례를 저지른 적도 없었다.

그래……. 내 생각보다 그는 아리아와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응."

“알았어요.”

이즐리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앞선 대화 덕분에 분위기는 많이 풀린 상태였다.

그래서 이즐리는 다시 편안한 모습으로 내게 말을 걸어올 수 있었다.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 거야?”

“아…… 집이요. 거기 볼펜을 두고 왔거든요. 오늘은 볼펜을 팔러 갈 거예요. 다른 가게에서 물건을 위탁해서 판매하려 해요.”

“판매라고 하니까 이제야 진짜 사업이 시작된 것 같네.”

“……그건 그러네요.”

이제야 정말 뭔가가 시작되는 것 같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볼펜을 담아 놓은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이즐리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들게.”

“괜찮아요. 그렇게 무겁지 않거든요.”

“들게 해 줘.”

이번에는 저번처럼 괜찮다는 말에 넘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하나도 무겁지 않다고 하는데 왜 자꾸 들고 싶어 하는 건지. 아마, 이게 그 나름대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인 거겠지.

전생의 남자 친구도 가방을 들어주려고 억지를 부렸던 기억이 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가방을 건넸다.

“그럼, 부탁해요.”

이즐리는 환하게 웃으며 나와 손이 닿지 않도록 가방을 받아들였다.

집 근처 번화가에는 딥펜과 만년필, 잉크를 판매하는 가게 ‘솔리키아’가 있었다. 막 이사를 와서 필기구가 필요했을 때 몇 번 들렀던 적이 있었다.

딥펜은 만년필과 다르게 잉크를 충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잉크를 찍어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만년필보다 가격이 싸서 평민들이 부담 없이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오늘 그 솔리키아에 볼펜을 판매할 예정이다. 나는 가게의 문을 열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즐리도 고개를 꾸벅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솔리키아의 사장님은 나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게, 라일라. 저번에 산 만년필이 고장 난 게니?”

“아니요. 오늘은 뭘 사려고 온 게 아니에요.”

“그럼?”

“사장님과 거래를 하고 싶어서 왔어요.”

사장님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말하자 그는 우리를 사무실로 인도했다.

노인은 내게는 코코아를, 이즐리에게는 커피를 내주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를 별거 아닌 얘기라고 생각하는지 여전히 장난스러운 태도였다.

그가 이즐리를 향해 이런 말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이 아이가 바로 그 소문의 왕자님인가 보군? 과연…… 그렇게 불릴 만해.”

사장님은 이즐리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왕년에는 이렇게 생겼었는데……. 그립 구만.”

셸리가 그를 왕자라고 부른 이후부터 아이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왕자가 되었다. 참고로 미카엘라는 요정이다. 그 별명은 여기저기에 퍼져 동네나 번화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나는 이즐리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솔직히 왕자랑은 안 어울리지 않나? 일반적으로 왕자는 금발에 푸른 눈이지 않은가. 왕자라 기보단 기사 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즐리는 자신의 별명에 별다른 생각이 없는지 그저 제 앞에 놓인 커피를 내려다볼 뿐이다.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여기 각설탕 없습니까?”

사장님은 풍성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여긴 각설탕이 없다네. 내가 커피에 단 걸 넣어서 먹는 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자네도 나처럼 설탕 없이 커피의 풍미를 그대로 즐겨보는 게 어떤가?”

“윽…….”

이즐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이 사람…… 쓴 걸 못 마시지? 생전 이즐리가 커피를 마시는 꼴은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마시는 건 항상 달달한 음료나 물 뿐이었다. 어쩔 수 없네. 나는 내 앞으로 커피를 가져온 후 이즐리에게 코코아를 건넸다.

그리고 사장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보여드릴 건 이거예요. 아, 고마워요.”

이즐리가 눈치 빠르게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볼펜이라는 거예요.”

볼펜에 대해 설명하자 사장님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볼펜을 살펴보았다. 이 물건을 해당 가게에서 판매하고 싶다고 말하자, 사장님은 흔쾌히 허락했다.

계약서를 작성한 후 추후에 판매할 물건을 가지고 찾아오겠다고 말하곤 가게를 나섰다. 그렇게 거래는 좋은 결과로 끝이 났다. 나는 미리 알아뒀던 다른 가게들도 찾아가서 계약을 요청했다. 소수의 가게를 제외한 모든 곳이 자신의 상점에서 볼펜을 판매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거리로 나설 수 있었다.

이즐리는 내 옆을 거닐며 말했다.

“볼펜을 옮겨야 할 때가 되면 도와줘도 괜찮을까?”

“고맙지만, 괜찮아요. 그렇게 까진 안 해주셔도 돼요.”

언제까지 이즐리의 친절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사람을 고용해서 물건을 옮기고, 호위를 고용해 공장을 오고 가는 편이 좋겠지. 나는 아쉬워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난 것을 말했다.

“그러고 보면…… 이즐리는 항상 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 공장에 가야 할 일이 있으면 계속 동행해주고…… 여유로운 것 같아서요. 어떤 이즐리는 일 같은 건 안 하는 건가요?”

“일이라면…… 네 호위 기사로 동행하는 일 정도……?”

“호위 기사요?”

농담하는 건가? 아니,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즐리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일을 제외하곤 별다른 일이 없는 것처럼 굴곤 했다. 몸을 풀기 위해 운동을 한다는 이야기 말고는 어떤 일을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 감정을 숨기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즐리에게 말했다.

“그런 거 말고 진짜 직장이요. 돈을 버는 일을 말하는 거예요.”

이즐리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그럼…… 없어.”

“지금까지 돈은 어떻게 하고 있었나요?”

“그냥 내 몫의 품위 유지비로 해결하고 있는데……. 안 쓰고 놔뒀던 돈을 들고 왔어.”

“그, 그 돈이 떨어지면 앞으로 어떻게 하시려고요?”

“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라고요?”

이즐리가 해맑게 웃었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인간 지금 제정신인 건가? 세상 물정을 왜 이렇게 모르는 거지? 돈만 덜렁 들고 아무 생각도 없이 여기까지 온 거야? 정말로?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모두 나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백치미 넘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의 집이 어떤 꼴이고, 어떻게 식사를 하고 살아가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걸 물어보는 건 너무 나간 거겠지. 분명 이즐리는 내가 집이나 생활에 관한 것을 물어봐도 지금처럼 별다른 불쾌감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쪽에서 물어보기 그랬다. 너무,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지 않은가? 나의 행동이 이즐리에게 괜한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닐까? 사실 지금도 그와 제대로 된 거리감으로 지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일단, 일단은 직장에 관련된 이야기만 하자.

나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남은 돈은 얼마나 있으신데요?”

이즐리의 말을 들어보니 일반 가정에서 네 가족이 1년 정도는 풍족하게 살 수 있을 정도는 들고 온 것 같았다.

그러나 본래의 소비 습관을 생각해보면 몇 달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수입 없이 계속 돈만 쓰다 보면, 언젠가 이 생활도 끝나고 말 거예요. 돈이 없어지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건 그때 가서…….”

“그때 가서 생각한다고 하시지 말고요.”

돈이 떨어진 이후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태도다. 특단의 조치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전 돈 없는 사람은 싫어요.”

“어?”

“전 직장이 없는 사람도 싫어요.”

그 말에 이즐리가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싫다고?”

“네. 정말 싫어요.”

이렇게 충격을 주면 이즐리는 빨리 일자리를 구하려고 할 것이다. 왜냐면…… 내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 나는 오지랖을 부리고 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이뤄내려고 하고 있다. 이렇게 충격을 줘서 그를 도울 필요는 없었다. 직장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면, 돈을 다 써 버려서 생활이 힘들어지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시기가 빨라질 것이다. 그것 이바로 이즐리를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러는 걸까. 그래, 이건 아마도 이즐리 때문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이 구는 그를 보면 도움을 주지 않고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구할게. 내일부터 당장 구할게! 계속 일을 하고 싶었어! 사람은 일을 하고 살아야지!”

이즐리는 다급하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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