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5 (7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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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5

    이즐리와 라일라가 사라진 가게는 얼어붙어 있었다. 엠마와 유리아는 식기를 만지작거리며 미카엘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쩌지? 사정이 있던 것 같은데, 이즐리 도련님이 그걸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렸어. 미카엘라의 기분이 상한 건 아닐까?’

    유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미카엘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식사를 하며 중얼거렸다.

    “대답…… 안 듣고 가는 건가?”

    그 중얼거림은 너무나 작아서 그곳에 있던 사람 중 아무도 미카엘라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두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말했다.

    “……식사를 했으면 디저트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가서 카페나 갈래? 아직 점심시간이니까 괜찮지?”

    “아? 네, 물론이죠. 미카엘라 씨.”

    “오늘은 제가 사는 걸로 할게요. 괜찮죠……?”

    그제야 가게 안의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카페에서 잠깐의 휴식을 즐긴 뒤 다시 가게에 돌아왔다. 카페에서 나눈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나 유행이 지난 농담은 너무나 즐거웠다. 얼마나 즐거웠던지 가게에서 일어났던 숨 막히던 침묵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유리아도 그때의 일을 잊을 수 있었다.

    “첫째 사장님. 그 남자, 에머스 가의 둘째 공자 맞지?”

    2층에 올라오자마자 소파에 늘어진 미카엘라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지 않았었다면 말이다.

    “이즐리 에머스잖아.”

    그는 수업 때 사용하던 노트를 얼굴 위에 얹은 채 말했다.

    ‘이즐리 에머스’라는 이름을 듣자 유리아는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되도록 이즐리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다. 평화로운 이곳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본인도 밝히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에머스가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반사적으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이즐리가 에머스 공작가의 자제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를 경악 어린 표정을 상상하며, 유리아는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린다.

    ‘그때 정말 놀랐었지. 나도 아마 방금 상상했던 것처럼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그날, 유리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과 불안이 범람하고 있었다. 도련님은 왜 갑자기 이곳에 찾아온 것인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설마 라일라 때문인가? 그녀는 이미 공자들이 제 동생에게 관심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택에 어떤 일이 생기면 소문이 퍼지게 되고, 그들 스스로가 관심이 있다고 티를 내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떠나기 전, 라일라가 그 관심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결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자는 약속했더라도 뭐든지 다 털어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실제로, 유리아 또한 니고르 백작의 혀를 뭉개버렸다는 것을 밝히지 않지 않았나?

    라일라가 괜찮다고 안심을 시켜줬을 때에야 유리아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면 뭐든 괜찮아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라일라는 틀리는 법이 없었으니까. 라일라와 이즐리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가게 안에서도 사람을 기다릴 적, 유리아는 자신이 이즐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 라일라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자고 생각했다. 라일라가 이즐리를 거부한다면 자신도 그를 냉정하게 내칠 것이고 그 반대라면 받아들여주자고.

    라일라는 이즐리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유리아도 그를 받아들였다.

    회상을 끝마친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미 미카엘라는 도련님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당연한 일이겠지. 봤을 테니까. 그렇다면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거야.’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처음 봤을 때 알아봤어. 그 정도 되는 사람이 평민인 척하면서 사장님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지. 사장님들은 이미 그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

    “그것도 맞아요.”

    “그분이 정체를 숨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모른 척했어. 그쪽도 똑같은 생각으로 나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 도련님이 아예 날 기억하지 못했다는 건 몰랐지만…….”

    유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도련님은 미카엘라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 라일라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으니까.’

    “이제 그분은, 아니…… 이즐리는 도련님이 아니에요. 귀족 신분을 포기하고 여기 오신 거거든요. 이젠 평민이에요.”

    “그래? 하지만…… 핏줄이 끊으려고 한다고 끊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아직 에머스 공작가는 건재해. 지금은 평민인 척 산다고 해도,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공작가의 사람으로 살 수 있어.”

    “이즐리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유리아는 그냥, 그런 확신이 들었다.

    미카엘라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그 도련님은 왜 그대로 가버린 걸까? 덕분에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까, 고민하던 시간이 의미 없게 되어 버렸잖아.”

    유리아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그 말은…….'

    “……누군가 물어보기를 원했어요? 왜 여기로 왔는지?”

    물어보기를 원한 사람 같지 않은가.

    "응."

    미카엘라는 순순히 진실을 고한다.

    문득 유리아는 책에 덮여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숨기고 싶던 거 아닌가요? 미카엘라는 한 번도, 진심으로 자신이 에이런시아의 제자라는 걸 밝히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자세한 사정을 묻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어요.”

    “그랬었지. 그래도 그냥,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리아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라도 괜찮다면 물어봐드릴까요?”

    “그럼 나야 고맙지.”

    “왜 여기에 오게 된건가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래, 에이런시아를 만났을 때부터 말하는 편이 좋겠네.”

    미카엘라가 기다란 다리를 까딱거렸다.

    “에이런시아와 처음 만난 건 고아원에서였어. 제국 제일가는 부자가 된 그녀는 자신처럼 어렵게 살아온 아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지. 내가 살고 있던 고아원도 그중 하나였어. 그때의 나는 옷을 만드는 걸 좋아했어. 천을 자르고 꿰매서 인형들에게 예쁜 옷을 만들어주곤 했지.”

    그는 꿈꾸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마…… 그게 에이런시아의 관심을 끌었나 봐. 그녀는 내 곁으로 와서 인형 옷을 만드는 걸 구경했어. 옷이 완성되는 걸 보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나를 천재라고 말해줬어. 그리고, 그리고 태양보다도 눈부시게 웃으면서 언젠가 자신의 공방으로 찾아오라고 했어. 그때를 기대하겠다고. 그래서 난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코피를 쏟을 정도로 노력해서 에이런시아의 공방에 취직했어. 결국엔 그녀의 수제자 자리까지 올라갔지.”

    “굉장하네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천재를 만났어. 정말, 천재였지. 에이런시아도 깜짝 놀랄 정도였어. 그 아이가 처음으로 만든 옷을 본 순간 깨달았어. 괴물이다. 이런 괴물에 비하면 나는…… 나 같은 건 천재가 아니었구나. 그날 에이런시아가 한 말은 단지 불쌍한 고아의 꿈을 북돋아주기 위해 그런 말을 건넨 것뿐이었구나…… 라고.”

    미카엘라의 목소리가 겁먹은 사람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그림도 제대로 그릴 수 없었어. 옷을 만드는 일이…… 더 이상 즐겁게 느껴지지 않았어. 그래서 찾지 말라는 메모 한 장만 남긴 채 여기로 도망 온 거지. 단지 무섭다는 이유로.”

    "……."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게 무서웠어. 내 한계를 알게 되는 게 싫었어. 진짜 천재에게 내가 이뤄낸 모든 걸 빼앗길까 봐 두려웠어. 에이런시아가 나한테 실망하는 게 겁이 났어. 나는 도망쳤어. 나를 모를 만한 곳까지 도망치고 도망쳐서…… 이곳에 다다른 거야. 한심하지?”

    “한심하지 않아요.”

    유리아의 말에 미카엘라가 움찔거렸다.

    “도망쳐도 괜찮아요.”

    유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왜 도망치는 게 한심한 행동이라 말인가? 유리아는 몇 번이나 도망쳤다.

    라일라를 버리고 도망쳤고, 니고르 백작이 무서워서 도망쳤다.

    “도망치는 건 절대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에요. 정말 부끄러운 건 포기하는 거예요. 포기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건 마음 한편으로는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던 것 아닌가요?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도, 절망하고 괴로워했어도 계속해서 일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

    “……미카엘라는 아직 옷을 만드는 걸 사랑하죠? 그래서 저희 가게에 온 거 아닌가요? 돈은 필요 없고 식사랑 잘 곳만 마련해주면 상관없으니까…… 이곳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했었잖아요.” 

    "……."

    “다시 공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죠? 그래서 항상 자신을 에이런시아의 제자라고 말한 거죠? 그곳에서 지냈을 때가 그립고, 제자였을 때로 돌아가고 싶어서.”

    “응…….”

    “그 마음이 남아 있으면 언젠가 다시 공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용기를 가지게 해 주니까요.”

    유리아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라일라를 사랑해서, 라일라를 위해서 자신을 좀먹던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다. 심지어 남을 망가뜨리는 행위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녀는 라일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건 라일라도 마찬가지일 거야. 가족이기 때문에,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어.’

    미카엘라가 작게 말했다.

    “……그래. 그럴지도.”

    그는 얼굴을 덮고 있는 책을 내리곤 말했다.

    “남한테 말하니까 좀 후련해지네. 나도 뭐 하나 물어도 될까?”

    “네? 어떤 건가요?”

    “사장님들은…… 어떻게 에머스가의 도련님을 알고 있는 거지? 그 어린 나이에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많은 돈을 가지게 됐는지 궁금해. 상속으로 얻은 것 같지는 않아서. 내가 보기에도 사람은 그냥 평범한 평민 같거든.”

    “그건…… 너무 길고 복잡한 이야기라서 어려울 것 같네요.”

    유리아는 말을 흐렸다.

    “그 이야기를 하기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해요. 하지만 살던 곳을 떠날 때 그 용기를 전부 사용해버려서 지금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

    “그래도 언젠가…… 남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그때가 되면 미카엘라에게 가장 먼저 말할게요.”

    “영광이네.”

    유리아는 웃었다. 아름답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본 누군가가 그녀를 마음에 담을지라도, 절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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