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4 (7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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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4

    일련의 사건 이후, 이즐리가 나를 따라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공장에 갈 때는 빠짐없이 나를 따라왔다.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신을 호위 기사로 쓰라며 가슴을 두드리던 이즐리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고맙다는 마음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길까 온갖 호들갑을 떠는 남자를 보면서 ‘아, 이 사람 참 귀찮네’라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유리아와 나의 가게에서 의상을 둘러보는 이즐리의 모습을 보며 그런 미안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귀찮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강아지처럼 보이는 그를 보면 이상하게도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아주 가끔.

    이즐리가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이유는 새 옷을 사기 위해서였다. 내가 엠마에게 빌린 책을 돌려줄 겸, 유리아에게 점심을 전해줄 겸 가게에 간다고 하자 자기도 옷을 새로 사려고 한다며 나를 따라왔다. 이즐리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는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옷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옷들은 시장에서 대량으로 사 온 물건을 다시 되파는 것이기 때문에, 싸고 편하게 입을 수 있을 뿐 좋은 퀄리티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분명 이즐리의 성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 이곳보다 더 비싸고 질이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에게 굳이 가게를 추천해주지는 않았다. 이즐리가 이곳에 온 것은 옷을 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보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엠마에게 책을 건넸다.

    “재밌게 잘 읽었어요.”

    “그렇죠? 재밌죠!”

    “네, 엄청요. 특히 주인공이 공작을 살해한 이유가 밝혀졌을 때가 제일 흥미진진하더라고요.”

    엠마는 신이 난 얼굴로 책을 받아들였다. 나는 최근 그녀의 추천을 받아 책 한 권을 빌렸다. 스릴러와 로맨스가 적절히 섞여 있는 소설이었다. 하녀로 일하던 주인공이 어떤 일로 인해한 나라의 공작이자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진심으로 사랑하던 연인을 죽이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내용이 워낙 긴장감 넘쳐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엠마가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면서 내 뒤쪽을 힐끔거렸다.

    뒤를 돌아본 나는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이 이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가끔 나를 따라 가게로 찾아오는 이즐리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때는 그냥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즐리 본인에게 관심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엠마는 찔린 사람처럼 대뜸 내뱉었다.

    “……저, 사장님. 절대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이즐리 씨한테 관심이 있는건 아니에요!”

    나는 순간, 그녀가 내 속마음을 읽은 줄 알았다. 혹시 표정에서 티가 났던 걸까?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때는 속마음이 얼굴로 쉽게 드러나는 편이었다. 그래서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 많이 있었지. 슬쩍 얼굴을 더듬어 보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지도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그냥 찔려서 저런 말을 한 것 같다.

    엠마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두 분 사이를 아는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그녀는 우리 사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냥,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꼭 로맨스 소설이 생각나서요. 이즐리 씨…… 꼭 남자 주인공 같지 않나요? 생김새도 그렇고 행동도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던 곳을 떠나서 오다니! 마치 소설 같아요.”

    그 말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 로맨스 소설 등장인물이기는 하지. 피폐가 섞여 있지만.

    “게다가 사장님도 평범한 분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자신의 가게와 집도 있고, 좋아한다고 여기까지 따라온 남자분도 있잖아요.

    “……음.”

    칭찬인가? 그녀의 입에서 “완전 여주인공 역할에 딱이에요”라는 말을 듣자 얼굴이 화끈해지기 시작했다. 민망해서 죽어버릴 것 같다. 여주인공은 무슨. 굳이 그런 역할을 골라보자면…….

    “라라?”

    유리아가 하는 게 제일 어울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음식점에서 사 온 음식을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유리아와 미카엘라가 보였다. 두 사람은 이즐리와 인사를 나누곤 내게 다가왔다.

    “아, 둘째 사장님……. 무슨 일이야?”

    유리아가 내 손에 들려 있는 가방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그거 점심이야? 우리 주려고 만들어 온 거야?”

    “응. 그런데 내가 너무 늦게 왔나 보네.”

    “좀 늦게 오긴 했지.”

    미카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라라는 늦게 오지 않았어요. 딱 제시간에 온 거예요.”

    유리아가 음식을 다른 곳에 치워버리곤 단호히 말했다.

    “점심 고마워, 라라. 점심으로 꼭 이걸 먹을게.”

    “……오늘은 이 가게의 라따뚜이를 먹고싶었는데.”

    “오늘 점심은 라라의 음식으로 하면 안 될까요? 억지 부려서 죄송해요.”

    아니, 꼭 내 걸로 먹을 필요는 없는데…….

    미카엘라는 유리아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음식을 다른 곳에 놓아두었다.

    “그래도 둘째 사장님의 요리가 최고지. 고마워.”

    엠마가 동생을 너무 좋아한다며 유리아를 보고 깔깔대며 웃었다.

    가게 문밖에 ‘Close’라는 간판을 세우곤 다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즐리가 끼어 있었는데, 다들 익숙한 듯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우리는 가게 한편에 놓아뒀던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내가 싸 온 음식은 해물 파에야와 감자튀김이었다.

    아리아는 바닷가를 바로 옆에 두고 있어서 해산물을 싼값에 많이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주로 해산물과 관련된 요리를 해서 가지고 오는 편이었다.

    다들 음식을 맛보며 맛있다고 말해주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이즐리와 미카엘라의 반응은 상반되었는데, 전자 쪽은 활짝 웃으며 대놓고 훌륭한 맛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후자는 솔직하게 “괜찮네”라는 감상을 내뱉었다.

    뭐…… 거짓말이래도 맛있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은 좋네.

    나는 미카엘라 바로 옆에 앉아서 식사를 했다. 이즐리는 나와 그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불안한 얼굴로 눈썹을 찡그리거나 대뜸 말을 걸고는 했다. 아무래도 미카엘라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설마 미카엘라와 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완전히 오산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미카엘라는 내게 완전히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힘없이 축 늘어진 그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오직 먹을 것이나 옷에 관련된 일뿐이다. 그래서 유리아를 믿고 맡길 수가 있었다.

    미카엘라가 눈치를 보며 엠마의 옆자리로 옮겨 갔다. 이즐리의 얼굴은 안심하는 듯 바뀌었지만 여전히 시선은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언제나 무심한 태도를 취하던 미카엘라는 그의 시선만큼은 따갑게 느껴지는 모양인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그러다 참다못해 내게 몰래 입모양으로 말했다.

    ‘둘째 사장님. 저분 좀 어떻게 해줘.’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미카엘라는 이즐리를 불편해했다.

    이즐리가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내기 전부터 그랬다. 처음에는 그렇게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어느 날, 그가 이즐리의 얼굴을 제대로 직면한 날부터 무언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이즐리의 얼굴이 불편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걸까?

    그때 이즐리가 입을 열었다.

    “생각났다.”

    작은 중얼거림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즐리 쪽으로 향했다. 그는 미카엘라를 바라본 채로 무심하게 말했다.

    “어디서 많이 봤다고 생각했더니……. 너 에이런시아의 제자구나?”

    그 순간, 가게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폭탄이 터지고 난 뒤의 고요함 같았다.

    에이런시아. 제국 최고 디자이너의 이름이다.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황후의 드레스로 첫 데뷔식을 치른 것으로 유명했으며, 데뷔 이후 거의 황실의 모든 의상과 여러 귀족의 옷이 그녀의 손을 탔다.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탄 이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했다. 아마 이 세계에서 그녀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로 따지자면 샤넬이나 루이비통과 같은 명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에이런시아의 나이는 70대 중후반쯤 되었는데, 그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꺅!"

    엠마의 비명 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미카엘라 씨가 에이런시아의 제자라고요?”

    나는 엠마에게서 시선을 떼고 미카엘라를 돌아보았다. 그의 졸린 듯한 무심한 표정은 미묘하게 무너져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마 그가 에이런시아의 제자라는 말은 진실이겠지. 공작가쯤 되었으니, 에이런시아를 직접 마주할 기회가 자주 있었을 것이다. 이즐리가 물을 마시곤 말을 이었다.

    “응, 그녀의 살롱에서 본 적 있거든 ”

    엠마가 신기한 듯 말했다.

    “와…… 이즐리 씨, 그 보기 어렵다는 에이런시아의 실물을 본 건가요?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에이런시아의 살롱에 가신 거예요? 그곳은 귀족이나 황족만 출입 가능하지 않나요?”

    이즐리는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다. 내 앞에서 허둥지둥하던 모든 순간이 환상 같을 정도로 매끄러웠다.

    “여기 오기 전에 제국에서 살았거든. 그때 살롱에 시중드는 역할로 뽑혀서 잠깐 하인으로 일을 했어.”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까 에이런시아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미모가 뛰어난 사람만 고용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미카엘라는 음식을 삼키곤 입을 열었다. 다시 본래의 느슨한 얼굴로 돌아간 상태였다.

    “……딱히,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내가 항상 제자라고 말했잖아.”

    엠마가 소리쳤다.

    “장난스럽게 말하면 당연히 아무도 안 믿죠! 한 번도 미카엘라 씨는 진지하게 제자라고 말한 적이 없잖아요.”

    “맞아요……. 그런 대단한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유리아도 입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미카엘라가 정말 그녀의 제자일 줄은 몰랐다. 확실히 엠마의 말대로 그는 한 번도 진지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적이 없었다. 우리가 믿지 않아도 그러려니 넘어갈 뿐 증거 같은 것을 들이밀지 않았다.

    그가 에이런시아의 제자라면, 궁금한 점이 하나 생긴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왜 이런 작은 왕국에 와 있는 건가? 본래라면 제국에서 승승장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마 그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거겠지. 이때까지 그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확실하다. 제자인 것을 밝히고 싶어 하는 한편, 그 사실이 알려지고 싶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었으니까. 이즐리에 의해 정체가 밝혀졌을 때 당황한 기색을 내보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럼 전 에이런시아의 제자의 제자인 걸까요?”

    “하하, 그렇겠네!”

    그것을 알기에 유리아와 엠마, 나는 그저 대단하다, 신기하다는 식으로 이 상황을 넘어갈 뿐이다.

    “그런데…… 그 제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러나 이즐리는 달랐다. 그는 눈치가 없는 건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입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미카엘라를 살피며 식은땀을 흘리는 것은 나나 유리아 쪽이었다.

    이러다가 그 또한 이즐리 본인의 정체를 밝혀버리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일까?

    에이런시아의 제자가 온 것은 놀라움과 대단함이 섞인 불편함으로 다가오겠지만 제국의 고위 귀족이 찾아왔다는 것은 이곳 사람들에게 그저 거북함으로만 다가올 것이다. 다행히 미카엘라는 이즐리의 정체에 대해 밝힐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이즐리의 질문에 무언가 생각하는 듯 위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안 되겠다. 저 입을, 내가 멈춰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즐리, 저 이제 갈 건데. 같이 나갈 거죠?”

    “어? 응! 같이 갈래.”

    이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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