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3 (7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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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

도망쳤다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이즐리는 마차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좌석에서 일어나 문을 여는 짧은 사이,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얼굴은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계단을 내려오는 내게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에는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었다. 오랜 훈련으로 울퉁불퉁하게 변형된 손은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다.

“……잡고 내려올래?”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민망한 미소를 지은 이즐리는 손을 거둬들였다.

바닥에 발을 내디딘 나는 이전에 유피스에 왔었던 기억을 더듬어 공장에 도착했다. 양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세 명쯤 되는 직원이 물건을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나를 향해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이 막 완성된 시제품을 가지고 왔다.

“사장님, 저번에 요청하셨던 시제품이랑 종이입니다.”

“감사해요.”

시제품을 받아 들고 겉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전생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기능도 똑같을까? 막 테스트를 하려고 할 때, 이즐리가 시제품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뭐야?”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물건을 살펴봤다.

그러고 보니, 이즐리는 처음 보는 거겠네. 아니 이즐리뿐만이 아니다.

이 세계의 사람들에겐 아직 어색한 물건일 것이다.

“볼 포인트 펜이라는 거예요. 일명 볼펜이죠.”

“볼펜? 처음 듣는 이름인데……. 모양도 그렇고, 펜이라고 하는 것 보니까 글자를 쓰는 도구 같네. 맞아?”

“맞아요.”

달칵, 끝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뾰족한 심이 나타났다. 볼펜을 쥐고 종이에 마구 휘갈겨보았다. 검은색 잉크가 나오며 이리저리 선이 그어진다.

완성된 것은 커다란 별 그림이다. 나는 별 그림 옆에 작게 내 이름을 쓴 뒤 손을 뗐다.

잉크도 새지 않고, 잘 나오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만년필이나 딥 펜처럼 글을 쓰는 물건이에요.”

이 세계는 아직도 딥펜과 만년필은 사용하고 있었다. 해당 필기구들은 잉크가 잘 새고, 관리가 불편하며, 사용할 때마다 계속해서 잉크를 충천해줘야 하는 등의 불편함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잉크를 충전할 필요도 없이 일회용으로 간단히 쓰고 버릴 수 있는 볼펜이 나온다면 어떨까? 분명히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볼펜의 자세한 구조나 그것을 만드는 법은 잘 알지 못한다. 전생에 관련 회사에 다닌 것도 아니고, 일상적으로 사용해 왔던 물건에 큰 관심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장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설계도를 만들었다. 그 후 사람을 고용해서 만들도록 시켰다. 여러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이 물건인 것이다.

“그렇구나……. 다른 펜들이랑 좀 다른 것 같네.”

관심을 보이는 이즐리를 향해 볼펜을 내밀었다.

“한번 사용해보실래요?”

“좋지!”

이즐리는 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손과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볼펜과 종이를 집어갔다. 근처에 있는 책상에 대고 시의 구절이나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마구 끄적이던 그는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이거 괜찮은데? 엄청 편해. 힘을 주고 써도 쉽게 망가지지 않고, 종이의 질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잉크가 번지지도 않네. 만약 시중에 출시되면 많이 사서 쓸 것 같아. 이런 걸 만들어내다니……. 라일라, 너 진짜 대단하다.”

“좋은 평가 고마워요.”

칭찬을 듣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뭘.”

내가 방긋 웃자 이즐리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감탄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한편으로는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저 발명품을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니까.

음…… 볼펜 발명가님, 볼펜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제가 잘 써볼게요. 돈 많이 벌면 기부도 크게 크게 할게요. 마음속으로 발명가에게 경의를 표하고는 입을 열었다.

“다 보셨으면 한번 바닥에 떨어뜨려볼래요?”

“뭐? 그러다 망가지면 어떡해?”

“안 망가져요. 떨어뜨려보세요. 어서요.”

이즐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바닥으로 심이 나온 볼펜을 떨어뜨렸다. 팍! 땅에 닿은 볼펜은 한 번 튕기더니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것을 들어 다시 글을 써봤다. 망가진 곳 없이 잘 나온다.

“내구성도 나쁘지 않네.”

이걸로 가면 괜찮을 것 같다.

“이제 확인도 했으니 볼펜 몇 개를 가지고 돌아가면 될 것 같아요.”

“아, 바로 돌아가는 거구나. 몇 개 들고 가면 되는데? 내가 들까?”

“아니에요. 정말 조금 가지고 가는 거라서 괜찮아요.”

“응…….”

직원들에게 필요한 볼펜의 개수를 말해주자 그들은 작은 가방에 물건을 담아 내게 건넸다. 이제 이 물건들을 다른 만년필, 깃펜 가게에 위탁해서 판매할 생각이었다. 볼펜이 어느 정도 인기를 끌면 가게를 차릴 것이다.

직원들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고 공장 밖으로 나오자 푸른색을 띠고 있는 하늘 저편이 옅은 주황색으로 물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시간은 네 시 정도로,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겨울이라서 해가 일찍 지는 모양이다.

우리는 마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갔다. 아리아였다면 사람들이 아직도 이곳저곳을 오고 갈 시간이 었지만, 이곳에선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을 한 편에 마련된 작은 공장들이 고요히 연기를 내뿜고 있을 뿐이다. 다들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침을 먹은 지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허기가 졌다. 나는 울렁거리는 배를 쥐며 중얼거렸다.

“좀 배고프네.”

그 작은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이즐리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그래? 그럼 저기 있는 가게에서 샌드위치 라도 사올까?”

그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마련된 가게를 가리켰다. 멋진 인테리어로 차려진 가게였지만 장사가 잘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침을 든든히 먹어서 그렇게 배고프지는 않아요. 빨리 돌아가서 식사하면 돼요.”

“내가 배가 고파. 내 걸 사는 겸 네 몫까지 사오려고 하는데, 어때?”

“정말…….”

이즐리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사오게 해 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전혀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부탁해요.”

“그래!”

그가 올 때까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가방에 들어 있는 볼펜 하나를 꺼내 달칵거리고 있자니,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두 명의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름한 옷에 음흉한 미소를 띤 빨간 얼굴, 껄렁대는 자세, 훅 풍겨오는 알코올의 냄새. 한눈에 봐도 좋은 인상을 가진 남자들은 아니었다.

“아가씨. 여기서 뭐 해?”

이건 또 뭐지? 설마…… 헌팅?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놈들은 내게 시답잖은 말로 작업을 걸기 시작했다. 심심해 보이니 재밌게 해 주겠다느니, 자기들을 따라가지 않겠냐느니……. 살다 살다 별 걸 다 당해 본다. 유리아는 몰라도 내가 이런 걸 당해볼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남자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작게 혀를 찼다. ‘한 놈만 걸려봐라’라는 생각으로 모든 여자한테 껄떡대는 놈들인가? 과연 공장을 살 때 들었던 것처럼 치안이 그리 좋은 동네는 아닌 모양이다.

나는 볼펜을 가방 안에 넣고 단호하게 내뱉었다.

“관심 없어요.”

남자는 취한 듯 어눌한 말투로 웅얼거렸다.

“그렇게 굴지 말고, 응?”

“저 애인 있어요. 지금 그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니까, 그냥 가세요.”

“오, 애인도 있었구나. 근데 아가씨를 혼자 기다리게 하는 놈이랑 노는 것보다 우리랑 노는 게 더 재미있을걸? 저기 카페가 있는 데 저기서 한잔하자.”

계속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고 있다.

말이 안 통하네. 이런 놈들이랑은 아예 말을 섞지 않는 편이 최선이다. 한숨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는 볼펜을 가방에 넣었다.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남자 중 키가 큰 사람이 내 손목을 잡아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술냄새와 함께 음식물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계속 튕기지 말라니까? 짜증 나게!”

남자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곤 나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손목을 옥죄어오는 손아귀의 힘이 세다. 손목이 아파왔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단호히 말했다.

“……지금 당장 제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경비를 부르겠어요.”

재빨리 손을 뿌리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놈들을 따돌리고 도망쳐야 할 것 같은데,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경비는 무슨 경비? 여긴 경비들도 잘 안 다니는데?”

어쩔 수 없지. 가방으로 저 자식들의 머리를 후려치자. 그리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도망치자. 난 다리가 빠른 편이니까 얼마든지 저들을 따돌릴 수 있을 거야. 그런 생각으로 가방을 꽉 잡고는 때릴 준비를 했다.

“좋은 말로 할 때…….”

……퍽!

“켁!”

그때, 남자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허공에 피와 이빨 하나가 붕 떠오르다가, 몸뚱이와 함께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남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옆으로 떨궜다. 기절해버린 남자는 피가 섞인 침을 질질 흘렸다. 남아 있던 남자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이런 미친…….!”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는 커다란 몸집과 큰 키를 가지고 있어서 정면에 보이는 것은 탄탄한 등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했다. 남자의 정체는 바로…… 이즐리였다. 나는 술에 취한 장정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 잠깐 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즐리는 생전 보지도 못한 위협적인 얼굴로 남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험악한 표정이던지,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고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그때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가 사 온 듯한 샌드위치와 음료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귀 막혔어? 라일라가 꺼지라고 하잖아.”

이즐리가 으르렁거렸다.

“뭐야 이 새끼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키가 작은 남자는 걸치고 있던 상의의 속 주머니에서 검을 꺼냈다. 그는 두 손으로 검을 쥔 채 이즐리에게 달려들었다.

“조심해요!”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하고 어디선가 같잖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상황은 종료된 뒤였다.

남자의 검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본인은 거대한 손에 멱살이 잡혀 들어 올려져 있었다. 남자는 숨이 막히는 듯 컥컥거리며 이즐리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이즐리는 남자를 번쩍 들어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그는 죽을 듯이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그리고 남자를 깔고 앉아 주먹으로 얼굴을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남자가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러도 폭력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나를 고문하던 오베론을 떠올리고 말았다. 숨이 턱 막혀 오고 몸이 벌벌 떨린다. 떨림을 멈추기 위해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심호흡을 해봐도 전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왜 이러는 거야? 이즐리는 오베론이 아닌데. 공포를 지우기 위해선 그의 행동을 멈추는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써 두려움을 삼키고 이즐리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다시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즐리, 이즐리……. 제발 그만해요. 그만하면 됐어요.”

이즐리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다.

“라일라…… 괜찮아……?”

이즐리의 손은 내 어깨를 쥐려고 하다가, 결국엔 닿지 못하고 허공을 부유한다.

“내가, 널 혼자 둬서 이런 일이 생겼어.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이즐리의 얼굴이 흐려졌다. 눈가가 쉴 새 없이 떨리고, 뾰족한 송곳니가 입술을 잘근거린다. 칼을 든 상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운 그는, 모순적이게도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이즐리가 피가 묻은 손을 황급히 등 뒤로 숨겼을 때에서야,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나라는 걸 깨달았다. 이즐리는 내가 자신을 겁내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저…… 라일라…… 미안…… 미안해…… 내가 또…… 너를…….”

무섭게 만들었어?

나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어?”

이즐리가 바보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요.”

그가 아니었다면 위험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도와줬으면서 왜 내게 미움받을까 무서워하는 걸까. 나는 도움을 준 이에게 매정하게 굴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샌드위치와 주스를 들고 말했다.

“샌드위치, 다 으깨졌네요. 식사는 그냥 돌아가서 해요.”

그것들을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에 버리고, 뒤돌아 마차가 서 있는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한참 길을 걷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래라면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할 이즐리가 보이지 않던 것이다. 어디 간 걸까? 다시 고개를 돌리자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소년이 보였다.

“안 와요?”

“어? 아, 아니……. 갈 거야…….”

그제야 이즐리는 정신을 차린 듯 내게 달려왔다. 입을 꾹 다문 그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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