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2 (7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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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2

    우리는 창가에 있는 4인용 자리로 향했다.

    “그럼 두 사람부터!”

    재빨리 의자로 달려간 이즐리는 신사처럼 우리의 의자를 빼주었다.

    “앗, 감사해요.”

    유리아가 웃으며 그가 의자에 앉았다. 나도 감사의 의미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의자를 빼주는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환생 전, 호텔 최상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만 받아본 대우였다. 이 세계에서 이런 식으로 대접받을 줄은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것도, 귀족 도련님에게 받아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특별 대접이 아직까지는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메뉴판에서 요리를 고르고 10~20분쯤 지나자 식탁 위에 음식들이 차려졌다.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봉골레 파스타, 스테이크가 나왔다. 막 조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미디엄 레어로 구워진 소고기에서는 따끈한 김이 올라왔다.

    접시를 내려놓은 직원이 떠나가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손을 움직이는 이즐리를 본 나는 마음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칼질을 하는 모습이 우아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컵을 들어 물을 마시고, 나이프로 고기를 썰고, 사용한 식기를 내려놓고, 포크를 들어 음식을 집는다.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느껴진다. 제대로 된 식사 예법을 모르는 내가 봐도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비싼 식당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리아도 신기한 듯 그를 쳐다봤다. 다시 이즐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새삼 그가 귀족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래……. 평소에 경망스럽게 굴기는 했어도 도련님은 도련님이었지.

    이즐리가 고개를 살짝 내리고 그릇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탓에 기다란 속눈썹이 눈에 띄었다. 촘촘히 늘어선 그것들은 안구의 움직임에 따라 파르르 떨린다. 속눈썹이 저렇게 긴 사람은 유리아 말고 처음 봤다. 시선을 내려 그의 날카로운 코와 붉은 입술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정말…… 얼굴 하나는 쓸데없이 잘생겼네.

    그때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즐리는 깜짝 놀란 듯 말을 더듬거렸다.

    “왜, 왜 그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에요. 그냥, 스테이크를 써는 모습이 멋진 것 같아서요.”

    나는 그 말을 내뱉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실수했다.

    괜한 칭찬을 해서 기대를 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는데. 멋있다는 말은 호감을 표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희망 고문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내가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때부터 이즐리는 스테이크를 써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멋있다는 말을 듣고 싶은지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는데,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았다. 나는 무어라 답해줘야 할지 몰라 그 시선을 외면했다. 미안하지만 더 말해줄 생각은 없다. 그만. 시무룩한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

    이즐리는 축 처진 채로 고기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재빨리 음식을 씹어 삼킨 그가 냅킨으로 입을 닦고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거?”

    유리아가 커다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네? 왜 그러세요?”

    “이거 맛이 왜 이래? 이런 걸 돈 주고 판다고?”

    “별로예요?”

    “완전……!”

    어느 정도길래 저러는 걸까? 미카엘라의 혀가 틀리는 날이 온 건가? 나는 재빨리 손을 움직여 스테이크를 맛봤다. 적당한 굽기로 구운 소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아스파라거스, 구운 마늘, 단호박 등의 채소로 이루어진 가니쉬도 스테이크와 잘 어울렸다.

    “으음…… 맛있는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문제인 거지? 맛만 좋은데. 평생 일류 셰프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고살던 이즐리에게 맛없는 음식일지도 모르겠다. 평민으로 살고 싶다면 이런 것들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 텐데.

    이즐리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그러니까…… 별로는 별로인데 저 하늘의 별로라는 말이었어. 천상의 맛이라고! 정말 맛있는데?”

    “아까는 별로라고 했으면서. 갑자기 말을 바꾸는 걸 보니까…… 거짓말 같은데요?”

    “아냐. 진짜야!”

    허둥지등 변명을 하는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풉!”

    그때 어디선가 웃음이 빵 터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리아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즐리와 나의 시선이 꽂히자 그녀는 마구 손사래를 쳤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사레에 들려서 그래요. 라라 얼른 먹어! 이즐리도 어서 식사해요.”

    사레라기보단 웃는 소리 같지 않았나?

    그러나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해 음식을 먹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길면서 짧은 식사시간이 끝난 뒤, 유리아는 가게로 향했고 나는 마차를 타기 위해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이즐리는 평소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가 뒷짐을 지고 몸을 앞으로 쭉 내민 채로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집?”

    “이제부터 아리아에서 좀 떨어져 있는 지역인 유피스로 갈 생각이에요. 거기 있는 공장에서 할 일이 있거든요.”

    최근에 나는 유피스에 건물을 하나 샀다. 새롭게 시작할 사업을 위한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공장이었다. 뭐, 공장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자그마한 건물이지만 말이다.

    내가 사업을 시작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누군가는 내 말을 들으면 “공작이 준 금화가 있지 않으냐?”라고 물어볼 것이다. 그래, 그녀가 준 돈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한하지는 않았다. 쓰다 보면 언젠가 동나고 말 것이다. 금화가 다 없어지기 전에 금전을 많이 벌어둘 필요가 있었다. 돈은 많으면 좋으니까. 삶이 쾌적해지기도 하고,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 유리아와 함께 행복한 일생을 보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돈이 행복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이즐리는 무언가 기억난 듯 “아!”하는 소리를 냈다.

    “생각났어. 사업을 한다고 했었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서 팔 거라며.”

    “맞아요. 저번에 흘러가듯이 말했던 건데, 용케 기억하고 있네요.”

    “당연하지. 너랑 관련된 건 안 잊어.”

    그의 말이, 갑자기 내 심장을 훅 치고 들어온다. 저런 흔한 작업 멘트에 가슴이 철렁했다는 것이 민망했다. 나는 동요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제가 어떤 사업을 할 건지 알고 있어요?”

    “그것까지는 안 말해줬던 것 같은데…… 뭘 할 거야?”

    “지금은 비밀로 할게요.”

    “먼저 말 꺼냈으면서 안 알려주는 거야? 치사하네.”

    “제가 원래 좀 치사해요.”

    그와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마차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마차에 올라탔다. 이즐리도 슬그머니 나를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계단을 올라타는 그에게 장난스레 내뱉었다.

    “자연스럽네요. 타도 된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

    “어? 안돼……?”

    이즐리는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참 신기한 일이다. 생긴 건 고양이처럼 매섭게 생겨 먹었으면서 어떻게 개를 연상시키게 만들까? 저런 반응을 보이면 거절할 수도 없다. 거절할 생각도 없었지만. 나는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농담이에요. 어서 올라와요.”

    이즐리가 올라타자 마부가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퀴가 굴러가며 마차가 길 위를 달리기 시작한다. 창밖의 풍경이 계속해서 바뀐다.

    아리아에서 유피스까지는 약 두 시간쯤 걸렸다. 그 시간 동안은 이즐리와 단둘이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와 마주 본 채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저택에서는 그와 함께 있는 게 껄끄러웠으면 모를까, 어색하게 느끼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상황을 서먹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차 안에 있는 두 사람 중 하나는 고백을 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고백을 받고도 답을 하지 못하고 보류한 사람이 아닌가? 본래라면 둘 중 한 사람이 어색한 공기를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색하다……. 정말 어색해. 그냥 따라오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이즐리를 거절하려면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었다. 식당에 따라온다는 말에도, 내 뒤에 따라붙을 때도 얼마든지 싫다고 저리 가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를 매몰차게 대할 수가 없었다. 이즐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리아에 찾아온 날, 가슴속에 생겨난 연민이 그를 힘껏 밀어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즐리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못하고 있다.

    나는 이즐리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는 소설의 남자 주인공 중 하나로 선택될 정도로 잘생겼고, 귀족 특유의 오만함을 제외하면 성격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기사로서의 능력도 출중했다. 그런 남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자존심도 성격도 죽이고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고 있다. 그야말로 많은 이들이 바라는 꿈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를 좋지 않은 상황에서 마주했기 때문인지 이즐리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 꺼려졌다.

    그렇게 거부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이런 이상하고 애매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는 언제쯤 종국에 다다를까? 아마, 이즐리가 나를 포기하고 떠날 때쯤에야 끝이 나겠지.

    창문 밖을 보는 척 내 얼굴을 몰래 훔쳐보고 있던 이즐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피스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네. 거긴 어떤 곳이야?”

    “좀 허름한 동네예요. 지어둔 집은 많은데 사람이 거의 살지 않고, 편의시설도 별로 없어요. 작은 공장만 몇 개 돌아가고 있죠.”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별로 안 좋은 곳 같은데……. 그런 곳은 치안이 좀 그렇지 않아?”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땅값이 싸서 건물을 사기에는 좋더라고요.”

    유리아의 가게를 살 때는 아무런 고민 없이 비싸고 좋은 곳을 골랐다. 그런데 내 몫의 공장을 사려고 하자 돈을 쓰는 것이 아까워졌다. 그래서 고르고 골라 아리아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값싼 지역을 선택한 것이다.

    유피스에 관한 대화가 끝나고 이야기의 소재는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이 전해준 동네의 소문이나 초콜릿 가게의 과자, 이사한 집의 불편함, 2주일 동안 평민의 삶을 살아가며 느낀 점들. 이즐리는 주제를 홱홱 바꿔가며 떠들었다.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재잘거리면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간간히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이즐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뭐가 그렇게 좋아서 저렇게 웃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나와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그렇게도 좋을까? 이렇게 평범한 여자아이가 뭐가 좋다고 저러는 걸까? 왜 나를 좋아하는 걸까?

    그는, 도대체 어떻게 나를 좋아하게 된 걸까?

    “이즐리.”

    “왜 그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이즐리는 왜 저를 좋아하게 된 거예요?”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좀 뜬금없었나.

    이즐리가 말없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하자 민망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재빨리 말을 돌리려고 할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장난에 버럭 화를 내고 큰 소리로 웃어준 사람도, 귀족인 걸 신경 쓰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와 준 것도 네 가 처음이었거든. 그런 밝고 성격을 가진 너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 그러다 네가 해주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하게 됐고, 너와 함께 있던 시간을 좋아하게 됐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라일라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거야.”

    “그럼…… 성격 때문에 좋아하게 됐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원래 저는 그렇게 밝은 성격은 아니에요. 그때는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잠시 다른 사람이 됐던 거예요. 지금의 저는 도련님이, 이즐리 당신이 한 농담에 버럭 화내지도 못하고 큰 소리로 웃지도 않아요.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도 없고, 당신의 앞에서 사소한 이야기를 재잘거리지도 않을 거예요. 앞으로 저와 함께 있을 때 저택에 있을 때만큼 즐겁지 않을 거예요. 저는…….”

    당신이 사랑했던 라일라와는 달라요. 그런데 그런 사람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 아닐까요?

    “아니야.”

    이즐리가 눈썹을 찌푸리며 단호히 말했다.

    “즐거워.”

    "……."

    “지금 너와 있는 모든 시간들이 즐거워. 네가 그때처럼 행동하지도 않아도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해. 나는 밝은 성격의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라일라 네가 좋은 거야. 난 네가 어떤 성격이든, 앞으로 어떻게 변하든 계속 좋아할 거야.”

    “……그런가요?”

    그는 나를 사랑한다. 숨이 막혀오는 것 같은 진심이, 그림자에 덮여 있어도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내게는 너무나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가슴이 설렘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겁다. 불쌍한 이즐리. 또다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버렸구나. 네 사랑을 무겁다고 생각하기만 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거야.

    이즐리의 말을 마지막으로 침묵이 마차 안을 덮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의 뺨은 점점 빨개지기 시작했다.

    이즐리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쳤다.

    “그냥, 그렇다고……!”

    그때 마차가 유피스에 도착했다. 이즐리는 허겁지겁 바깥으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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