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1(외전) (7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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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좋은 아침이야, 라일라.”

집에서 나오자마자 내 앞에 꽃다발이 내밀어졌다. 꽃 한 송이로 이루어진 꽃다발을 한 번, 그것을 건넨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보기 좋게 탄 구릿빛 피부……. 눈앞에 있는 남자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깊은 한숨뿐이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오늘도 너구나. 이즐리 에머스.

꽃다발을 받아 들자, 이즐리는 이를 보이며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바깥에 오랫동안 서있던 것인지 그의 코와 뺨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직 한겨울이니 밖에서 있는 것이 꽤 고됐겠지.

“존댓말 같은 거 안 해도 되는데. 난 이제 평민이라니까?”

“존댓말이 더 편해서요.”

“네가 그렇다면야.”

이즐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아리아에 온 것은 벌써 2주 전의 이야기이다. 처음 이즐리를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가 이곳에 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세 형제는 미련에 사로잡혀 평생 저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미의 사랑을 바라며 그곳에서 썩어 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이즐리가 아리아에 나타나다니?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가게에 찾아온 그를 본 날,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을 떡 벌린 채 서있었고 이즐리는 민망한 듯 웃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온 유리아도 그를 보자마자 나랑 똑같이 뻣뻣이 굳었다.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미카엘라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즐리가 찾아온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졌지만 소설은 아니었다. 이곳은 살아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현실이었다. 사소한 사건에 영향을 받아 사람은 변하고,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미래 역시 함께 변화한다. 소설 속 악당이라 생각했던 이즐리도 바뀔 수 있었다.

왜냐면, 그는 사람이었고…… 사람은 누구나 변하니까.

그 사실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가지고 왔다. 나는 이즐리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원작처럼 평생 저택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자신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제멋대로이고 이기적인 성격이 전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즐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설마 나일까? 그에게 생긴 변화가 좋은 쪽일까, 나쁜 쪽일까? 내 가슴속에 옅은 불안이 자리 잡았다.

이즐리는 가게 문 앞에서 머뭇거리더니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유리아를 안심시키고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어쩐지…… 이즐리가 내게 나쁜 짓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던 행동이었다.

둘만 남은 골목길에서 이즐리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해.

그가 찾아온 목적은 나였다.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귀족이라는 신분도, 가족도, 부유한 삶도 모두 버리고 온 것이다. 이즐리는 내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버렸으니 무서워하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거절의 말을 들을까 싶어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의 모습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모두 버렸다고? 정말 이게 이즐리란 말인가? 아니다. 내가 아는 그는 남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미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이즐리 에머스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변했다는 것을 절절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 정말로 이즐리는 변한 걸까?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지만 소설 속 모습에 눈이 가려져 모르고 있던 걸까? 알 수 없다. 난 정말 알 수 없었다.

그저 함부로 남을 재단하고 있었다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고개가 절로 숙여질 뿐이다.

이즐리는 절대 내게 폭력이나 험악한 행동, 강요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절대 계약서라고 하는 물건을 건넸다.

-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이걸 써도 좋아.

그가 말하기를, 절대 계약서는 귀족이나 왕족들이 중요한 계약을 할 때 사용하는 마법 서약서라고 한다. 계약의 내용을 어기는 사람은 죽음보다도 더 큰 고통을 얻게 된단다. 구겨진 자국 하나 없이 매끄러운 계약서를 받아 든 나는…… 그제야 이즐리가 진짜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이라니.

심장이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전처럼 끔찍하거나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즐리의 사랑이 너무나 무거워서 숨이 턱 막혀온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모든 걸 다 가졌던 사람이 나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고? 겨우 사랑 하나 얻어보겠다고 다른 것을 모조리 포기해버린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런 선택밖에 하지 못했던 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마지막으로는 부담스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으니 너도 나를 받아줘야 한다’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즐리를 받아줄 수 없었다.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그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거절해야 한다.

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이 나를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했건 그게 내 마음을 바꿀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 도련님. 전……

- 기회를 줘. 노력할게.

나는 이즐리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가 한 행동은 나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어도, 새로운 감정을 가슴 깊숙이 꽂아 넣었기 때문이다. 그것의 이름은 연민이었다. 나는 이즐리가 불쌍했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는 여자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한 그가 안쓰럽고 또 안쓰러워서…… 차마 거절의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의 과거를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저택을 떠나기 위해서 이즐리가 어떤 각오를 해야 했을지 알 수 없었더라면 싫다고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알았어요.

그 뒤로 그는 내 마음을 얻어보겠답시고 여러모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매일 같이 찾아와서 꽃을 선물하거나 내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 마음이 변하는 일은 없다.

“라일라?”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왜 그러세요?”

이즐리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오늘은 일정이 어떻게 돼?”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가끔 이즐리는 내가 자신을 무서워할까 봐 눈치를 보곤 했다. 사실 나는 이제 그가 무섭지 않았다. 더 이상 이 남자가 우리에게 해를 끼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저택에서의 일이나 안 좋은 기억이 엮여있는 탓에 꺼려질 때가 있었다. 유리아도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지만 이따금 어색해하곤 했다.

나는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늘은…….”

꽃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먹을 수도 없고, 장식용으로 꽂아둬도 언젠가는 시들어버린다. 하지만 선물로 받으면 기분은 좋다.

“유리아랑 같이 새로 생긴 식당에 가보려고요.”

우리가 운영하는 가게 주변에 양식 레스토랑 하나가 생겼다. 어디서 돈이 생겼는지 혼자서 식당을 갔다 온 미카엘라는 음식 맛이 그럭저럭 괜찮다는 평을 내렸다. 그는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사주거나 만들어준 대로 먹기는 하지만 맛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카엘라의 “괜찮다”라는 말은 “맛있다”와 같다.

“혹시 초콜릿 가게 옆에 새로 생긴 거기?”

“맞아요.”

이즐리는 잘됐다는 마냥 말했다.

“나도 오늘 그 식당에 가보려고 했는데. 괜찮으면 같이 갈래?”

“글쎄요. 동행이 있어서요.”

“유리아가 허락하면 괜찮다는 의미지?”

뭐, 유리아가 허락해준다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즐리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허락받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실제로도 그렇기도 하고.

그때 어깨를 가볍게 만지는 손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유리아가 있었다. 항상 입던 수수한 원피스가 아닌 화려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평소보다 더 빛나는 것 같았다. 유리아는 미소를 띤 채 이즐리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이젠 도련님 아닌데.”

이즐리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유리아는 그가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는지 급하게 덧붙였다.

“아뇨! 이즐리요. 하하, 죄송해요. 시간이 꽤 지났는데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죄송하긴 뭘……. 항상 그 호칭으로 불러왔으니까 어쩔 수없지. 하지만 유리아 네가 정 죄송하다면 용서해줄 수 있어. 대신!”

“네? 대, 대신이요?”

유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놈 무슨 생각이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즐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 조건으로 너희랑 같이 식당에 가도 돼? 응?”

이즐리가 두 손을 맞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착한 유리아는 거절하는 일 없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 같이 가요. 셋이면 더 즐거울 테니까요.”

“고마워!”

그가 감사 인사를 건네며 유리아의 손을 와락 붙잡았다. 유리아가 불편해 할 텐데. 내 예상대로 유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즐리의 행동을 부담스러워하는 티가 팍팍 났다.

아직 조심성이 많이 모자라네. 나는 혀를 차고 말했다.

“도련님, 손이요.”

“아!”

이즐리는 허둥지둥 손을 놓았다. 그가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으며 유리아에게 사과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외출하기 전에 이 꽃을 어떻게 할 필요가 있었다. 식탁 위에 마련된 꽃병에 새로운 꽃을 꽂아놓자 새것과 옛것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졌다. 나는 만족스레 그것들을 바라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집과 꽤 떨어진 길가에서 이즐리와 유리아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은 소곤소곤 거리다가 내가 오자 그런 적 없는 척 딴청을 피웠다. 물어도 얘기해줄 기색이 보이지 않아, 한숨을 쉬고 넘어갔다.

뭐길래 저러는 거람?

고개를 갸웃거리다 셋이서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길을 걷는 도중 동네 아이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들은 이즐리를 보고 웃으며 나와 데이트를 하냐고 짓궂게 물었다. 참 나 데이트는 무슨.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었다.

이미 그가 나를 찾아 아리아까지 온 것은 동네 이곳저곳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이즐리를 둘러싸 겉옷이나 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처음에 나는 저런 식으로 이즐리에게 겁도 없이 다가가는 아이들을 말리려고 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는 한때 귀족이었고 평민들이 예의 없이 구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예상외로 이즐리는 아이들과 잘 어울려주었다. 지금처럼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거나 머리를 꾹 눌러주면서 그들의 말을 웃어넘겼다. 동생이 있어서일까? 저보다 어린 사람을 다루는 실력이 꽤 능숙하다. 이즐리는 아이들에게 셋이서 놀러 가는 것은 센스 없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오해받은 것이 좋은지 한껏 들떠 보였다.

레스토랑은 음식을 맛보려고 찾아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래도 보통 식당보다 비싸기 때문인지 엄청 많지는 않았다. 기대된다고 속삭이는 유리아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일 때, 이즐리가 줄을 무시하고 곧바로 입구로 들어가려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즐리.”

내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가 어색하다고 생각하면서,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잡아챘다.

“멈춰요. 새치기하면 안 돼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안 들어가?”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퍼뜩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손에 의해 줄 맨 뒤에 서게 된 이즐리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평소대로 행동해버렸네…… 그러니까, 여기 서 있으면 된다는 거지? 이 줄이 다 사라질 때까지?”

그는 줄을 서 있는 게 어색한 모양인지, 팔짱을 낀 채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마치 처음으로 혼자 심부름을 나간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나는 식당 벽에 등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이즐리는 한 번도 이렇게 기다려본 적 없죠?”

“으음…… 응. 항상 하인들이 식당을 예약해줬었고, 예약하지 않아도 가게에 가면 종업원들이 자리를 마련해줬거든.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테니까 줄 서는 거에 익숙해져야겠지.”

“줄 서야 하는 거 귀찮죠.”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요.”

“……그것도 아주 조금.”

조금이라는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이즐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가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색하고 불편하게 평민의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익숙하고 편안한 귀족의 삶으로 돌아가는 편이 그에게 더 좋지 않을까. 줄을 설 필요도 없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봐주는 그런 삶으로…….

그때 내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이즐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지금이 좋아.”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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