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69 (6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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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9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스 왕국은 삼면이 바다로 덮인 반도다. 반도의 가장자리로 가면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를 구경할 수 있다.

제국에서 벗어난 유리아와 나는 라스 왕국 남쪽 끝에 있는 도시, 아리아에 자리를 잡았다. 적당히 커다랗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활기 넘치는 도시와 도시를 살짝 벗어나면 훤히 보이는 바다가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유리아는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충분히 바다를 봤으면서, 바다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리아의 바다를 구경했다. 내 팔을 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두 사람이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한 아담하고 집을 샀고, 옷가게를 할 수 있을 만한 2층 건물을 매입했다. 1층은 가게, 2층은 공방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공인중개사는 우리처럼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비싼 건물을 살 수 있는지 신기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건물 거래가 완료된 이후 라일라와 나는 가장 먼저 집을 꾸몄다. 그 과정에서 느낀 점은……. 돈은 언제나 옳다는 것이다.

돈이 있으니 인테리어를 도와줄 사람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가 제안하는 가구들도 아무렇지 않게 척척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뿐만이 아니다. 가게로 사용할 건물도 편하게 꾸밀 수 있었다.

건물이 갖춰지면 이제 필요한 것은 직원이다. 디자이너, 카운터 등 필요한 직원들을 고용했다. 준비가 원만하게 끝난 이후 도매 시장에 나와 있는 옷을 싸게 구매해 판매하고, 공방에서 디자인한 소수의 옷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하게 되었다.

유리아는 디자이너에게 디자인과 옷 만드는 법을 배우며 일을 했고 나는 장부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가게는 작았지만 번화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장사는 잘되는 편이었다. 유리아는 매출이 올라가면 기뻐했지만 나는 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공작에게 받은 돈이 많이 남아 있어서 매출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직원들과 웃고 떠들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아리아에서의 삶에 적응해가는 사이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가왔다. 쌀쌀하기만 하던 날씨는 어느새 몸을 오들오들 떨게 만들 정도로 추워졌다. 침실 창문을 살짝이라도 열어두면 찬바람을 맞곤 잠에서 깨곤 한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나는 뺨에 얼음을 가져다 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번쩍 눈을 떴다.

어젯밤 창문을 닫고 자는 것을 깜빡한 모양인지 창문이 활짝 열린 채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재빨리 창을 닫곤 침대 밖으로 나왔다. 잠옷 위로 두꺼운 카디건을 껴입고 1층 부엌으로 내려갔다.

“유리아가 깨기 전에 아침이나 만들자.”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을 튀기듯 굽고 있자 누군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식들을 완성하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자 동네 아이들이 창문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이대는 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넓은 편이고 남녀가 섞여 있다. 오다가다 이야기를 나누고 먹을 것을 던져주다 보니 어느새 친해진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가끔 동네에 생긴 이야기를 해주거나 간식을 구걸하러 집으로 찾아왔다. 오늘은 무슨 할 말이 있는 건지 잔뜩 신난 얼굴이다.

아이들 중 가장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셸리가 창가에 얼굴을 빼꼼 내민 채 활짝 웃었다. 아직 다섯 살인 소녀는 키가 작아서 창문턱에 얼굴을 기대지 못했다. 햇빛이 그녀를 향해 내리쬐자 붉은 곱슬머리가 마치 주황색처럼 보였고 주근깨가 별가루처럼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은 탓에 뺨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다.

“언니, 언니!”

아이는 잔뜩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봤어? 못 봤지? 응, 아마 못 봤을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진정 좀 하고 말해줘.”

“오늘 이 근처에서 엄청 잘생긴 사람을 봤어! 눈이 이렇게 올라가 있어서 조금 무섭긴 했지만……. 왕자님처럼 멋졌어.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여기 여행을 왔나 봐. 어디 숙소에 머물까? 또 보고 싶다.”

“그래? 얼마나 잘생겼길래 이래? 나도 궁금하네.”

꿈꾸는 소녀처럼 눈을 빛내는 셸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여행이라……. 아리아는 바닷가에 있는 만큼 사람들이 많이들 여행을 오가는 곳이었다.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기 위해 많이 찾아오지만 겨울에는 그다지 손님이 없다고 한다. 셸리가 말하는 남자는 겨울 바다라도 구경할 생각일까?

“그럼 내가 어떤지 알려줄게. 키는 이따만 하게 크고, 얼굴이 요따만 하게 작아.”

“그렇구나. 키는 이따만 하고, 얼굴을 요따만 하구나.”

“머리카락은 꼬불꼬불 새까맸어! 미카엘라만큼, 아니 미카엘라보다 더 잘생긴 거 같았어.”

“응응."

그녀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사탕을 들어 아이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셸리는 이제 말하는 것보다 사탕을 굴리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셸리가 조용해지자 이번에는 다른 아이들이 시끄러워진다. 옆집에 사는 누구랑 누가 사귄다느니, 누가 저쪽 바닷가에서 인어를 봤다느니 하는 소리들이었다. 차례차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곤 사탕을 쥐여줘서 보냈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오늘도 애들 때문에 고생이 많네 그려. 귀찮으면 그냥 쫓아 비려.”

“고생은요. 귀엽기만 한걸요.”

작고 귀엽고 순진한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때때로 작은 악마 같은 모습을 보여주곤 하지만 말이다. 그들이 달갑지 않았으면 사탕을 사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창문을 닫고 몸을 돌리자 유리아가 2층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라, 오늘은 내가 만든다고 했는데……!”

“일찍 일어나서 할 일이 없다 보니 이렇게 돼버렸네.”

“다음에는 내가 만들 거야. 알았지?”

“그래, 그래 알았어.”

유리아의 불만스러운 얼굴은 음식을 먹자마자 환한 미소로 바뀌었다.

식사를 다 하고 함께 가게로 갔다. 이런 일은 흔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유리아 혼자만 출근을 했고 나는 가끔 일손이 부족할 때나 유리아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할 때만 가게로 향했기 때문이다. 유리아가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전생의 기억을 이용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나 오늘은 카운터를 봐주는 직원인 엠마가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운 탓에 내가 대신 그 일을 맡게 되었다.

물론 디자이너인 미카엘라나 그의 제자로 들어간 유리아에게 일을 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에 미카엘라가 유리아를 더 가르쳐주기를 바랐다.

가게에 도착하자 2층에서 미카엘라가 비척비척 걸어 내려왔다.

“어서 와……. 첫째 사장님, 둘째 사장님.”

여자 같은 이름과 달리 미카엘라는 보랏빛을 띠는 기다란 은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남자였다. 우리가 디자이너로 고용한 사람이자 가게 2층에서 살고 있는 입주민이기도 하다. 미카엘라가 2층에서 살게 된 이유는 그가 내민 고용조건 때문이었다. 저 남자는 돈 같은 건 필요 없고 숙식만 해결해주면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2층을 내주게 되었다.

“추울까 봐 내가 미리 난로켜 뒀으니까, 굳이 틀러 갈 필요 없어.”

커다랗게 하품을 한 그는 골초답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고 했다. 유리아가 평소처럼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안 돼요……! 옷에 냄새도 밸 거예요.”

“그럼 나가서 피면 되나?”

“그것도 좀……. 담배는 몸에 나쁘니까요.”

“……정신건강에는 좋은데.”

“안 좋아요.”

유리아가 단호하게 굴자 미카엘라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듯 시선을 맞췄다.

“안 피우는 게 좋기는 하죠.”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 되지 않던가? 가까이하기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리자 시무룩해하기 시작한다.

“한때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의 수석 제자였던 내가 디자인에 ‘디’자도 모르는 꼬마들한테 잔소리나 듣고 있다니……. 내 처지가 처량하네.”

“매번 그 소리네요, 정말.”

그는 항상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인 에이런시아의 밑에서 일했다고 말하곤 하는데 진실은 알 수 없다. 확실히 실력은 좋은 것 같지만……. 에이런시아의 수석 제자가 왜 제국보다 몇 배나 작은 왕국에 와서 이렇게 조그만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겠는가? 이 세계가 소설 속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질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네네, 알겠으니까 이거나 드세요.”

나는 오기 전에 집에서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건넸다. 미카엘라는 기분 좋게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 유리아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가 카운터에 앉았다. 카운터에는 로맨스 서적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엠마의 취미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님이 들어오지 않아서 나는 책을 보며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신기하네. 이 세계에도 빙의물이 있구나.”

엠마의 책 대다수는 평범했던 여주인공인 미움받는 악녀나 귀족 아가씨에게 빙의해서 주변인들에게 사랑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빙의물도 있는 걸 보면 차원 이동물이나 환생물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악녀의 사정」이라는 이름의 책을 순식간에 독파했다. 책을 덮고 고개를 들자 창 밖으로 하얀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와…….”

예쁘다.

아리아에 와서 보는 첫눈이었다. 번화가가 하얗게 칠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겨울이 왔다는 게 다시 한번 실감이 됐다.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을 때 문에 달린 종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어서 오세…… 어?”

입구를 돌아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면, 그곳에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곱슬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에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현실의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몸 전체에 두르고 있던 고운 옷감의 옷은 어디 갔는지 평민 같은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거대한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있었다. 밖을 걸어 다녔다는 것을 알리듯 머리와 어깨 위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다.

나는 그가 여기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어, 더듬더듬 항상 부르던 호칭을 내뱉어 본다.

“……도련님?”

“……안녕, 라일라.”

남자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젠 도련님이 아니야. 그냥……. 그냥 이즐리야.”

라고.

- 「도련님들 언니를 감금하실 건가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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