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68 (6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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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8

“맞아. 난 너희를 사랑하지 않아.”

공작은 가면을 벗어던지듯, 순식간에 미소를 지운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거니? 난 어미의 의무를 다하고 있어. 너희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적절한 교육을 받게 하고 가족으로서 친근히 대해줬단다. 그 이상은 해줄 수 없어.”

“……왜요?”

이즐리가 소리쳤다.

“어머니잖아요……. 어머니니까, 당연히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희를 사랑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맞는 거잖아요! 다들 그렇잖아요. 세상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너희를 사랑해줘야 한다고?”

공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한다.

“겨우 핏줄이 이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야 한단 말이니?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사랑하지 않는데.”

이즐리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마, 그 기분을 느낀 것은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물론, 낳자마자 자식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난 너희를 키우고 보아 온 몇 년 동안 사랑 그 비슷한 감정도 느낀 적이 없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도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절대 변하지 않겠지. 그래도 공작으로서 제대로 된 후계자를 키워내야 한다는 의무감 정도는 있단다.”

아서가 울먹거 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동안 왜 저흴 사랑하는 척 했어요……? 왜, 그렇게 상냥하게 대한 거예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유감이구나. 난 단지 에드워드가 원한대로 너희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주려고 했을 뿐이야.”

“차라리, 지금처럼 차갑게 대했더라면 어머니에게 사랑받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왜 괜한 희망을 품게 한 거예요?”

공작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희들의 생각은 잘 알았단다. 원한다면 이제부터는 솔직하게 너희를 대할게. 하지만…….”

붉은 눈이 형제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후회하지 않겠니? 다시 지금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동의한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좋은 부모 노릇을 하지 않을 거란다.”

오세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상관없어요. 거짓된 모습보다는 나으니까……!”

다들 동의하듯 입을 다물었다.

“너희가 선택한 거라는 걸 명심하렴.”

공작은 그렇게 말하곤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가 떠난 방 안에는 침묵이 돌았다. 그곳에서 아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오세스도 눈물을 흘렸다.

팔을 들어 눈을 마구 비벼도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순식간에 의무실은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모두가 울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즐리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울지 못했다. 눈가가 아릿하고 목구멍이 뜨거웠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깨진 심장 조각이 눈물샘을 찔러 망가뜨린 것처럼.

* * *

이즐리는 잠에서 깨자마자 작은 신음을 흘렸다.

‘평소에는 일어나면 다 잊어버리면서, 왜 이 꿈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거야……?’

좋지 않은 꿈을 꾼 탓인지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이즐리는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느끼며 땀을 닦아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곧바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물을 들이켰다. 바깥에 둔 지 오래된 물은 차갑지 않고 미지근해서, 정신을 차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즐리는 한숨을 쉬곤 옆에 있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기분이 나빠지기는 했지만 이즐리는 이 꿈을 통해 자신이 저택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난 아직도 어머니께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다. 이즐리는 공작의 생일이 다가올 때마다 대충 고른다고 하면서도 열심히 그녀의 마음에 들 만한 선물을 찾으려고 했고, 식사 자리에 공작이 보이지 않으면 아쉬워했으며, 누군가 어머니를 무시하는 말이라도 하면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에게 실망할까 봐 오베론을 죽이지도 못하지 않았나? 이처럼 마음속에 숨겨뒀던 미련은 표면으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단지 이즐리 자신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이즐리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즐리 에머스라는 인간은 참으로 멍청하게도, 아직까지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을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힘없는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저택을 나가게 되면 어머니가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않을까 봐, 금방 잊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떠나지 못하는 거였어. 황실 기사단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도 지금처럼 저택을 떠나는 게 무섭다는 이유로 거절했었지.’

이즐리는 문득 라일라가 한 말을 떠올렸다.

‘라일라는…… 내가 자기가 아니라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었어. 그때는 부정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 말도 틀린 게 없네.’

자신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이 마음을 어떻게 알아챈 것일까? 이즐리는 라일라에게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평생 저택을 떠나지 못한 채로 라일라를 그리워하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최소한 라일라와 만날 수 있더라면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떠나간 이를 그리며 말라가는 수밖에는.

그렇게 생각하자 라일라의 차가운 눈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앞으로도 저택을 떠나지 못하면 어쩌지?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만이 남았다. 그래서 이즐리는 공작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와 대면하면 이 감정을 해결하고 저택 밖으로 발을 디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즐리는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나갈 준비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때의 시간은 아침 식사가 막 끝나고 공작이 막 일을 시작했을 때였다. 이즐리는 머뭇거리다가 문에 노크를 했다. 그는 공작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무실 안에는 11년 전과 다름없이 공작과 그녀의 보좌관이 있었다. 공작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중요한 일인가?”

“네. 중요한 일이에요.”

“그럼 들어보도록 하지.”

그제야 공작은 서류를 내려놓고 이즐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차갑고 공허한 붉은 눈동자가 이즐리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는 보좌관을 물리고는 용건을 말해보라고 권했다. 이즐리는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어머니…… 궁금한 게 있어요.”

이즐리는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레 내뱉었다.

“어머니는 절…… 사랑하시나요?”

공작은 상대가 떠드는 말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커피를 홀짝였다. 이즐리는 그 모습에 어릴 때처럼 상처를 받고 말았다.

“……한 번이라도 사랑하신 적은 있나요?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는 건가요? 사랑스럽다는 생각이나 어떤 애틋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나요? 그때 이후로 벌써 11년이나 지났는데 그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나요?”

“이게 공자가 말한 중요한 일인가? 그리 가치 있는 대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

“제발 답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어떤 답을 원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저는 그저 어머니의 솔직한 대답이 듣고 싶을 뿐이에요.”

없다고 말한다면 이즐리는 가슴에 안고 있던 미련을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이즐리는 절대 저택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미련은 같잖은 희망으로 변질하여 또다시 사랑을 애원하게 될 것이다. 이즐리가 했던 걱정이 우습게도 공작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단호히 아니라고 답하지.”

공작이 커피 잔을 내려놓고 그 표면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쓸었다.

“나는 한 번도 널 사랑해본 적 없다. 그때 말했지 않았나? 시간이 얼마나 흐르건 너희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공자들에게 나의 피가 흐르건, 에드워드의 피가 흐르건 상관없어. 그건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유 그 자체가 되지 않으니까.”

난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희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에드워드 한 사람뿐이며 그 외의 사람은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매정한 말들이 지나간다. 공작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들은 사람의 심장을 꿰뚫는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다.

이즐리는 거대한 가시로 가슴이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고개를 떨궜다.

“……그래요. 그걸로 됐어요, 이제.”

공작의 차가운 말들은 심장과 함께 남아 있던 미련까지 산산조각 내주었다. 고통과 동시에 상쾌한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이즐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대신 고개를 들고 웃을수 있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어머니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게 됐어요.”

그때, 뜨거운 무언가가 이즐리의 얼굴선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깜짝 놀라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11년 전 이후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었다.

울고 싶을 때는 나오지 않던 눈물이 모든 걸 포기하고 나오다니, 이렇게 모순적일 수가 없다. 그동안 흘리지 못한 만큼 나오려는 것인지 혹은 11년 전 울지 못했던 어린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나오는 것인지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그것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결국 이즐리는 눈물을 닦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말을 이었다.

“……전 어머니를 사랑했어요. 줄곧 당신의 사랑을 원했어요. 제게 눈길도 주지 않는 당신의 관심을 받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했죠.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어요. 제 노력이 어머니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 시간들은 더 최악으로 변했죠.”

공작은 흥미 없는 얼굴로 이즐리를 응시한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건 지옥 같았지만, 그래도 모든 순간이 끔찍했던 아니에요.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어요. 칭찬을 받았을 때나 걱정의 말을 들었을 때,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을 때, 당신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오던 그 모든 순간이 가슴이 벅차게 만들곤 했어요. 사랑을 하는 건 이 세상 어떤 일보다 끔찍하지만 또 그만큼 행복해요.”

이즐리는 잠시 말을 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말이에요. 저택을 나갈 거예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이제부터는 어머니 아들로도, 귀족으로도 살지 않을 거예요.”

이즐리는 라일라를 만나기 전에 그녀가 두려워하던 것을 모두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귀족이라는 지위도, 쓸데없이 강하기만 힘도 모두.

“그렇게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서 새로운 사랑을 할 거예요. 이번에는 그 사랑을 위해 노력할 거예요.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던 지난 시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이 사랑만큼은 지옥이 되지 않도록 할 거예요.”

공작은 이즐리의 이야기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이젠 저 얼굴에, 저 눈에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을 것이다. 이즐리는 꾸벅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자신이 노력한다고 해도 라일라의 마음을 얻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무시당하고 거절당할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쉽게 얻어내지 못하는 법이니까. 노력을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뤄진다면, 세상에 슬픈 사랑 이야기 따위는 없을 것이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이즐리는 혹여나 라일라에게 거절당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상대에게 사랑받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고, 열정을 불태우고 애를 써도 거절당한다면 최소한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을 테니까. 그때가 되면 웃으면서 떠나 줄 수 있을 것이다.

라일라에게 거절당해도 웃으며 떠나 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이즐리는 자신이 저택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택을 떠나고 싶던 이유는 라일라를 만나고 싶어서였지만 한편으로 다른 마음도 있었다. 이즐리는 바뀌고 싶었다. 어머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다. 새롭게 변하고 싶었다.

혹시 모른다. 이미 변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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