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67 (6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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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7

공작은 항상 바빴지만 형제들을 위해 시간을 내주는 일이 많았다.

서재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지거나 지금처럼 셋이서 함께 정원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티 타임을 가지곤 했다. 티 타임이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서 홍차를 마시는 이는 없었으니까. 다들 갓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그에 어울리는 디저트를 먹었다. 이즐리는 쓴 커피보다는 달달한 에이드나 주스를 더 좋아했지만 공작을 따라 커피를 들이켰다.

“써…….”

그는 컵에서 입을 떼고 혀를 쭉 내밀었다.

‘아서랑 오세스는 어떻게 저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거지? 이해가 안 돼.’

이즐리는 억지로 커피를 마시려고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각설탕을 우수수 쏟아 넣었다. 그 모습을 본 공작이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귀여운 걸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못 먹겠으면 다른 걸 마시지 그러니?”

“네? 아니에요! 저 커피 좋아해요.”

“그래?”

“그냥…… 달게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아서…….”

사실은 싫어해요. 그냥, 어머니랑 같은 걸 마시고 싶었어요.

공작과 눈이 마주친 이즐리는 헤실헤실 웃다가 표정을 굳혔다. 이즐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카스텔라를 맛있게 먹는 시늉을 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함께 식사를 하고,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번화가에서 물건을 구매하고……. 잔잔한 일상이 계속되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비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는 날이었다. 오후 네 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늘에 잔뜩 낀 구름 탓에 세상은 옅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이즐리와 오세스는 응접실에서 한창 체스를 두고 있었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검은색 말을 움직인 오세스가 “체크메이트”라는 단어를 내뱉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서가 좀 늦는 것 같지 않아? 마탑이랑 저택이 그렇게 멀진 않을 텐데.”

“몰라! 돌아오는 길에 딴짓이라도 하나 보지, 뭐. 괜히 딴소리하지 말고 얼른 다시 해!”

이즐리는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런가?”

오세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체스판 위를 정리했다.

그날은 참 이상하게도 잠깐 마탑에 다녀온다고 했던 아서가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마탑과 에머스 영지와의 거리는 왕복해서 다섯 시간 정도 걸렸다. 아서는 아침 여덟 시쯤에 나갔으니 돌아와도 한참 전에 돌아와야 했다.

두 사람이 이변을 느낀 것은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질 때였다. 이즐리와 아서는 방에서 나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현관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문이 활짝 열려 비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문을 등진 채 피투성이의 남자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풀잎과 흙, 피로 엉망이 되어 있는 남자의 품 안에 아서가 있었다. 이즐리는 처음에 그것이 아서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붉은색 자루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내 그 자루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즐리는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뒤로 물러나다 휘청거리는 이즐리를 오세스가 붙잡았다.

“혀엉…….”

이즐리는 엉엉 울면서 현관문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 아서가…….”

“괜찮아.”

그는 침착한 얼굴을 가장한 채 이즐리를 안심시켜주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그렇게 말했지만, 오세스의 몸은 마구 떨리고 있었다.

아서가 그렇게 된 것은 전부 비 때문이었다. 돌아오던 중 그만 마차가 빗길에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마차는 절벽 아래로 추락해 산산조각 났다.

그 과정에서 마부는 사망했고 하인만 겨우 살아남아 아이를 데리고 왔다.

모두가 정신없이 허둥지둥하는 사이 집사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는 아서를 의무실로 옮기고 의사와 함께 신전의 사제를 불렀다. 아서의 상태는 의사의 진료나 포션으로 치료할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이즐리가 할 수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동생이 누운 침대 옆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 밖에는.

이즐리는 오세스에게 기댄 채로 아서가 사제의 치료를 받는 것을 바라봤다. 사제의 손에서 발하는 하얀 빛을 맞을수록 아서의 상태는 점점 좋아졌다. 이윽고 아서가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이 되었다. 아서는 눈을 뜨자마자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어머니…… 어머니는……?"

그때부터 아서는 계속해서 어머니를 찾았다. 사제가 회복을 위해서는 자는 편이 좋다고 말해도 아서는 몽롱하게 뜨인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어머니만 부를 뿐이다. 이즐리는 그런 형제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집사가 급하게 마법 도구를 이용해 아침 일찍 황궁으로 간 공작에게 연락을 했지만,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인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즐리가 어쩔 줄 모르고 가쁜 숨만 내쉬고 있자 오세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서의 손을 꽉 그러 쥐었다.

“괜찮아, 아서. 어머니는 곧 오실 거야…… 아까 전에 네 상태를 듣고 빨리 오겠다고 연락을 주셨어.”

“……진짜?”

“응, 진짜.”

그제야 아서는 안심한 듯 잠이 들었다.

이즐리는 오세스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정말이야? 어머니가 그러셨어……? 연락이 안 되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

오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없었어. 그냥 지어낸 것뿐이야. 이렇게라도 안 하면……. 아서가 안심하지 못할 거 아니야.”

“아…….”

이즐리는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들어있는 아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핼쑥한 동생의 얼굴을 보며 안타까움과 함께 손위 형제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다.

“내가, 내가 황궁에 가서 어머니를 데려올게. 아서의 상태를 아시면 얼른 오실 거야!”

그래서 그런 말을 하곤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뒤에서 오세스가 어머니가 일하시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소리쳤지만 이즐리는 못 들은 체했다. 그는 자신을 말리는 고용인들에게 억지를 부리며 마차에 올라탔다. 집사가 무력까지 사용하며 이즐리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들은 호위 기사와 하인 한 명을 동행하는 조건으로 이즐리를 황궁으로 보내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마차 밖으로 뛰쳐나온 아이는 황궁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에게 달라고 들여보내 달라고 재촉했다.

기사는 이즐리가 타고 온 마차에 그려진 가문의 문양을 보곤 황궁 안으로 인도했다.

이즐리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황궁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도중, 한 건물에서 나오는 에머스 공작을 발견하고 버럭 소리쳤다.

“어머니……!”

“쉿, 이지. 여기는 황궁이란다. 조용히 해야지 착한 아이지.”

이즐리는 쏜살같이 공작에게 달려갔다. 공작은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니?”

이즐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곤 입을 열었다.

“왜 연락을 안 받으셨어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었어. 폐하와 함께 정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연락을 받을 시간이 없었단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니?”

“어머니 빨리 저택으로 가야 해요! 아서가 크게 다쳤어요……! 마탑에 갔다가, 저택에 돌아오는 도중에 마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공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서가 죽기라도 했니?”

“네……? 아, 아니요. 죽을 뻔할 정도로 위험하기는 했지만, 신전의 사제님께서 와주셔서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그럼 굳이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지 않니?”

“하, 하지만…… 아서가 다쳐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요……? 마차가 부서지고……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지고…….”

뭐지?

“그리고…… 계속해서 어머니를 찾았어요…….”

왜 저렇게…….

“계속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지?

이즐리는 은은한 미소를 띤 공작의 얼굴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진짜 얼굴이 아닌 느낌이었다. 저 가면 같은 얼굴을 벗기면 그 뒷면에 무언가 있을듯한……. 이즐리는 재빨리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가면이라니……!’

아이는 실은 종종 제 어미에게서 지금과 비슷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 심했던 적은 없었다. 이즐리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떤 말을 하건 지금과 똑같이 “왜 그래야 하냐?”라고 물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공작은 자신이 나왔던 건물을 힐끔 쳐다보곤 이즐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구나. 그럼 일도 끝났으니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 보도록 할까? 같이 가자꾸나.”

이즐리는 앞서 나가는 공작을 따라 황궁을 벗어났다.

그는 공작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마차 안에서 공작은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자식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초조하거나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없었다.

담담한 태도로 자신이 가지고 온 책을 읽고 있을 뿐이다. 이즐리는 애써 그 모습을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꾸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택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바로 의무실로 향했다. 공작이 들어오자 아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서는 기쁜 얼굴로 어머니를 맞이했다. 공작은 아이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어주고는 형식적으로 느껴지는 걱정의 말을 내뱉었다.

그 후 곧바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이즐리가 다쳤을 때도 공작은 똑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손을 잡아주고 걱정의 말을 내뱉은 후 바로 뒤를 돌았다. 그때, 이즐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로 속상하고 서운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어갔었다. 어머니도 마음속 깊이 자신의 걱정을 하고 있지만 공작의 위엄 때문에 쉽게 그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단순히 큰 부상을 당한 것뿐이지만 아서는, 아서는 죽을 뻔했잖아……! 그런데도 저런단 말이야?’ 

이즐리는 공작의 뒷모습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너무하세요…….”

공작은 문을 열다 말고 뒤를 돌았다.

“그저 걱정스럽다고 말하기만 하면 끝인가요? 죽을 뻔한 자식을 그렇게 대하는 건 이상해요. 좀 더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울면서 걱정했다고,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고 안아줘야 하는 거잖아요. 어머니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아서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 같아요.”

이즐리는 오랫동안 속으로 생각한 말을 꺼내놓았다.

“저번에 제가 크게 다쳤을때도, 어렸을 때 오세스가 2층에서 떨어졌을 때도 어머니는 똑같이 행동하셨죠. 어머니는 아서를, 저희를 사랑하기는 하나요?”

“이즐리 너 왜 그래…….”

그만해. 그렇게 예의 없게 굴면 어머니가 화내실 거야.

아서는 겁먹은 얼굴로 이즐리의 손목을 붙잡았고 오세스는 입을 꾹 다문채 공작을 지켜보았다.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렇고말고. 나는 너희를 사랑한단다.”

“사랑한다고요?”

거짓말! 이즐리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항상 궁금했어요.”

그때 오세스가 공작과 시선을 마주한 채로 말했다.

“사랑한다면 왜 항상,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저희를 바라보는 거죠?”

형제들은 언제나 그녀의 눈에는 깊은 공허를 느꼈다. 자식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다. 애정도, 분노도, 슬픔도, 애틋함도……. 감정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없다.

“왜 어머니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건가요?”

공작은 언제나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가치도 쓸모도 없는 돌멩이를 보는 것처럼 사람을 내려다보곤 한다.

공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형제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그녀가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더 노력하고, 더 질투하고, 더 애를 쓴다.

코피가 날 때까지 공부를 하고 쓰러질 때까지 검술 연습을 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웃어 보인다. 그렇게 가치도 의미도 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미련하고 멍청하며 어리석게.

“역시…….”

아이들의 말을 들은 공작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린아이는 귀찮구나. 에드워드가 아이를 원하지 않았더라면 너희를 낳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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