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66
꿈속의 이즐리는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
아직 햇볕에 타지 않은 피부는 하얗고 굳은살이 박인 손발은 아담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은 짧게 잘려 있어 동그란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제 나이에 어울리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덩치만은 그렇지 못했다.
앉은키에서 볼 수 있듯이 아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히 컸다. 키는 벌써140cm를 훌쩍 넘었고 몸집도 큰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소년을 처음 본 사람들은 본래의 나이보다 서너 살 정도는 더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들이 어떻게 보든 이즐리에게는 일곱 살 특유의 순진무구함이 있었다.
이즐리는 방바닥에 깔린 카펫 위에 앉아서 새로 산 목검을 만지작거렸다.
짙은 회갈색을 띠고 있는 검은 그 비싸디 비싸다는 호크스 나무를 베어 만든 것으로 검술 대회를 위해 특별히 구매한 물건이었다. 아이는 검을 번쩍 든 채로 눈을 빛냈다.
“이번에 열리는 검술 대회에서 1등을 해야지. 그리고 어머니께 우승 소식을 들려 드릴 거야. 어머니가…… 칭찬해주시겠지?”
칭찬……. 이 얼마나 달콤한 단어란 말인가! 입안에 사탕을 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상상하며 웃었다. 굳은살이 촘촘히 박인 손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다 떨어지면 이즐리는 고개를 든다. 그러면 바로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와 밤하늘을 담아놓은 것 같은 검은 머리카락,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기다란 속눈썹,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붉은 입술. 그녀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을 한 채 붉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한다.
그래, 그 차가운 눈으로…….
“아…….”
이즐리는 깜짝 놀라 퍼뜩 눈을 떴다. 그리고 끔찍한 상상을 잊으려고 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좌우로 마구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럴 때가 아니야! 연습하자!”
이즐리는 연무장에 갈 생각으로 얼른 방 밖으로 나섰다. 2층에서 바로 현관으로 통하는 기다란 계단을 통해 내려가려고 할 때…….
……퍽!
“……어?”
누군가 이즐리의 등을 밀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이즐리는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한 채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을 느꼈다. 분명 허공을 부유하는 시간은 찰나였겠지만 이즐리에게는 아주 길게 느껴졌다.
‘나…… 지금 떨어지고 있는 건가?’
이즐리는 멍한 얼굴로 계단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의 형인, 오세스가 있었다. 두 손을 쭉 뻗은 채 계단으로 추락하는 동생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는 죄책감, 공포와 함께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뒤엉켜 있었다.
이즐리가 자신을 밀친 범인을 알게 되었을 때, 커다란 충격이 그의 몸을 덮쳤다. 단단한 나무 기둥에 묶인 채 수백, 수천 개의 돌을 맞는 것 같은 고통이 온몸을 후려쳤다. 이즐리는 계단을 구르다가 1층에 떨어졌다.
“꺅! 도, 도련님이……!”
누군가의 비명 소리를 마지막으로…….
‘아파…….’
이즐리의 세상은 새까맣게 변했다.
장미 저택에는 언제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밖에서는 철혈의 공작이라 불리었지만 자식들에게만은 상냥한 모습을 보이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따르는 아이들.
병약한 아버지의 이른 죽음이라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행복에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네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에머스 가의 이면을 알지 못했다. 형제들은 겉으로 사이좋은 척할 뿐 속으로는 서로를 질투하고 견제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솔직히 사이좋은 모습이 모두 가짜라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형제들은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꼈으나 그 감정은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니 검술 대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형제의 다리를 부러뜨려버리고, 가정교사와의 수업이 있는 전날 책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열심히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불태우며, 어둡고 좁은 창고에 가둬버리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던 것이다.
형제들은 무슨 짓을 하든 거리낌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오세스였다.
그는 형제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검술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즐리나 천재라고 소문난 아서에 비해서 자신이 덜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길 능력이 되지 않았으니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깎아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울면서 질투의 마음을 토로하던 것은 아직도 이즐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왜 나랑 아서가 부럽다고 말했던 걸까?’
이즐리는 오히려 오세스가 부러웠다. 대부분의 귀족은 첫째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것은 에머스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세스가 태어나자마자 차기 공작으로 임명했다. 앞으로 후계자가 뒤바뀌는 일은 절대 없다고 단호히 이야기하면서. 공작은 후계자인 오세스에게 다른 아이들보다 더 관심을 가졌고 가끔 일을 얼마나 배웠는지 직접 확인을 했다.
검이나 마법, 공부 같은 것은 얼마든지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는 시기를 고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도 첫째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공부하는 건 싫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더 관심을 가져주셨을거야.’
심지어 오세스는 형제 중 가장 많이 부친을 닮았다. 갈색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눈매는 공작의 방 안에 걸려있는 남자의 그림과 기분 나쁠 정도로 똑같았다.
‘어머니는 원래 정략결혼을 하실 생각이라고 하셨어. 아이도 후계자가 될 자식 하나만 낳을 생각이었고…….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그 생각을 모조리 깨버린 거야. 오세스는 그 남자를 닮았으면서 왜 자신이 축복받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이즐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목발을 짚었다. 하인이 부축해드리겠다는 말을 거절하며 식당으로 발을 옮겼다.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 탓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편했다. 식당 앞에 도착하자 하인이 문을 열었다. 식탁의 상석에는 공작이 앉아 있었고 좌우에 아서와 오세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서 오렴, 이지.”
공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이즐리를 맞이해주었다.
“네,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니를 본 소년은 가슴이 한껏 들뜨는 것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즐리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해질 수 있었다.
공작은 가볍게 아이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말을 내뱉었고 이즐리는 아직 다리가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애써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녀가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다친 자신을 걱정해주길 바라서 일부러 다리를 치료하지 않았다. 항상 이런 모순적이고 상반된 마음이 이즐리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즐리가 절뚝거리며 아서 옆자리에 앉자 곧바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게살 수프와 에그 스크램블, 그밖에 아침으로 먹기 좋은 가벼운 음식들이 나왔다.
이즐리는 스크램블을 먹다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대각선 쪽에 앉은 오세스가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이즐리는 검술 대회에 나가지 못한 일은 속상했지만 오세스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른 형제들보다 자신이 더 사랑받고 싶고, 어머니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싶은 그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이즐리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에, 형제들이 저지른 일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일은 없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일도 이즐리의 실수로 일단락되었다.
……쿵!
그때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즐리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아서가 식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이마를 식탁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그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자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주변에 있던 고용인들이 깜짝 놀라 아서에게 달려갔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세게 부딪히셨나 봐요. 피가 나세요!”
“빨리 의사를 불러와! 피가 계속 나시잖아!”
“괜찮아요…….”
아서는 소매로 코를 막고는 웅얼거렸다.
“……별거 아닙니다. 요새 피곤해서 이런 것 같아요.”
아서가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공작은 그에게 마탑 출신의 교사를 하나 붙여주었다. 아서가 그의 밑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자 공작은 작은 상을 내리며 칭찬을 해주었다. 그때 이후 아서는 그리 큰 흥미를 보이지 않던 마법을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방에는 마법과 관련된 서적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처음 보는 공식을 그린 종이가 벽면에 가득히 붙었다. 그 열정은 교사 또한 혀를 내두를게 할 정도였다.
공작은 냅킨으로 입을 가볍게 두드리곤 말했다.
“마법 공부 때문에 그러는 거지?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걱정되니 너무 무리하지 말렴.”
“네……. 알겠습니다.”
아서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걱정받아서 좋은 모양이지?’
이즐리는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 반, 질투하는 마음 반으로 툭 내뱉었다.
“맞아. 괜히 무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꼴까닥, 하고 죽어버릴 걸? 제대로 잠 좀 자! 바보야.”
“바보라고? 이즐리 너야말로……!”
아서는 짜증을 꾹 참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형님이야말로 잘하시죠? 저번에 자기 체력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한 탓에 혼절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누구보고 바보라고 하는 건지.”
“뭐야. 그건 한 달도 더 된 이야기잖아! 옛날 일을 끌고 오지 마.”
작은 다툼 이후 즐거운 식사시간이 시작되었다. 이즐리는 평소처럼 있는 말, 없는 말을 지어내며 재밌는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시중을 위해 서 있던 고용인들은 즐거운 듯 그 이야기를 들었고 공작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던 아서는 오늘 어떤 공부를 했는지, 어떤 성취를 이뤄냈는지에 대해 털어놓았다. 아서는 말을 지어내는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이즐리가 생각하기에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항상 그들의 말에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주곤 하던 오세스는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이즐리는 형이 신경 쓰여서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식사가 끝나고 식당에서 벗어날 때, 오세스가 황급히 이즐리를 붙잡았다.
이즐리는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형?”
“미안해……“
오세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조심스레 소매를 잡아당겼다.
“내가 그때 미쳤었나 봐. 난, 나는…… 네가 그렇게 심하게 다칠 줄 몰랐어. 정말이야……! 그냥…… 아주 살짝 다치길 바랐던 건데…….”
이즐리는 가만히 자신을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오세스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오세스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손톱으로 손을 마구 긁어내리는 버릇이 있었다. 보통은 빨갛게 부어오르기만 했지만 심할 때면 피가 나서 붕대를 감아놓고는 했다. 자신을 다치게 만든 사람을 걱정하는 게 우습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즐리는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뭐 어때. 남을 걱정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이즐리는 오세스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고는 웃어 보였다.
“난 괜찮아.”
하지만 오세스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