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65 (6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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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65

    새벽 일찍 일어난 이즐리는 평소와 달리 연무장으로 나가지 않았다. 문밖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리는 장미모양 팻말을 걸어 놓고는 침대에 도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아침 아홉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즐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가로 시선을 옮겼다. 옅은 금발 머리의 소녀가 청소 도구를 가지고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물이 채워진 양동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하녀는 이즐리를 발견하자 깜짝 놀라며 입을 벌렸다.

    “아……! 계셨나요? 팻말이 걸려 있어서 없으신 줄 알았어요.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됐나요? 나갈까요?”

    “……아니야. 들어와.”

    이즐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 끝부분에 앉았다.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라일라가 들어올 리가 없잖아. 그 아이는 이미 떠났으니까…….’

    그는 멍하니 새로 임명된 하녀가 청소를 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즐리는 방이 깨끗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라일라가 처음으로 이 방에 들어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당시 라일라는 팻말이 없다는 게 방이 비어 있다는 의미라고 착각한 모양인지 방 안으로 들어와서 주변을 쭉 둘러보고 있었다. 가구와 장식구를 들었다 놨다 구경하며 작게 감탄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이즐리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침대에 가까이 다가올 때 이불을 홱 걷어내자…….

    “……악!”

    라일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즐리는 웃었고 라일라는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고용인들은 보통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실례가 되는 일이기도 하고, 고용주의 불편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일라는 얼굴에 짜증을 그대로 드러낸 것도 모자라서 그를 향해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며 당돌하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처음에 이즐리는 그런 라일라에게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잠깐, 특이하다고, 반응이 웃기다고 생각했던 게 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은 점점 바뀌었다. 특이한 아이는 재밌는 아이가 되었고, 재밌는 아이는 마음에 드는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아이는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이즐리는 라일라가 좋았다.

    세상에 무슨 기분 좋은 일이 그리도 많은 건지 자주 생글생글 잘 웃던 소녀는 붙임성이 좋았고 귀족인 자신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장난을 치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청소를 하며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났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재잘거릴 때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요새 사이가 나쁜 소녀의 이야기, 언니의 이야기, 좋아하는 음식의 이야기, 새 옷을 사고 싶다는 이야기.

    즐거웠다. 이즐리는 라일라와 함께 있는 시간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라일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식사를 하러 가거나 검술 연습을 하지 않고 일부러 방 안에 남아 있을 때도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항상 붉게 칠해져 있는 뺨을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붉은색은 딱 질색인데도.

    “하아…….”

    최악이다. 이즐리는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꾸만 라일라가 생각나는 탓에 이곳에 있는 것이 괴로워졌다. 기분이 축 처지고 눈가가 뜨거워진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온 시간은 아홉 시가 넘었을 때였다. 한창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그는 배를 조이는 허기를 느끼고 식당으로 향했다. 이즐리의 모습을 발견한 하인은 재빨리 식당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즐리는 안으로 발을 들였다. 커다란 식탁에는 두 명의 사람이 앉아있었다. 하나는 아서 에머스였고, 다른 하나는 오세스 에머스였다. 상석은 비어 있었다. 오늘도 공작은 식사 자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기대도 안 했어.’

    쓸데없이 식당까지 와서 식사를 하는 것보다는 방이나 집무실에서 혼자 먹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니까. 이즐리는 조소를 흘리곤 아서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하녀가 앞에 놓아준 오믈렛을 잘라서 입에 넣었다.

    ‘맛없어…….’

    이즐리는 냅킨에 음식을 뱉었다. 그는 평소에 오믈렛을 즐겨 먹는 편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계란으로 만든 요리는 다 좋아했다. 정말 좋아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맛이 없게 느껴졌다. 라일라가 떠난 이후로 이즐리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낀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물로 입을 헹궜다. 그 모습을 본 아서가 걱정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왜 더 안 먹어?”

    “입맛이 없어.”

    “요새 왜 이러는 거야? 또 그 하녀 때문이야?”

    그 하녀……. 라일라를 말하는 것이다. 남의 입에서 떠난 이의 언급을 듣자 이즐리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만하고 잊어버려.”

    아서의 말 뒤로 음식을 삼킨 오세스가 몇 마디 덧붙였다.

    “그래요, 잊어요. 어차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하녀 아닌가요? 한 달 겨우 됐을 뿐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밀접한 감정적 교류라도 있었던 것처럼 구는 건 좀 이상하네요. 아서의 말대로 그만 잊어버려요.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굴지 말고요.”

    “……내가 이상하다고?”

    이즐리는 그 말이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매서운 눈초리로 오세스를 째려보았다. 형제 중 가장 에머스 공작을 닮은 이즐리는 제 모친과 똑같이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웃는 얼굴을 지워 내면 보는 사람이 흠칫 놀랄 정도로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곤 했다. 그러나 그 시선을 온전히 받아내는 오세스는 별 느낌이 없는 사람처럼 담담히 음식을 먹을 뿐이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너희 둘이잖아. 두 사람 다 라일라에게 호감이 있지 않았어? 그런데 왜 그 아이가 떠났는데 슬퍼하지 않아? 왜 별거 아닌 것처럼 구는 건데? 둘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마치 라일라에게 아무 관심도 없던 사람들 같아.”

    처음에 이즐리는 두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서와 오세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갑자기 태도가 확 바뀌는 거야 말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이즐리의 말에 아서는 곤란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고 오세스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답하라는 이즐리의 재촉에 냅킨으로 입을 닦고 말했다.

    “네 맞아요. 관심 있었죠. 그런데…… 라일라가 저택을 떠나도 별 느낌이 없더라고요.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관심이었나 봐요.”

    “그럼 왜……!”

    누명을 씌워서 지하 감옥에 가둬버린 건데? 왜 그렇게까지 한 건데!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말이 있었으나 이즐리는 차마 그것들을 꺼내놓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공작이 묻어버린 사건을 언급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라이 자식…….”

    그래서 그는 욕설을 내뱉은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식당을 벗어난 이즐리가 향한 곳은 서재였다. 딱히 목적지를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감정을 가라앉힐 겸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이었다.

    서재에 도착한 이즐리는 자신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라일라와의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를 그리워하다 보니 저절로 서재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오래된 책의 냄새가 나는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즐리는 손으로 책을 부드럽게 쓸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 보니 라일라랑 처음으로 같이 서재에 왔을 때 바보 같은 짓을 했었지.’

    그때, 이즐리는 한눈에 라일라가 서재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를 데리고 서재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직접 구경시켜준다는 말을 꺼내는 것이 부끄러워서 괜히 술래잡기를 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그녀가 숨을 곳을 찾으면서 서재를 쭉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만큼 바보 같은 행동도 없으리라.

    ‘그럼 같이 구경할래? 그 말 한마디가 뭐가 어렵다고 그렇게 굴었을까.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그러지 않을 텐데.’

    라일라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솟아났다. 이즐리는 울고 싶었지만 울지는 못했다.

    그저 자리에서 멈춰 서서 제 손을 내려다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날……’

    굳은살이 못처럼 박여 있는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라일라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어…….’

    이즐리는 할 수만 있다면 영영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채로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자신을 미워해도 상관없으니까 계속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무섭다고, 제발 그만해달라고 말하는 사람을 놔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일라는 언제부터 날 무서워하게 된 걸까. 내 어떤 면에서 니고르 백작의 모습을 본 걸까. 내가 좀 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떠나지 않았을까? 나를…… 조금이나마 좋게 생각해줬을까?’

    조금만 라일라에 대한 마음이 약했더라면, 그녀가 하는 말들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이기적으로 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즐리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들었다.

    창밖에 붉은 노을이 비치고 있었다.

    이즐리는 노을이 질 때가 싫었다.

    공작의 눈을 닮은 차갑고 시린 붉은색으로 온 세상이 칠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 부정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라일라의 붉은 뺨을 닮은 따뜻한 붉은색이 그 어느 것보다 사랑스럽고, 가슴이 저릴 정도로 그립게 느껴졌다.

    이즐리는 저 빛에 닿을까 싶어 창밖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붉은빛은 손바닥을 잠깐 스칠 뿐 절대 잡히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은 결국엔 잡히지 않았다.

    서재에 어둠이 내려앉자 이즐리는 정원 가까운 곳에 있는 복도를 통해 방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라일라가 자주 청소하던 장소였다. 텅 빈 복도를 본 이즐리는 다시 한번 그녀가 떠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방에 도착한 그는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이즐리는 라일라를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디 가는지 말도 없이 떠났지만, 정보 길드를 통해 수소문하다 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럴 돈도, 시간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난 라일라가 또다시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이즐리는 라일라를 만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살아왔던 저택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그렇게 좋은 추억도 없는 장소를 벗어나는 것뿐인데, 겨우 그것뿐인데 무엇이 그리도 공포스러운지 알 수 없다.

    ‘언제 이렇게 겁쟁이가 되어버린 거지?’

    어렸을 때, 이즐리는 이것보다 몇 배는 더 용기 있었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것도, 사랑해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도, 겨우 쌓아놓은 자존심이 무너지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조차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랬을 때가 있었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이즐리는 변해버린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면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날 이즐리는 꿈을 꿨다.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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