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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4 (6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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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64

    “어때? 놀랐지? 감동했지? 너 가기 전에 송별회 하기로 했었잖아. 기왕 하는 거 서프라이즈로 준비해봤어.”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에이미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것 같다. 요새 정신이 없어서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흘러가듯 지나갔던 이야기를 이렇게 기억해주다니,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진다.

    “다들 고마워. 그리고…….”

    나는 유리아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부드러운 뺨이 내 손에서 쭈욱 늘어났다.

    “아야……!”

    “유리아, 너. 갑자기 사라져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심장이 떨어질 뻔했어, 정말로. 에이미가 늦게 찾아왔었다면 울어버렸을지도 모르지. 내 마음을 모르는 유리아는 그저 해맑게 웃고 있다. 그 모습이 괘씸해서 다시 한번 볼을 늘려주었다. 그녀는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나도 원래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놀라게 해 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라라 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고…….”

    “언제부터 계획한 거야?”

    “유리아는 오늘 막 알았어. 우리끼리 송별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들켜버렸지 뭐야. 원래는 유리아도 너랑 같이 놀랐어야 했는데.”

    비앙카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대강 웃어주다가 한 소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 한쪽에 서 있던 금발의 소녀는 모임의 목적과 어울리지 않는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레몬은 왜 여기 있어?”

    레몬. 그녀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멤버였다.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누가 협박을 하지 않는 이상 그녀가 이 송별회에 참석할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레몬을 강제로 초대할 사람도 없겠지만. 그녀가 참석한 이유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아해질 뿐이다.

    내 말에 민망함을 느꼈는지, 레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였다. 이젠 레몬이 아니라 애플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마리가 총총 다가와서 내게 귓속말을 했다.

    “나, 나도 모르겠어……. 어디서 우리가 송별회를 계획하는 걸 들었는지, 갑자기 찾아와서 자기도 끼워달라고 하더라고.”

    레몬이 직접 참석하겠다고 말했다고? 이건 정말 의외였다.

    “억지를 부려대니 어쩔 수 없이 데려왔어……! 왜 온 건지는 아무도 몰라. 너한테 마지막으로 복수를 하려고 온 건 아닐까……? 네 눈을 밤탱이로 만들려고……? 힉! 무서워……!”

    모양만 귓속말이지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컸다. 마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레몬이 눈을 매섭게 치뜨며 빽 소리를 질렀다.

    “뭐! 왜! 내가 여기 있는 게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직접 말하든가! 짜증 나게 쥐새끼처럼 소곤거리지 말고!”

    “지금은 밤이잖아……! 조용히 해야지.”

    주변 사람들이 레몬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손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화를 냈다.

    “불만 있으면 나한테 직접 말하라, 읍!”

    “쉬잇.”

    나는 얼른 레몬에게 다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불만 없어. 네가 송별회에 참여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조금 놀랐을 뿐이지. 이렇게 와줘서 기쁘네. 고마워.”

    딱히 기쁜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레몬에게 큰 악감정은 없다.

    나보다 한참은 어린아이한테 화낼 만큼 유치한 사람도 아니고, 저번에 유리아에게 못되게 굴었던 건에 관해서는 사과를 받아냈으니 꺼려질 것도 없었다. 내가 뒤끝이 심한 사람이었다면 쫓아내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흥.”

    레몬은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다가 홱 손을 떼 버렸다. 또 난리를 피울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입을 꾹 다문채 침대로 걸어가서 얌전히 앉았다.

    작은 소란이 가라앉자 에이미가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른 촛불을 끄라며 나와 유리아에게 케이크를 들이밀었다. 크림이 덕지덕지 발린 케이크 위에는 쿠키와 초콜릿이 꽂혀 있었다. 먹음직스럽기보다는 엉성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디저트였다. 기성품은 아닌 것 같은 모양새다.

    나는 에이미에게 물었다.

    “이거 혹시 수제야?”

    “어? 어떻게 알았어?”

    에이미는 다 같이 돈을 모아 재료를 사고 케이크를 만들었다고 말해주었다.

    역시 그렇구나. 기성품을 사와도 감동했겠지만, 수제 케이크라고 하니 더 감동을 받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후 입으로 초를 껐다. 이후부터는 먹는 시간이었다. 케이크를 잘라서 덜어 먹고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깨물어 먹고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 사람들과 식사를 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작은 미니 게임을 즐겼다. 처음 레몬은 쭈뼛쭈뼛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사춘기 소녀에게는 고된 일일 것이다. 이러다가 소외당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금세 적응해서 아이들과 즐겁게 놀았다.

    새벽 두 시경이 되자 에밀리 아주머니와 에이미, 비앙카는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 또다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마리의 허락을 받아 그녀의 방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마리의 룸메이트였던 하녀는 송별회를 위해 다른 방으로 비켜준 상태라서, 두 개의 침대를 사용할 수 있었다. 왼쪽 침대에는 유리아와 마리가, 반대쪽 침대에는 나와 레몬이 누웠다. 본래는 유리아와 함께 누울 생각이었지만 마리가 워낙 레몬을 꺼리는 탓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던 마리와 유리아는 금세 잠들었다. 두 사람이 꿈의 세계에 빠져들자 방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어둡고 조그만 방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 고요함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나는 마리와 유리아에게 “잘 자”라고 속삭여준 후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몬은 등을 돌린 채 누워있었다. 나와 닿는 것이 싫은지 벽에 바싹 붙어 있다. 저렇게 나를 기피하면서 송별회에 참석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생각으로 어색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던 걸까?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레몬에게 말을 걸었다.

    “자?”

    레몬은 조용히 말했다.

    “……아니.”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될까?”

    “뭔데?”

    “오늘 왜 여기에 온 거야? 네가 참석한 게 싫다는 건 아니고, 단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잖아.”

    “몰라. 그냥…….”

    레몬은 말을 흐렸다.

    “그냥?”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레몬의 뒤통수를 힐끔 바라보았다. 금세 잠들어버린 걸까? 아니면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걸까? 어떤 이유이건 갑자기 끊어진 대화가 더 이어질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그만두는 수밖에는. 억지로 물어볼 정도로 궁금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잘 준비를 했다.

    “그냥, 네가 떠난다고 하니까 아쉬웠어.”

    눈을 감고 꿈의 세계로 들어가려던 찰나, 레몬이 입을 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평소에는 지지리도 보기 싫은 얼굴이었는데 눈앞에 아른거리기까지 하더라고. 그래서 여기 온 거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널 보려고. 이상하지? 매일같이 싸우다가 갑자기 친한척하니까.”

    “이상하긴. 그럴 수도 있지. 싸우면서 정이 들기도 한다잖아. 나한테 정이라도 든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겠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내숭 부리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화 안 낼 테니까. 친한 척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 나랑 송별회를 같이 하게 돼서 짜증 났지? 눈치도 없이 모임에 낀 저 계집애가 빨리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잖아.”

    “안 그랬어.”

    “정말?”

    “응, 정말로.”

    담담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꽤 놀랐다. 레몬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그녀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걸까?

    레몬은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라일라.”

    “응?”

    “……너랑 친하게 지내볼 걸 그랬어.”

    "……."

    “넌…… 촌스러운 데다가 재수 없고, 말보단 주먹부터 나가는 무식한 애지만……. 그래도 나쁜 애 같지는 않으니까.”

    “뭐야. 욕이야, 칭찬이야?”

    “칭찬이야.”

    짧은 침묵이 지나간 뒤 레몬이 속삭이듯 내뱉었다.

    “라일라.”

    “왜?”

    “불량배들한테 잡혔을 때, 나를 구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레몬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그녀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상체를 들어 레몬이 누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자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도로 제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레몬, 나도 그래. 그날 치료해줘서 고마워. 넌…… 재수 없고 못돼 먹었지만 그때 일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 것 같더라. 나랑 친구가 되지 못해서 아쉬워? 하지만 굳이 친해지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 이렇게 옥신각신하고 마음껏 다툴 수 있는 사이가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 이것도 어떻게 보면 친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 * *

    다음 날, 유리아와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겼다. 공작은 친절을 베풀어 타고 갈 마차를 불러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가방을 들고 정문 밖으로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공작에게 받은 금화를 넣자 가방은 들고가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워졌다. 우리는 끙끙대며 가방을 끌다가 마차 앞에 도착했다.

    공식적인 손님도, 귀족도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를 배웅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예의상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가방을 안에 밀어 넣고 마차에 올라탔다. 곧이어 “이랴!”하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고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구름이 떠다니는 새파란 하늘, 풀이 무성한 숲의 풍경이 지나간다.

    나는 창밖에 고개를 내밀고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점점 작아지는 저택을 보자 드디어 저곳을 탈출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소설의 결말이 찾아왔다는 것도.

    그래……. 이제 「장미 저택의 비밀」은 끝났다. 한 소녀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도, 불행한 여주인공도 더 이상 없다.

    앞으로는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분명 해피 엔딩이다.

    나랑 유리아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나는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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