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63
죄책감과 별개로, 모든 일을 해결했다는 안도감에 그날은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 세 형제 중 나를 부르는 사람도, 저택을 떠나지 말라고 부탁하는 이도 없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제야 비로소 자유가 된 것 같다.
이제 남은 것은 떠날 준비뿐이다.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즐리의 얼굴을 지우고 유리아와 함께 짐을 제대로 챙겼는지 확인했다.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벽했다.
확인이 끝난 후에는 친한 사람들에게 미리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내 친구인 마리와 에이미, 두 사람과 친한 오트, 그리고 언니와 사이좋은 비앙카, 우리를 항상 챙겨주던 에밀리아 주머니.
그들은 우리가 떠난다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중에 특히나 아쉬워한 것은 에밀리 아주머니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뭐가 그리도 속상한지 우리가 떠난다는 소식에 뚝뚝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에밀리 아주머니, 울지 말아요. 평생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떠난다고 해도 언제든 아주머니를 보러 올 수 있고, 아주머니도 원하기만 하면 저희를 만나러 올 수 있어요.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요. 전처럼 편지도 꼬박꼬박 쓸게요.”
“알아, 알고 있단다. 너희가 이곳을 떠나야 하는 이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전부 이해하고 있어. 그래도…… 너희와 다시 멀어져야 한다고 하니 너무 슬프구나.”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와 니고르 백작의 저택에서 탈출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작별 인사를 건네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니 보니 금세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유리아와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잘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두운 방 안, 새까만 어둠으로 칠해진 천장을 바라보며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의 시작은 나였다.
“저택에서 나가게 되면 제국을 떠나고 싶어. 이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잖아. 정말……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더 이상 여기서 지내는 건 지긋지긋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로 가서 살자. 라라가 네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 대신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고 싶어. 책에서만 봤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걸. 잠깐만! 그럼 부모님의 무덤은 어쩌지?”
“부모님을 두고 갈 수는 없지. 무덤을 파서 뼈를 화장하자. 거기서 나온 가루를 작은 병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는 거야.”
“응. 좋아.”
“유리아 너는 옷을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정착하는 곳에 옷 가게를 차리는 것도 좋겠다.”
“옷 가게를? 안 돼! 난 아직 능숙하지 않단 말이야. 내 실력으로 어떻게 가게를 차리겠어.”
“그럼 어쩔 수 없네. 작게 차리자. 아주 작게.”
“일단 차리는 거야?”
“뭐 어때. 공작님께서 돈도 많이 받았는데…… 그 돈으로 가게를 차리고 디자이너를 고용해서 기술을 알려달라고 하면 되지 않겠어?”
“그러면 될지도……. 아니야, 그래도…… 좀…….”
이야기를 나눌수록 유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베개에 머리를 묻고 곤히 잠든 모습이 보였다.
“……잘 자."
유리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나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 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에서 깼을 땐 귀에 따갑게 꽂혀오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몇 시일까? 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한쪽 벽면에서 있는 시계는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큰 이변을 깨닫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리아?”
옆에 누워 있던 유리아가 보이지 않던 것이다.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거렸다.
이미 떠난 지 오래라는 것을 알리듯 유리아가 누워 있던 자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없어…….”
유리아가 없다. 보이지 않는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옆자리에 누워서 자고 있었을 텐데.
부드럽고 싸늘한 촉감이 손을 감싸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두려움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만한 곳이 없는데…… 화장실이라도 갔나?”
손님용 방은 하녀일 때 쓰던 방과 다르게 방 안쪽에 화장실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신발을 구겨 신은 후, 화장실 앞으로 갔다. 문을 두드리며 유리아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벌컥 화장실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화장실의 풍경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왜 없지?
갑자기 숨이 가빠 오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 하나 없는 복도에는 기묘한 침묵만이 맴돌고 있었다. 열린 창문에서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간지럽혔다. 땀이 식으면서 차가운 기운이 맴돈다. 그 기운은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왜 없을까? 왜 보이지 않지? 어디 간 거지?
설마, 설마…….
공자들이 무슨 짓을 했나?
문득 원작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유리아는 하나뿐인 동생을 아꼈고, 공자들은 그런 라일라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유리아 몰래 동생을 납치해서 가둬버렸다. 용서해달라고,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비는 라일라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잔인하게 죽여버렸다. 그런 짓을 벌여놓고 사라진 동생을 걱정하는 유리아 앞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동생을 걱정하는 척을 할 뿐이었다.
혹시 유리아도 납치당한 걸까? 원작과 달리 공자들은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일라의 역할이 유리아에게 전가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혹시 잠에서 깨기 전에 들렸던 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맴돈다. 그건 위험에 처한 유리아가 나를 향해 보내는 구조의 메시지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야. 불안해하지 말자. 공작이 저택에서 안전하게 내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는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때까지 우리는 안전해. 그리고 오세스도, 아서도, 이즐리도 전부 해결했어. 그들이 이제 나를 막을 이유가 없어.”
문고리를 쥔 손이 벌벌 떨려온다.
“그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왜 이렇게 무서울까?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야기를 비틀려고 할 때면 나쁜 일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마치, 이 세계를 만든 신이 원작을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자신이 소중하게 만든 이야기를 무너뜨리려는 내게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유리아를 뺏어 가면 어떡하지?
유리아를…….
“그만.”
두 손을 들어 뺨을 세게 후려쳤다.
얼얼한 통증이 느껴진다.
“후……. 생각을 멈추고, 우선 진정하자.”
감정적인 상태에서는 판단이 흐려진다. 유리아가 납치당했든, 그렇지 않든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이 본래의 속도를 되찾을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반복했다. 이윽고 진정이 됐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구세요?”
“라라, 나야.”
“에이미?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 어서 나와 봐.”
에이미가 갑자기 무슨 일이지? 작별 인사는 이미 했을 텐데. 갑자기 사라진 유리아와 뜬금없이 방까지 찾아온 에이미.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나는 쉽사리 문을 열어주지 못하다가 그녀의 재촉에 손을 움직였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선 아무것도 알 수없었다. 문을 열자 촛대를 들고 있는 에이미의 모습이 보였다. 하얗게 일렁이는 촛불이 그녀의 얼굴과 잠옷을 주황색으로 빛내고 있었다.
“안녕, 좋은 밤이야.”
“……그래.”
에이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냅다 내 손을 잡아 어딘가로 인도하는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자 복도에 깔린 카펫과 구겨 신은 신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복도는 소리를 울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발소리가 평소보다 더 커다랗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인데?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음…… 맞아. 그런데 지금은 말할 수 없어. 목적지에 도착하면 알려줄게.”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비밀.”
“일어나 보니까 갑자기 유리아 언니가 사라졌는데. 혹시 너랑 관련이 있는 거야? 거기 도착하면 언니가 있어?”
“글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
에이미는 두루뭉술 말을 할 뿐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답으로 인해 유리아가 그녀가 향하는 장소에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유리아를 데리고 있지 않았다면 내 질문에 저렇게 말하는 대신 무슨 소리를 하냐고 되물었을 것이다. 적어도 공자들이 데려간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를 깨닫자 불안이 서서히 가시고 에이미가 유리아와 함께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뭘 하려고 이러는 걸까? 무엇을 비밀로 하려고 말해주지 않는 걸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도 예상이 되는 것이 없다. 한참을 걷던 나는 우리가 하녀들이 사용하는 숙소로 가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미와 내가 발을 멈춘 것은 숙소 2층에 위치한 마리의 방이었다. 방 안에서는 웃음소리나 대화 소리로 추정되는 소음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 계획에 참여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닌 것 같다. 혹, 에이미가 입으로 바람을 불어 들고 있던 초를 끄고 문을 열었다. 끼익……. 오래돼서 뻑뻑한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고 종이로 만든 꽃잎이 흩뿌려졌다.
“어서 와!”
꽃잎이 가라앉자 초 두 개가 꽂혀있는 생크림 케이크를 들고 있는 유리아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소심한 성격을 가진 마리와 유리아의 룸메이트인 비앙카, 에밀리 아주머니에……. 심지어 레몬까지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어디선가 빌려온 것처럼 보이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케이크 외의 다른 먹거리들이 늘어져 있다. 식당에서 자주 나왔던 빵과 적당히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는 과일이었다.
“짠. 서프라이즈!”
에이미가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손을 뻗으며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