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62 (6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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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62

    “……이제 남은 건 이즐리 밖에 없는 건가."

    일이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다행이었다. 유리아와의 행복한 미래가 벌써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한껏 들뜬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모든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부모님을 어떻게 잃었는가? 두 사람을 지켰다고 방심하고 있던 와중에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나. 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이즐리의 방 앞으로 향했다.

    원하던 장소에 도착한 나는 방문에 대고 조심스레 노크했다. 여기까지 왔지만 이즐리가 방 안에 있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최근의 그는 나를 피하려는 데 온 힘을 쏟아붓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없는 건지 문 너머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 나는 다시 한번 노크를 했다.

    “도련님, 안에 계시나요?”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다. 그저 고요했다. 역시 없는 걸까? 고용인들에게 이즐리의 행방을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뒤돌아 떠나려고 할 때, 갑자기 문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이즐리의 모습이 보였다.

    “라일라……?”

    저번에 정원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헐렁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부스스한 곱슬머리와 하얀 셔츠, 검은 바지…… 평소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기는 왜……? 무슨 일이야? 나랑 만나는 걸 싫어할 줄 알았는데…….”

    “도련님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

    “들여보내 주실래요?”

    "……아.”

    내 말에 이즐리는 허둥지둥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나를 창가 가까이 있는 테이블 쪽으로 인도했다. 내가 먼저 의자에 앉자 이즐리는 눈치를 보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어떻게 공작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즐리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사람처럼 머뭇거리고 있었다.

    친절하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볼 생각은 없다. 그의 행동을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그 순간, 이즐리가 무릎을 꿇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행동이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애써 당황한 마음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 왜 그러세요?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몰라. 하지만 그걸 시작하기 전에 이 말은 해야겠어.”

    “……네?”

    “미안해.”

    그가 고개를 숙였다.

    “……네가 그날, 억지로 입 맞춘 거 미안해. 널 위협해서 미안해. 미안해……. 날 싫어하지 말아 줘.”

    머리가 멍해진다. 이게 무슨? 사과를, 사과를 한다고? 이즐리 에머스가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짓말이다. 원작에서 이즐리는 단 한 번도 유리아에게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억지로 자신의 마음을 강요할 뿐이었다. 내가 뭔가를 잘못 보고 있는 걸까? 왜 이러는 거야? 너, 이런 사람이 아니잖아?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벼보아도 눈앞의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 반응을 해야 한다. 뭔가 반응을……. 깊게 숨을 쉬곤 이즐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나세요.”

    “용서해주는 거야……?”

    “……우선 일어나 주세요. 귀족이 어떻게 평민에게 무릎을 꿇나요?”

    “너한테 용서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꿇을 수 있어.”

    “그만……! 도련님의 행동이 절 곤란하게 만들고 있어요. 이 상태면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잖아요. 제발, 다시 앉아주시면 안 될까요?”

    그는 내가 용서한다는 말할 때까지 이러고 있겠다고 말했다. 이즐리를 말리다 지쳐 내가 먼저 패배를 선언했다.

    “그럼, 그 상태라도 들어주세요. 오늘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억지로 입을 맞추셨던 그날 도련님이 제게 고백을 하셨었죠. 고백에 대한 답변을 해드리고 싶었어요.”

    이즐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전 도련님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내가 그날 저지른 일 때문에 그래? 아니면…… 그냥 내가 싫어서?”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절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고백을 받아줄 수 없다는 소리예요.”

    나는 오세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너는 날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넌 사랑하는 사람을 내게 투영해서 보고 있고,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공작이라고. 말을 끝나자 입을 다물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즐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서처럼 혼란스러워하는 걸까, 혹은 오세스처럼 부정하며 화라도 낼 생각일까. 그러나 그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즐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상처 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널 사랑해. 한 번도 어머니를 투영시켜본 적 없어. 그냥 내가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잖아……! 굳이 내 마음까지 부정해야 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진짜 날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럴 리가 없다. 그들은 남을 어머니의 대용으로 볼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반복되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머리가 아프다. 나는 이마를 짚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즐리는 자신의 감정을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절 진짜 사랑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왜냐면 전…….”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응시했다.

    “도련님이 무서우니까요.”

    공포와 혐오는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는 감정이다. 사람은 흔히 공포를 혐오로 착각하고 혐오를 공포로 착각하고는 한다. 나는 그를 싫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난 이즐리가 무서웠다. 혹시라도 원작처럼 유리아를 상처 입힐까 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나를 죽일까 봐. 니고르 백작처럼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우리를 핍박할까 봐.

    지금의 그가 어떻게 나올지 잘 모르겠지만 내 마음을 거짓 없이 말해보자면 그랬다.

    “무섭다고? 내가?”

    이즐리는 예상하지 못한 답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네……. 무서워요.”

    “내가 왜 무섭다는 거야……?”

    “도련님은 귀족이니까요. 귀족인 도련님은 마음만 먹으면 제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겠죠. 니고르 백작처럼 유리아를 납치해서 저를 협박하는 것도, 지하 감옥에 감금하는 것도 도련님에겐 일도 아니겠죠.”

    “아니야…….”

    “저보다 힘이 세다는 것도 무서워요. 도련님이 힘으로 밀어 넘어뜨리려고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잖아요.”

    “밀어 넘어뜨리다니……?”

    이즐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손을 붙들었다. 그렇게 세게 잡은 게아닌 것 같은데도 악력이 꽤 강했다.

    “아냐, 안 그래. 안 그럴 거야.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아. 난,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네가 말하는 그 인간처럼 널 괴롭히지 않아! 정말이야!”

    거짓말.

    “네, 알아요.”

    너는 그런 사람이지 않은가? 너와 너의 형제들은 원작에서 그런 식으로 유리아를 망가뜨리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점들이 절 무섭게 만들어요. 언제든 절 가두고 마음대로 조종할 힘을 가진 도련님이 제게 고백하고, 그 고백을 받은 제가 사랑을 느낀다고 말한다면 그게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그저 당신이라는 존재가 두려워서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걸까요? 그걸 알 수 없는 것도 무서워요.”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전 도련님이 무서워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절 두렵게 만들어요.”

    이즐리 에머스는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었다. 만약, 아주 만약 그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그는 사랑하기 버거운 사람이다.

    “그때 저택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셨죠. 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런 부탁을 하지 말아 주세요. 제게 그건 부탁이 아니라 강요로 들려요. 이런 식으로 절 잡지 말아 주세요. 제게…… 그건 감옥에 강제로 가두는 것과 다름없어요.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제게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워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가진 것도 지킬 힘이 없는 제 심정을 이해해주세요.”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하고 힘 있게 말했다.

    “그래 주실 수 있죠?”

    이즐리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지만, 언어가 되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응.”

    그는 조용히 동의의 말을 내뱉곤 조심스레 내 손을 놓았다.

    “고마워요.”

    이걸로, 끝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으로 걸어갔다.

    끝인데.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째서 뒤를 돌아보는 걸까?

    어째서 문고리를 붙잡은 상태로 멈춰 섰는지, 어째서 뒤를 돌아 이즐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없다. 한때 그와의 즐거웠던 추억이 내 발목을 붙든 걸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즐리는 상처 받은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마주치자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나는 그 모습에서 문득, 내 안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동정심을 느끼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그의 행동이, 그의 모든 것이 가족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눌려 있던 죄책감을 깨우기 시작했다. 이즐리가 불쌍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아, 그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이 떨려왔다. 이즐리의 모습을 보기가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심했던 걸까? 무섭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했던 걸까? 최소한 사과는 받아주어야 했던 걸까? 이즐리가 유리아를 감금하고 나를 죽일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그건 원작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실제로 그는 아직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이즐리를 살인마, 괴물로 낙인찍고 매도하는 내 행동이 옳은 것일까? 소설 속 모습이 그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즐리를 상처 입히는 것은 옳은 일일까?

    “……아니.”

    옳은 일이 아니다. 나도 알고 있다.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그를 상처 입힐지라도 유리아가 상처 입지 않기를 바랐다. 이즐리보다 유리아가 몇 배나, 몇백 배나, 몇천 배나 더 소중하니까.

    이런 나를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사람이 내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아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지 않은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 모두 그렇게 살고 있다. 모두 그렇다. 그러니 나만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죄책감 같은 것은 가지고 싶지 않다.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나쁘지 않다.

    나는 옳다.

    옳아야만 한다.

    “도련님.”

    "……."

    “도련님이 제게 했던 난폭한 행동들 전부 용서할게요.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그렇게 앉아 있으면 힘들잖아요.”

    그래서 나는 이즐리를 용서하기로 했다.

    난 너를 용서했어. 그러니까 너도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줘.

    그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과의 말을 마지막으로 이즐리의 방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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