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61 (6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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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1

니고르 백작과 오베론이 사형당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나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이 해결된 것처럼 보여도 아직 에머스가의 공자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아는 내 불안을 읽은 것처럼 주변을 맴돌고는 했다.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공자들이 내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그들이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다고?

전생의 기억이나 소설의 내용 같은 걸 말할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유리아라도 그런 말들은 믿기 힘들어할 것이다. 또한 이건 유리아와 나눌 수 있는 고민이 아니었다. 내 손으로 타개해야 할 일이었으며,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저택을 떠나기까지 이틀이 남았을 때, 오세스가 나를 부른 것이다. 방에 찾아온 하녀는 오세스가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건넨 후 밖으로 나갔다.

나는 옷차림을 정돈하곤 정원으로 나갔다. 그가 나를 부른 곳은 차를 마실 때 쓰이던 장소였다. 정원 한쪽에는 티타임을 위한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오세스밖에 없었다. 그를 제외한 공작가의 사람들은 홍차를 마시는 걸 즐기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공작과 아서는 홍차보다는 커피를 주로 마셨고 남들과 함께 마시는 것보다는 자신의 방에서 혼자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이즐리는 앉아서 얌전 떠는 것-그는 티타임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해당 장소는 오세스를 위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가 차를 홀짝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둘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인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오세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반대쪽 의자를 꺼내 주는 것이다.

“어서 와요, 라일라. 여기 앉아요.”

과연 신사다운 훌륭한 매너였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나는 그가 꺼내 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오세스는 제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건네주었다. 내가 하겠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의 행동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내 앞에 놓이는 차를 받아 들고는 또다시 감사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오세스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라일라는 이제 고용인이 아니라 이 저택의 손님이잖아요?”

“고용인이었을 때의 버릇도 있고…… 아직 도련님이라는 호칭이 더 편해서요.”

"아쉽네요.”

예의상 웃어 보이며 테이블 위를 훑었다. 주전자, 찻잔과 함께 먹음직스러운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그것은 사과 파이처럼 보였다. 오세스가 내게 파이를 먹을 거냐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저걸 입에 넣을 수 있겠는가?

“그래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아쉬운 척하며 파이를 자르는 칼을 내려놓았다.

“요 근래 많은 일이 있었네요.”

“네. 그러네요.”

“여러 일로 바빠서 자주 만나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라일라, 감옥에 갇혔을 때 도와주지 못했던 것…… 정말 미안해요. 어머니께서 말리신 터라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없었네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우리를 갇히게 만든 게 누군데? 이를 이용해 정보를 얻어낸 것은 공작이었지만, 그렇다고 오세스가 지하로 우릴 인도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하다니, 낯이 두껍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번에 니고르 백작이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유리아와 라일라를 괴롭히던 것들이 사라져서 다행이에요. 이제 두 사람도 안심하고 저택에 있을 수 있겠네요.”

“아뇨. 저희는 저택을 떠날 생각이에요.”

“왜죠? 이제 떠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좋지 않은 일들도 있었고, 다른 곳에서 새 시작을 하고 싶기도 하거든요.”

“라일라의 심정을 이해해요. 하지만 이곳만큼 좋은 직장도 없지 않나요? 정말 떠나려는 건가요?”

"……."

“전속 하녀를 맡긴다고 해도 말이에요? 원한다면 돈도 더 드릴 수 있고요.”

역시 저게 나를 부른 목적이 었던 모양이다. 공자들은 저택을 떠나지 못한다. 내가 멀리 떠나면 잡지 못하니까 말리려는 것이다. 애초에, 저택 밖으로 나가면 금세 나를 잊어버리겠지. 당신들은 그런 사람들이니까.

“도련님.”

나는 웃음을 지우고 물었다.

“제가 저택을 떠나는 게 싫으신가요?”

“티가 났나요? 솔직히 말해서…… 맞아요. 전 라일라가 저택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불러서 제안하는 거고요.”

“왜요?”

“그야, 당신이 마음에 드니까요.”

그는 고민하는 기색 하나 없이 말했다.

“전 라일라가 좋아요. 이성으로서요.”

사랑을 고백하고 있지만, 오세스의 얼굴에는 부끄러움 하나 엿보이지 않는다. 고백을 듣는 나 역시 어떤 설렘도 느끼지 못했다. 되레 부정적인 감정만 들뿐이다.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당신을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하녀를 시켜 선물을 건네주신 건가요?”

“맞아요. 그런 선물로 남의 마음을 얻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도, 조금이라도 라일라가 절 좋아하길 바랐어요.”

“착각하고 계시네요.”

“……착각이요?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절 좋아한다는 착각을 하고 계신다고요. 왜 제게 고백을 하는 거죠? 보통 사랑하기는커녕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오세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라일라가 절 싫어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 마음까지 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 당신을 사랑해요.”

“도련님은 정말 절 사랑하시나요? 제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책을 좋아하고, 누구랑 가장 친한지 모두 알고 계시나요? 제 어떤 점 때문에 절 사랑하게 된 거죠? 왜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그냥…….”

“그냥 어쩌다 보니, 라고 말하지 마세요. 상대를 알지도 못한 채 사랑에 빠지는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혹시 제 얼굴이 마음에 드셨나요? 그렇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한순간의 설렘일 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도련님은 제 얼굴을 보고 설렘조차 느끼지 않으시잖아요. 당신이 제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뭔지 말해볼까요? 적어도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라일라, 그만해요. 당신의 말이 맞아요. 전 당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요.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당신을 마음에 두게 된 것도 최근이니까요. 그렇다고 그걸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적어도 라일라라는 사람을 더 알 기회를 주고 나서 말해도 괜찮잖아요.”

“시간을 더 주더라도 도련님이 저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천천히, 정확하게 문장을 내뱉었다.

“도련님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네?”

“어느 날 도련님은 사랑하는 사람과 저 사이에 비슷한 면이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렇게 제게 그 사람을 투영해 보다가, 그만 저까지 사랑하게 됐다고 착각해버리고 만 거예요.”

오세스의 눈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그가 보이는 동요였다.

정답이구나.

“절 보고 누구를 떠올리고 계시는 건가요?”

“아니에요…… 전…….’’

웃는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원작에서 그들이 유리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그녀가 공작을,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유리아는 ‘약속’을 하기 전 친절하고 상냥한 어머니의 모습을 꾸미던 공작을 닮아 있었다. 그런 면들이 세 사람의 마음을 끌었고 끝내 집착을 하게 만들었다.

“누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시는 건가요?”

부서져라.

“……그만하세요.”

부서져.

“생각나는 분이 한 명 있네요.”

네 착각과 함께 그 웃는 얼굴을 산산조각 내줄게.

나는 싱긋 웃었다.

“때때로 도련님은 어떤 분을 애틋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하셨죠.”

“……그만.”

공작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다.

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다. 부모도, 친구도, 어릴 적 키우던 강아지도 그녀의 마음을 끌지는 못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병으로 죽은 남편이었다. 공작은 오직 남편만을 사랑했다. 그 외의 인간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했다.

그건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아들들은 귀족으로서, 후계자로서, 어린아이로서의 기본적인 혜택은 받았지만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들은 공작을 사랑했다.

대부분의 자제들이 독립할 나이가 되어서도 저택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어머니에게 받지 못 한 사랑을 비슷한 대상에게 찾으려고 했다. 이기적이게도, 자신들의 결핍을 남을 이용해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원작에서는 그 대상이 유리아였고 지금은 나였다. 내 어떤 면에서 공작을 보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그들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정체이다.

별 볼 일 없고, 가치 없는, 그저 미련만이 덕지덕지 붙은 한심한 감정.

“제가 그렇게 공작님을 닮았나요?”

불쌍하기도 하구나.

쾅!

“그만하라고……!”

오세스가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그 충격으로 찻잔이 넘어지고 그 안에 있던 액체가 흘러나온다.

테이블을 덮은 하얀 천이 붉은색으로 젖어갔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불쾌하네요. 정말로…….”

웃는 얼굴은 완전히 부서져서 그 조각이 테이블로 후드득 떨어졌다.

“당신이 남의 감정에 대해 뭘 그렇게 잘 안다고 설교를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네요. 자신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나요?”

나를 보는 두 눈에는 경멸과 혐오가 얽혀 있었다.

너 같은 게 뭘 안다고?

자신의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켜서 발끈 열을 내는 모습이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부드러운 말씨나 가면으로 자신을 감출 생각을 하지도 못한다.

“더 이상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요. 저택을 나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잡지 않을테니까.”

“……실례했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소리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돌아 정원을 빠져나가는 동안, 오세스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힐끔 뒤를 바라보니 고개를 푹 숙인 채 덜덜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디선가 바스락, 하고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상 뒤편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곳으로 발을 옮기자 아서가 서 있었다. 누가 봐도 동상 뒤에 숨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서 도련님?”

"……."

“혹시 저랑 오세스 도련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나요?”

아서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는 탓에 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잘됐네. 더 말해줄 필요도 없겠어.

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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