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58 (5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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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8

유리아는 닫힌 문에서 눈을 떼고, 니고르 백작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당신은 저한테, 그리고 라일라한테 미안하지 않은가요? 수치심을 알고 죄책감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감정이 들어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나요? 당신 때문에 라일라는…… 차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어요.”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최소 나에겐 아니라도…… 라일라한테는 미안해해야 하는 거잖아.’ 

유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동생을 볼 때면 그녀의 등에 나있는 흉터들이 떠오르곤 했다. 괴로워하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백작은 그녀의 생각을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왜 그래야하지?”

백작이 이죽였다. 유리아를 바라보는 눈에는 악과 분노, 광기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 안에 죄책감은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단 한 조각도……. 유리아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그가 사과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역시나 아니었구나. 이 사람은 변하지 않아. 평생 그렇겠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저 사람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유리아는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가려고 했다.

“너야말로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순간, 백작에게서 튀어나온 말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네 동생은 사람을 해쳤어! 그동안의 정 때문에, 외국으로 도망치다가 죽었단 게 불쌍해서 그 사실을 숨겨줬단 말이다. 두 사람이 살아 있고, 내 뒤통수를 친 걸 안 이상…… 이젠 거리 낄 것도 없어.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 동생이 범죄자라고 알리겠어. 그래도 소용없다면 사형장에서라도 네 동생이 저지른 죄악을 외쳐주지. 무려 사람을 두 명이나 해쳤다고 말이야!”

유리아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굳어버렸다.

‘범, 죄자…….’

라일라에 의해 조용해지던 하녀의 모습이 유리아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신경 쓰지 말자. 죄인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모두 헛소리로 치부할 거야.’

하지만 저 말이 시발점이 돼서 동생을 괴롭게 만든다면 어쩌지? 그런 불안이 유리아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도 니고르 백작에게 뭐라고 할 입장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라일라가 사람을 죽였음에도 죽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에게 피해가 갈까 봐 걱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나도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그러나 동생이 안전할 수만 있다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유리아는 지금, 당장, 니고르 백작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때밖에 있던 간수가 문을 두드렸다.

“괜찮으십니까? 큰소리가 많이 나서 걱정이 되네요.”

그는 큰 소리로 유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그놈이 아가씨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약간의 성의를 건네주시죠. 그러면 심기를 거스른 그놈을 아주 혼쭐을 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죄인이고, 사형수이니 놈이 죽지 않는 이상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몸이 망가지든, 정신이 망가져서 바보가 되든……. 다른 귀하신 분들도 많이들 그렇게 한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유리아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주머니 안에 넣어둔 돈을 떠올렸다. 하녀 일을 하면서 받은 봉급은 꽤 됐다. 그것을 건네주고 입을 틀어막아 달라고 부탁하면 간수는 기꺼이 들어줄 것이다. 자신은 한마디만 하면 된다.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망가뜨려주세요, 라고.

‘그래도 되는 거야?’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은 언젠가 벌을 받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다치게 한 적이 없었다. 낯선 행위는 유리아에게 두려움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내 행동을 멈출 이유가 되는 건가? 저런 사람에게 폭력을 저지른다고 해도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있을까?’

유리아는 자신을 위해 망설임 없이 행동하던 가족을 떠올렸다. 라일라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하녀를 해쳤다. 라일라는 오직 유리아를 위해서 두려움도, 죄책감도, 망설임도 모두 버린 것이다. 그런 가족을 위해 무슨 짓이든 못할까? 어떠한 끔찍한 일이라도 기꺼이 저지를 수 있었다.

언젠가 저 하늘이 벌을 내린다고 해도 받아들일 것이다. 라일라의 죄까지 받아들여 처절하게 그 값을 치르고 죽어버릴 것이다.

‘아니야…….’

유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라일라의 죄가 아니야. 나의 죄고,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몫이야. 라일라가 잘못을 했다면 전부 나 때문이니까.’

마음이 다잡혔다. 이제 망설임 같은 것은 없다. 유리아는 힘껏 문을 열었다. 바깥에는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간수만 있을 뿐 라일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간수는 유리아에게 라일라가 먼저 바깥에 나갔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먼저 갔구나. 다행이야……. 라일라에게 험악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간수에게 다가갔다.

“아까…… 돈만 주면 뭐든 해주신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죽지 않는 선에서는 뭐든 해드릴 수 있죠.”

“……그럼 부탁해요.”

그리고 남자의 손에 돈을 쥐여주고는 고개를 숙였다.

“입을 지져버리든, 혀를 잘라버리든…… 수단 같은 건 상관없어요.”

간수에게서 떨어져 서로 마주 잡은 손이 덜덜 떨려왔다.

“다시는……다시는, 저 사람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해 주세요.”

이걸로 됐다.

‘이걸로 된 거야…….’

* * *

유리아는 방 안으로 들어가는 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아…….”

나는 시선을 떨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아의 부탁 때문에 밖에 나오기는 했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혼자서 괜찮을까? 역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걸까? 유리아는, 유리아는 왜 자기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왜 그 아이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빨리 눈치챘다면 별 볼 일 없는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봤을 텐데. 걱정과 죄책감이 뒤섞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담담한 얼굴의 유리아를 떠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유리아를 믿자. 혼자서도 괜찮을 거야. 그도 그럴 것이, 혼자서 공작을 찾아가서 백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조건으로 부탁을 들어 달라고 말한 아이잖아. 그녀는 나보다 용감했고, 당당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유리아의 걱정만 더 할 것 같아서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과 남아 있는 돈에 대해 생각하고, 저택을 나가고 난 뒤에 일들을 고민하다가 마지막으로 저택에서 들었던 공작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공작은 니고르 백작을 비롯해 그의 사업에 가담한 사람들이 이곳에 갇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남자도 있지 않을까?

험악한 채찍을 든 손과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갑자기 흉터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이미 다 나아서 아플 곳도 없는데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고통은 분명히 환상통이었다. 덥지도 않은데도 몸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등이, 아픈 것 같다. 등이 아프다.

얇고 단단한 무언가가 나를 때리는 것 같다. 아프다. 아파. 아프다고. 아니…… 아프지 않다. 전부 가짜 고통이다. 착각에서 생기는 통증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이 사그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이었다.

아직도 그가 무서운 거야? 식은땀을 닦아내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무서웠다. 환상 속에서라도 그 검은 눈동자와 마주하면 심장이 거세게 뛰고, 내게 뻗어지는 손이 공포스러우며, 나를 비웃듯 틀어 올린 입술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그날의 일이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간수가 벽을 짚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내게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고통이 잠잠해져서야 그의 말에 답을 할 수가 있었다.

“네……. 괜찮아요.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니고르 백작과 함께 잡혀온 사람들이 있죠?”

“네네, 감히 제국민을 노예로 만들어 사고판 죄로 잡혀왔었죠.”

“그중에서…… 한쪽 눈에 안대를 쓴 남자를 보지 않았나요?”

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봤죠. 특이하게 안대를 쓰고 다니던 그놈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럼, 그 사람에게 데려다주세요.”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오베론에 대한 공포가 그랬다. 그가 무섭다.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부터 오베론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유리아의 탓이 컸다.

그녀는 과거를 이겨내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을 과거의 기억과 마주 봤다. 니고르 백작을 만나는 것이 무서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만나러 가자는 제안을 건넸다. 그리고, 지금은 혼자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유리아는 아득히 멀어지고 있는데 오직 나만이 갇힌 물처럼 제자리에 고여 있다. 이대로 있다가는 새까맣게 썩어버릴 것 같았다. 그를 마주 보고 몰락을 눈에 담을 때서야 이지긋지긋한 두려움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그를 만나볼 수 있을까? 니고르 백작이 사형을 당하는 마당에 오베론이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 그 역시 목을 베이고 말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사형장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저 안에 계시는 귀한 분 곁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 다른 간수에게 동행을 부탁하죠. 괜찮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간수는 계단을 올라와 9층을 둘러보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간수에게 이야기를 듣곤 나를 안내해주기로 했다.

“제 동행이 나오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전해주세요. 딱 그 말만요.”

“알았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간수를 뒤로하고 발을 옮겼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긴장감이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갔다. 오베론은 3층에 위치한 감옥에 갇혀있었다. 9층과 달리 각각의 방으로 나뉘어 있지도 않고 크기가 크지도 않았다. 침대 대용처럼 보이는 지푸라기가 바닥에 잔뜩 깔린, 약 2~3평 정도의 크기를 가진 감옥이 양 쪽에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간수의 인도에 따라 끝에서부터 세 번째에 있는 감옥 앞에서 발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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