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56 (56/84)
  • 16631947643718.jpg

    Episode 56

    아침이 지나가고 점심이 될 무렵, 공작과 두 공자가 탄 마차가 저택에 당도했다. 밖에서 고용인들이 세 사람의 마중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저택이 고요해지고 하녀가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나와 유리아는 그녀의 인도에 따라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밖으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아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옅은 두려움과 함께 고결한 의지 비슷한 감정이 얽혀있어 단순히 불안 때문에 내 손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이 우리를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니고르 백작의 체포를 완료했다는 좋은 소식일까? 아니면 결국 체포에 실패하고 말았다는 나쁜 소식일까?

    공작의 유능함을 알고 있지만 쉽사리 결과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전개를 뒤틀게 되면서 이야기는 안 좋은 쪽으로 튀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대감 반, 불안감 반을 안고 앞으로 나아갔다.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의 옆면은 탁 트여 있어 정원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붉은 장미가 만발한 그 아름다운 정원에, 엇비슷하게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제복을 갖춰 입은 이즐리가 서 있었다.

    마차가 도착한 이상 저택 안에서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제 잘못을 아는 사람 마냥 고개를 대각선 아래로 떨궜다. 내게 억지로 입 맞춘 걸 미안해하기라도 하는 걸까? 죄책감을 느껴줬으면 좋겠다. 그저 바람일 뿐이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눈을 떼려고 하려던 찰나, 이즐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다.

    나무 그늘 안에서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안에서 빛과 함께 애정 같은 감정을 엿본 것 같았다.

    나는 슬며시 조소를 지었다. 애정이 아니다. 오직 소설을 알고 있는 나만이 애정일 리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사랑 고백이 우습고, 그 눈에 담긴 감정이 끔찍하게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눈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를 보는 것이 불쾌하게 느껴진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집무실로 통하는 거대한 문이 코앞에 드리워 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하녀가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유리아의 손이 내게서 떨어졌다.

    집무실 안에는 다리를 꼰 채 앉아있는 공작과 허리를 쭉 펴고 꼿꼿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알렉산더가 있었다.

    방 가운데엔, 주머니가 널브러진 직사각형의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주변을 소파로 둘러싸고 있었다. 상석에는 공작이, 상석의 오른쪽에는 얼굴을 굳힌 알렉산더가 있었다. 나와 유리아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여기 앉지.”

    공작은 알렉산더 맞은편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내가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앉자 유리아가 내 뒤를 따랐다.

    정면에서 살짝 왼쪽으로 시선을 돌려 공작의 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그녀와 이 정도로 가까이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 것도. 공작에게서는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에 긴밀하게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런 사람과 마주한 것도 모자라 약속까지 받아낸 유리아가 기특할 따름이다.

    잠시뒤, 공작이 입을 열었다.

    “라일라 핸슨, 아직 네게는 이 자를 소개하지 않았지? 내 밑에서 일하고 있는 알렉산더 발터다. 구면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구면입니다. 니고르 저택에서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고요.”

    말을 끝내고 알렉산더를 바라보자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남자에게는 어쩔 수 없이 상반된 감정을 가지게 된다.

    탈출을 도와준 것은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구해주지 않고 외면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공작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원망스러운 마음이 커지기도 했다.

    공작이 구면이니 인사라도 해보라고 했다. 알렉산더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발터는 그동안 내 명령으로 니고르 백작의 저택에서 일하며 경매와 관련된 정보를 빼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내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다지 놀란 것 같지 않군.”

    “이미 제 언니에게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그럼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치우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

    공작은 알렉산더에게 퇴장을 명령했고,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공작이 소파 손잡이에 턱을 괴고 나른하게 말했다.

    “니고르 백작의 체포에 성공했다. 지금은 그의 동업자들과 함께 수도의 셀프레스 감옥에 투옥되어 있지. 그의 뒤를 봐주고 있던 니케르먼 공작 역시 감옥 안에서 생활하는 신세가 됐다.”

    그 말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니고르 백작이 갇혔다고? 정말로? 항상 그가 벌을 받기를 바랐다.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기를 원했지만 실제로 잡힐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왜냐면 인생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으니까.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단 말인가?

    전생의 뉴스나 인터넷 기사에서도 죄인에게 가해지는 벌은 가볍게 느껴지고 그 가벼움만큼이나 권선징악이라는 말은 너무나 우습게 들린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게 되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신분제가 없던 그때도 이렇게 불공평했는데, 신분제 사회는 얼마나 더 그럴까.

    나는 결코 니고르 백작이 벌을 받을 일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부유한 귀족이고 우리는 힘없는 평민이니까. 나와 유리아가 무어라 떠들든 돈과 직위로 무마하면 끝이다.

    심지어 이 일을 남에게 말한다면, 똥을 밟았다는 식으로 넘어가라고 할 게 뻔했다.

    절대 이루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소원이, 오늘에서야 비로소 실현됐다. 목구멍 속부터 무언가 치밀어 오르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상반된 감정들이 파도처럼 나를 덮쳐왔다. 기뻤고, 통쾌했다. 의도가 어떻든 결국 그를 잡아준 공작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슬프고 화가 났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구나. 공작 정도 되는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정말 이 사람들을 잡을 수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울지 말자.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감정적으로 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유리아가 내 손을 꽉 잡아왔다. 그녀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흥분을 가라앉히고 옆을 돌아보았다.

    유리아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있었다. 눈가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상태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길게 선을 그리는 순간, 갑자기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울컥 튀어나오려는 눈물을 삼키곤 고개를 들었다. 유리아도 나를 보고 얼른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마음을 추스른 후, 공작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너희를 위해 행동한 게 아니다.”

    “그래도 감사해요.”

    유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제 니고르 백작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국의 법을 어기고 폐하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그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옳지. 그는 사형당할 것이다. 조만간 광장에서 놈의 목이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

    “……아.”

    “이번 일은 유리아 핸슨, 네 도움이 컸다.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그를 붙잡는데 시간을 많이 소비했겠지. 여기 놓인 주머니는 내 성의의 표시다. 한번 열어보는 게 어떤가?”

    유리아는 힐끔 나를 돌아봤다. 내가 얼른 풀어보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자 그녀는 주머니 쪽으로 손을 뻗었다.

    주머니의 입구를 묶은 천을 풀어내자 눈앞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이, 이건…….”

    흡, 유리아가 깜짝 놀라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나도 하마터면 평정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머니 안에는 셀 수없이 많은 금화가 들어 있던 것이다.

    평생 일을 하지 않고 놀고먹어도 남을 정도였다. 이만큼이나 있으면, 매일같이 땅값이 치솟는 수도에서도 대저택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으리라. 이 돈은 우리가 그릴 행복한 미래의 지지대가 되어줄 것이다. 이렇게 포상까지 내리는 걸 보면 확실히 유리아의 도움이 컸던 모양이다.

    나는 주머니를 내 앞으로 끌어왔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다만?”

    “이렇게 많은 돈을 잘 간수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괜찮으시다면 떠나기 전까지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 그때 주도록 하지. 언제쯤 떠날 생각인지 궁금하군.”

    유리아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아 말했다.

    “닷새 뒤요……. 그때 떠나려고 해요. 공작님, 그런 말을 하시는 걸 보니 이젠 밖에 나가도 괜찮은 건가요? 안전한 건가요?”

    공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잔당까지 모조리 잡아들였으니 안전할 거라고 답변을 해주었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대화가 끝났다.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집무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보이는 복도에는 알렉산더가 서 있었다. 벽 가까이 서 있던 그는 유리아와 나에게 다가왔다.

    “알렉산더? 왜 여기 있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요?”

    유리아가 조금 경계 어린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믿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은 있는 모양이었다.

    알렉산더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 않고 우리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름 아닌 사과였다.

    “그때…… 저택에 갇혀 있을 때 돕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외면해서, 죄송합니다. 유리아…… 당신에게 심한 소식을 전해서 죄송합니다.”

    유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조금은 당황한 상태였다. ‘어차피 이렇게 도와줄 거라면 더 심한 짓을 당하기 전에 도와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원망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릴 도와주면 니고르 백작에게 의심을 살 수도 있었으니까. 스파이 행각이 들통나고 혹독한 벌을 받았을 것이다. 니고르 백작에게도, 에머스 공작에게도. 그래서, 그래서…… 사과를 받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변명이라고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릴 적 그에게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에게 끔찍한 폭력을 당한 누나가 죽고 하나 남은 가족은 괴로움에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전 니고르 백작을 꼭 잡고 싶었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많은 여자들이 그의 손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외면해서라도 말입니다. 인간으로서 몹쓸 짓이라는 걸 잘 압니다. 죽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 다른 이들의 가족이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보는 건, 쓰레기나 하는 짓이겠죠. 그냥, 제가 더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미워요.”

    유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어요. 당신이, 제 동생의 머리카락을 가져온 날…… 당신이 괴물처럼 보였어요. 무섭고…… 미웠어요.”

    유리아가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해해요. 만약에 저도 라일라를 잃었더라면 당신처럼 했을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 당신처럼 변했을 거예요. 그 사람을 잡기 위해 고통받는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심지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도 거리낌 없이 했겠죠.”

    나도 유리아의 손을 세게 마주 쥐었다.

    마찬가지다. 유리아를 잃었더라면나 역시 괴물이 됐을 것이다. 괴물이 됐을 거라고? 그럼 지금의 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미 괴물이지 않을까? 나는 그녀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나. 목적이 어떻든 그 행위가 옳다는 것은 아니다. 잘못이고, 죄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었겠지.

    유리아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전.”

    하늘을 담아놓은 것 같은 푸른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래 우리는-.

    “당신을 용서할게요.”

    당신을 용서할 것이다.

    유리아가 울 것처럼 웃었다. 기울어진 햇빛이 그녀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래서 마치, 유리아가 하얗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죄를 사하여주는 자애로운 성모처럼, 천사처럼. 나도 그 아름다운 광경에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아와 나는 그 울음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찾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을 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