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55 (5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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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5

어떤 일이 생기든 세상의 이치는 변하지 않는다. 아침이 찾아오면 밤이 오고, 밤이 가면 다시 아침이 찾아온다. 장미의 저택에도 이른 아침의 햇빛이 드리웠다. 정원을 가득 채운 붉은 장미는 이슬을 머금고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다.

“아름답네.”

확실히 아름답다. 돈을 엄청 쓴 덕분이겠지. 1년 내내 장미를 피어 있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까. 아마 수도에 저택 하나 정도는 살 정도로 들 거라고 생각한다.

그 돈, 나주면 안 되나.

창가에 기댄 채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가 작게 하품을 했다.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면 기분이 좋다. 시원한 아침의 바람을 맞으면 상쾌해지니까. 하지만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단순히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기억이 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기억…….

머리의 충격과 함께 모든 것이 떠올랐다. 전생과 소설의 내용부터 과거의 기억들이. 확실히 기억이 돌아오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멍청하게 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귀족 앞에서 그렇게 싫어하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다니, 그 정도면 죽여달라고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닌가? 기억을 되돌려보겠다고 머리를 벽에 미친 듯이 부딪히는 것은 또 어떻단 말인가.

“……그러다가 어디 하나 잘못되면 어쩌려고 위험하게 그랬던 거야? 운 좋게 기억이 돌아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하아.”

한숨을 내쉬곤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한때 상처 입었던 그곳에는 고통도, 흉터도 남아 있지 않다. 아서가 건네준 포션 덕분이다.

정신을 차린 이후 그는 내게 상처를 치료하라고 포션을 권했다. 굳이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고, 이번 일로 꼬투리를 잡게 하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러나 포션을 억지로 쥐여주는 데다가 유리아까지 거절하지 말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불쌍한 얼굴로 쳐다보는 아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이마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게 됐지만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다.

“다 너 때문이야. 내가 그런 얼굴에 약한 걸 알고 있는 거지?”

나는 고개를 돌려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속도 모르고 푹신한 침대에 누운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침대 위에 살짝 앉아 유리아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살결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고는 한다.

일그러진 눈살이 펴지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현재 유리아가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킹사이즈 침대, 비싼 차 세트와 어울릴 법한 테이블과 의자, 거대한 옷장과 바닥 전체를 덮은 붉은색의 양탄자, 벽에 달려 있는 풍경 그림들.

온갖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가득 채워진 이 방은 에머스가의 손님용 방이었다.

공작이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 에머스가의 저택에서 손님으로써 지내왔다. 혹시라도 수사 도중 니고르 백작이 우리를 눈치채게 되면 위험해질 수 있으니 이 안에서 보호하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세 명의 공자들의 동향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확실히 귀족이 지켜주겠다고 하니 안전하다고 느꼈고 공작을 봐서 잠깐 동안 지내기로 결정을 했다.

소설에서 본 바에 따르면 에머스 공작은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성격이었다. 가문의 이름까지 건 이상, 우리를 저택에서 내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유리아와 나의 누명을 벗겨주고 범인을 찾아주었다.

범인은 우리를 도둑으로 지목한 하녀였다. 평소에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쫓아낼 작정으로 그런 짓을 벌였다고 한다.

웃기는 일이다. 어떤 하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짓을 할까?

공작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당당히 밝히면서도 하녀를 범인으로 짚어 어물쩡 넘어가려고 하는 태도를 봐서는, 공자들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공작이 범인을 감추려는 이유는 혈육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 아니라, 혹여나 가문의 명예가 상할까 봐 그렇게 하는 거겠지.

범인이 누구인지는 예상이 된다. 원작에서 주로 뒷 공작을 펼치고 선두로 나서는 것은 오세스였다. 맨 처음 유리아를 감금하자고 제안한 것도 그였다. 오명을 받고 떠나는 하녀에게 돈을 주며 범인이 오세스가 아니냐고 묻자, 입은 꾹 다문 상태였지만 어떻게 알았냐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뻔하다니까.”

어쨌든 이 세상은 소설을 배경으로 한 장소이다. 그 내용만 알고 있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사람들의 행동 원리를 대강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이때까지 소설을 알고 있어도 제대로 변화시켰던 적은 하나도 없지 않았는가. 다시금 그 사실을 깨닫자 자괴감이 밀려왔다.

내가 망쳐버린 일들이 떠올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뺨을 두어 번 후려쳤다.

……아무튼 앞서 말한 것처럼 공작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다만, 약속한 것만. 약속했던 대로 억울함만 풀어주고 제대로 된 범인을 밝혀주지 않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니 나와 유리아를 저택에서 내보내 주기는 하겠지만 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뒤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공자들이 우리를 납치해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원작에서의 유리아의 감금도 공작의 암묵적인 동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유능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도움을 준 우리를 무시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미세한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현재 공자들은 자신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오세스는 이상한 관심을 보이고, 아서는 호감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이즐리는 고백까지 한 상황이다.

그들이 원작처럼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을 호감이나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라면 저택을 떠나지 못하게 막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그 착각을 산산이 무너뜨려 줄 작정이었지만……. 아쉽게도 세 사람은 무척이나 바빴다.

오세스는 공작의 대리인으로 일을 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공작을 도와 경매와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넣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잠깐이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틈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저택을 떠나기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고 그 시간에 유리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니까.

나는 눈을 감고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2주 전, 유리아는 막 의무실에서 정신을 차린 내 손을 세게 그러 쥐며 말했다.

- 라라…… 이제, 이제 괜찮아. 내가 다 해결했어. 공작님께서 내 이야기를 듣고 우리를 풀어주기로 했어.

-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구나.

손을 들어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마를 만졌다. 머리 둘레에 축축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제야 그녀가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 ……고생했어, 정말로.

유리아는 언제부터 내 보호와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어진 걸까? 언제부터 이렇게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도대체 언제부터, 어른이 되어 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그녀의 존재가 평소보다 커다랗게 느껴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나보다 키가 더 자라났을 때도 체구가 커졌을 때도 단 한 번도 유리아가 크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다시 한번 유리아의 성장을 상기하게 되고, 이만큼이나 커버린 아이를 손에 움켜쥐고 입맛대로 조종하려고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괴로운 기억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될 정도로 강해진 그녀가 대견한 한편, 내 손을 떠나버린 것 같아서 쓸쓸했다.

그런 감정은 내 손을 세게 그러잡아오는 유리아의 손에 의해 금방 사라졌다.

-왜 또…… 이마를 그렇게 만든 거야?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것처럼 유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네게 도움이 되고 싶었어. 머리에 충격을 주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기억을 제대로 되찾아서 너랑 함께 저택의 일을 말하고 싶었는데, 너무 늦어버렸네.

- 그렇다고 이럴 것까지는 없었잖아……!

유리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손을 쥐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 더 이상 라라 네가 다치는 거 싫어! 네가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알아? 제발 아프지 마…….

- 미안해. 울지 마, 유리아.

- 안 울어…….

유리아의 얼굴이 붉었다. 울고 싶지만 눈물을 꾹 참아내는 모양새였다.

- 그래도 내가 한 행동이 쓸모없지는 않았나 봐. 나, 기억이 돌아왔어.

- 뭐……? 정말로?

- 응. 정말로.

위로해주기 위해 지은 미소가 의미 없게도 유리아는 눈물을 소나기처럼 쏟아냈다. 눈 깜짝할 사이 나는 그녀의 품 안에 안겼다. 얼마나 세게 안아주던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쁠 정도였다.

- 미안해.

내 어깨를 적시는 유리아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 혼자서 멋대로 행동한 것도, 너를 걱정하게 만든 것도, 전부…… 그냥 전부 미안해. 나 말이야……. 그동안 너를 어린아이라고 여기고 있었나 봐.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든 나 혼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숨기기만 했어.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이제야 깨달았어. 너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약하지도 않다는 걸……. 날 용서해줄 수 있어?”

- 용서, 흑…… 용서할게……. 그러니까…… 다시는 걱정시키지, 흐윽, 마……!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마……!

- 응…….

- 나는, 난 네 언니잖아……! 나한테…… 의지해줬으면 좋겠어.

- 그럴게.

- 나도…… 알렉산더가 집에 찾아왔었을 때 말하지 않은 거…… 미안해.

- 괜찮아.

유리아는 한참을 울다가 자신도 할 말이 있다며 공작이 저번에 자신을 불렀던 이야기, 그녀와 한 약속과 알렉산더의 정체에 대해 털어놓았다. 알렉산더가 에머스 공작의 스파이었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가 보여준 복수심을 생각하면, 니고르 백작을 무너뜨리기 위해 충분히 공작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리아가 담담히 이야기를 듣는 나를 보고 당황했다.

- 라라, 혹시 너 이미 알렉산더의 정체를 알고 있던 거야? 그래서 전에 그 사람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한 거고……?

- 그건 아니야. 저택을 탈출하기 전에 알렉산더도 원한이 있다고 들었을 뿐이야. 그때 알렉산더는 백작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저택에 들어왔다고 했어. 여기서 더 자세한 이야기는…… 개인적인 거라 내가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

유리아는 알렉산더의 사정을 자세히 말하지 않는 나를 넘어가 주는 듯 보였다.

“……싫어.”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듣고 퍼뜩 눈을 떴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리아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이불을 세게 쥐어 잡으며 거부의 말들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만지지 마…….”

또 그날의 악몽을 꾸는 걸까? 유리아는 아마. 내가 그녀의 잠꼬대를 들을 때마다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모를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볼 때마다 슬픔과 죄책감,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할 수만 있다면 백작에게 달려들어 원망을 쏟아내고 싶다. 그를 마구 상처 입히고 싶다. 질척이는 감정들을 삼키곤 유리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괜찮아.”

내가 곁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계속해서 귓가에 속살거리자 유리아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유리아를 진정시키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트레이에 아침을 가지고 온 하녀가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녀는 침대 가까운 곳에 놓인 테이블 위에 수프와 샌드위치를 올려둔 뒤 인사를 하고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유리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곧 눈꺼풀이 열리고 하늘을 담은 것 같은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유리아는 몽롱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잠에서 막 깼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는 유리아밖에 없을 것이다.

“……라라……?”

“깼어?”

한참 동안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던 유리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떤 부분에서 놀랐는지 예상이 되는걸.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왜 그래? 내가 먼저 일어나 있어서 어색해서 그래?”

“응, 평소에는 내가 깨워줬었으니까……. 벌써 2주가 지났는데 이건 아직도 익숙해지지가 않네.”

자리에서 일어난 유리아는 작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유리아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동안, 나는 테이블에 놓인 샌드위치를 집어 그녀의 입에다가 물려주었다.

“고마워.”

유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토끼 같아서 귀여웠다. 이즐리가 좋지는 않지만 그가 지어준 별명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정말, 그거 하나만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아침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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