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54 (5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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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54

    에머스 공작의 수색은 2주에 걸쳐 벌어졌다. 경매장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와 연관이 되어 있는 모든 이들이 잡혀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주최자인 니고르 백작과 그의 하인인 오베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고문하여 경매장의 손님 리스트, 문서화된 수익 관련 서류부터 니케르먼 공작이 그의 뒷배로 있어왔다는 증거까지 얻어냈다. 그리하여 수색의 손길은 니케르먼 공작가까지 뻗치게 되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등장에 언제나 조용하던 니케르먼 공작가가 소란스러워졌다. 고용인들은 불안한 얼굴로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에머스 공작과 그의 기사들을 지켜보았다.

    고용인 중 대부분은 눈치 빠르게 도망가버려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기껏 해야 있는 것은 오랫동안 저택을 지켜오던 집사와 하녀장, 그리고 충성심 깊은 스무 명의 하인과 하녀들이다. 한때 1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각자의 구역에서 열심히 일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용인이 얼마나 심각하게 줄어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복도 끝에 다다른 에머스 공작은 제압에 있는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거대하고 고풍스러운 조각이 새겨진 나무문이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햇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어두운 방 안에는 6-70세쯤으로 보이는 노년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깊은 연륜이 엿보이는 얼굴에는 나이테처럼 굵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붉은색을 띤 머리카락에는 하얀 새치가 이리저리 섞여 있어 언뜻 보면 주홍색처럼 보였다. 그는 집무실에서 서류를 훑어보다가 손을 내 려놓았다.

    니케르먼공작이 고개를 들어 에머스 공작과 마주 보자 보름달처럼 샛노란 눈동자가 나타났다.

    에머스 공작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케도 도망가지 않았군.”

    “도망갈 이유가 없으니까.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확신이 있어서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추해지기만 하겠지.”

    “그래, 당신 말이 옳아.”

    쾅! 하얀 장갑을 낀 여성의 손이 책상 위를 거세게 후려쳤다.

    “확신뿐만이 아니야. 아주 확실한 증거까지 있지.”

    그 손의 아래에는 니케르먼 공작이 니고르 백작에게 도움을 줬다는 증거들이 문서화되어 쓰여 있었다. 니케르먼 공작들은 그 문서들을 들어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제국을 받치는 4대 공작가를 이끄는 자들 중 한 사람답게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얼굴은 굳건한 무표정을 지키고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건 제임스 니고르의 사업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신 입으로 직접 인정하는 건가?”

    “……그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머스 공작 곁에 있던 기사들은 니케르먼 공작의 무릎을 꿇렸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겠다. 어째서 니고르의 사업에 도움을 준 거지? 노예 사업에 연관되면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 당신은 그걸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어.”

    “나이가 들면 가끔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지 않나. 말년에 돈 좀 벌어보겠답시고 추한 짓을 한 것뿐이야. 그래, 그저 그뿐일세.”

    “글쎄……. 난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들여보내도록.”

    공작의 명령과 함께 거대한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기사 두 명이 누군가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이거 놔! 놓으라고……!”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산호색 머리카락에 스쳐가듯 보면 황금색처럼 느껴지는 옅은 주황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고급스러운 원피스와 액세서리를 갖춰 입고 있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물건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어린 소녀가 고귀한 신분이라고 착각하고 말 것이다.

    양팔이 붙잡힌 채 집무실 안으로 끌려 들어오고 있던 소녀는 니케르먼 공작을 보자마자 구슬프게 소리쳤다.

    “아빠!”

    소녀와 눈이 마주친 니케르먼 공작의 무표정이 산산조각 났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네가, 네가 왜 여기! 분명히 유모와 함께 멀리 도망 보냈는데……!”

    “당신의 저택에서 나오는 수상한 인물들을 내가 놓칠 것 같나?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늦게 이동한 것 같지만, 소용없지.”

    “흑, 흐흐…… 아빠야……! 도와줘요! 이 사람들이 날 막, 막 잡고 못 가게 하고 괴롭혔어요! 아빠아……! 흐아앙……!”

    한참을 엉엉 울던 소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를 발견하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차갑고 깊은 그녀의 눈동자는 보는 사람에게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미지의 공포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몸을 잘게 떨던 소녀는 물기 어린 눈으로 제 부친을 바라보았다. 마치 구해달라고 간절히 비는 것처럼. 니케르먼 공작은 신음을 흘리며 소녀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곧 기사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왜 이것이 당신을 부친이라 칭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 당신의 유일한 자식은 15년 전에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어버리지 않았나.”

    에머스 공작의 입에서 자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니케르먼 공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니케르먼 공녀는 그의 역린이었다.

    15년 전, 니케르먼 공작가에서 일어난 비극을 모르는 이는 없다.

    니케르먼 공작은 어릴 때부터 여러 학자들의 감탄을 자아내던 천재이자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자였다. 그의 성격은 주변 환경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한 저택, 각이 잡혀 있는 고용인들…… 그리고 하나뿐인 딸.

    공작은 자신처럼 딸을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유능한 선생님까지 고용하여 엘리트의 길을 닦아놓았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던 게 우습게도, 그의 계획은 한 가지 변수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바로 멜베린 니케르먼이었다. 니케르먼 공녀는 그와 다르게 둔재였던 것이다. 아무리 공부하고 공부해도 또래 아이들보다 뒤처졌고 성격은 순해 빠져 다른 이들이 우습게 알기 일쑤였다.

    마일로 니케르먼에게 멜베린 니케르먼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어째서 그렇게도 멍청한 거냐? 어째서 그렇게 둔하고 어리석은 거냐? 니케르먼 공작은 매일같이 딸을 핍박하고 모욕했다. 아카데미 시험 날이 다가오면 딸을 방 안에 감금시킨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했다.

    귀족들은 뒤에서 심하다, 지독하다는 말을 수군거리곤 했지만 굳이 나서서 공작의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저 즐거운 가십 중 하나일 뿐이었고 굳이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어서 귀찮아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내까지 오래전 떠나버린 마당에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멜베린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멜베린 공녀는 공작의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딸의 죽음을 목격한 공작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오래전 저택을 떠난 하인에 따르면 공작은 화를 내지도, 웃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고용인들을 시켜 딸의 몸을 수습하고 사인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자 곧바로 딸을 화장시켰다. 귀족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수치였기 때문에 죽은 이유를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물건을 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 니케르먼 공작은 소극적인 정계 활동을 2년간 이어나가다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가 이빨 빠진 늙은 사자라 불리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에머스 공작은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니케르먼 공작의 성향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그가 딸의 죽음을 슬퍼했기 때문에 그렇게 변한 것이었다면? 지금부터 그녀가 내뱉을 가설은 이를 근거로 하고 있었다.

    “의문이 들어 소녀를 살펴보자…… 이 아이의 얼굴이 멜베린 니케르먼과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걸 깨닫고 나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게 아닌가? 이 아이가 당신을 ‘아빠’라 부르는 것도, 당신이 니고르 백작을 도왔던 것도.”

    공작이 손짓을 하자 기사들은 소녀의 옷을 강제로 벗겼다.

    “꺅-!”

    “멜베린!”

    순식간에 원피스는 걸레짝처럼 망가졌다. 그리고 드러난 소녀의 등에는 다 덮을 정도로 커다란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노예의 낙인이었다.

    “아, 아빠가 보여주지 말랬는데……. 안되는데…….”

    멜베린은 몸을 드러내는 것보다 그 낙인이 부끄럽다는 듯 등을 가리려고 애를 썼다.

    “당신은 자살한 멜버른 니게르먼에게 죄책감, 혹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니고르 백작이 딸을 닮은 노예를 주는 조건으로 도움을 달라고 한 순간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 내 말이 틀렸나?”

    “자네 말이…… 다 옳네. 백작은 내 어리석음으로 잃어버렸던 딸을 돌려줬네. 심지어 한 번 새겨지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 저 지독한 낙인까지 지워준다고 약속했어. 어찌 그런 이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니케르먼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세게 그러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업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제 소유의 노예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로군.”

    니케르먼 공작이 고개를 번쩍 들어 소리 질렀다.

    “노예라고 하지 말게나……! 그 아인 노예 같은 게 아니야! 내 딸이네! 멜베린 니케르먼이라고!”

    “네 딸?”

    옅은 어둠이 가라앉은 방에서도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저 아인 멜베린 니케르먼이 아니다. 네 딸도 아니고, 노예라고 말할 수도 없지. 그녀는 납치되어 자유를 잃고 모르는 이의 저택에 감금당한 피해자다.”

    에머스 공작은 소녀에게 직접 이 저택에 있는 작은 방에 갇혀서 살았다는 것을 들었다. 그 이유는 뻔했다. 노예를 사 왔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네 저택에 오기 전에 그녀의 삶이 어땠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부모가 누구일지, 그 삶을 얼마나 그리워했을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나? 있다면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지는 않겠지.”

    노인은 허를 찔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녀는 두 사람의 말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그저 순진무구하고 애처로운 얼굴로 눈물을 맺고 있을 뿐이다. 기사들은 공작의 손짓에 의해 소녀와 남자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확실히, 보면 볼수록 멜베린 니케르먼을 닮았군. 입가에 나있는 점까지 똑같다니. 어디서 저런 걸 찾았는지 놀라울 정도야. 하지만…….’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에머스 공작은 끌려가는 마일로 니케르먼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저 그뿐이지. 얼굴이 비슷하다고 해도 결국은 다른 사람. 그렇다면 굳이 애정을 쏟을 이유가 없지 않겠나? 우스워. 가짜 때문에 저렇게 무너져버리다니.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군. 한때 귀족파의 수장으로 군림하던 남자의 말로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방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기사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집무실에는 남아 있는 것은 침묵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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