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53 (5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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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3

‘붉은 눈동자라면 분명, 에머스 공작가의…….’

섬뜩할 정도로 붉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목을 졸라버릴 것 같은 살기 어린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잠깐 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이즐리 에머스는 빙그레 웃으며 오베론에게 다가갔다. 그저 그뿐인 행동이었지만 커다란 키와 기사 특유의 단단한 몸은 마주하는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충분했다. 그의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검까지 보게 되면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잘못했다,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다, 노예 경매는 모두 니고르 백작이 제멋대로 벌인 일이다-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오베론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변명을 내뱉기도 전에 부츠를 신은 발이 그의 배를 향해 날아왔다.

오베론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서있던 나무까지 밀려 등을 부딪쳤다.

쾅! 엄청난 소리가 나며 나무가 덜덜덜 떨렸다.

“켁, 커억……! 쿨럭!”

남자는 배를 쥔 채 앞으로 꼬꾸라졌다. 눈에서는 눈물이, 입에서 침이 흘러내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제엔장…… 무슨…… 힘이…… 이렇게 세!’

그 발차기 한 번으로 온몸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 같았다. 고통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이즐리는 그의 머리를 낚아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주먹이 상대의 얼굴로 매섭게 내질러졌다.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베론은 주먹을 막기 위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기도 해 보고 상대의 얼굴에 때리려고 하기도, 손톱을 세워 팔을 긁어내리기도 했지만 커다란 손은 결코 오베론을 놔주지 않았다. 반항을 하면 할수록 손은 더 세게 그를 옥죄였고 고통은 더욱 커졌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저를 무자비하고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상대 때문에 오베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엉망이 된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내려다보는 상대의 얼굴이었다.

‘……뭐가,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야?’

울컥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 별 볼 일 없는 감정은 턱을 후려치는 충격에 의해 금세 사그라졌다. 시야가 돌에 맞은 호수처럼 마구 요동친다. 입에서 뱉어진 붉은 액체가 바닥을 적셨다. 오베론은 기도했다.

제발 누군가 이 사람 좀 막아달라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이즐리가 자신을 공격하는 일에 흥미를 잃게 해 달라고!

그러나 이즐리가 자신의 행동을 멈추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크으…….”

빈민가에서 힘들게 살아왔지만 그곳에서도 이렇게까지 맞아본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공포와 두려움만이 오베론을 지배하고 있었다.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속주머니에 숨겨둔 단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오베론이 몸을 움츠리며 그만하라고 웅얼거리자 이즐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지 않아?”

그의 눈이 반달로 접혔다.

“그 애한테는 이것보다 더 심한 짓을 했으면서 너는 겨우 이 정도로도 힘들어하고 있잖아.”

오베론이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그 애……?’

‘그 애’라는 건 누구를 말하는 걸까? 누구기에 원수라도 진 것처럼 자신을 구타하는 걸까?

노예로 팔려간 이들? 저택에 잡혀왔던 여자들? 사업적인 이유로 괴롭혀대던 많은 사람들? 남자의 손에서 고통받던 사람은 너무나 많았기에 누군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또한 짐작 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가 에머스 공자와 접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베론이 건드려온 사람들은 모두 고위 귀족과 만날 자격조차 되지 않는 하층의 사람들뿐이 었기 때문이다.

“내 임무는 널 잡아서 어머니 앞에 대령하는 거야. 근데 나는 너를 쉽게 잡을 생각이 없어. 그렇게는 못 하지. 그 애가 겪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괴롭게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절대 안 보내.”

이즐리는 말했다. 지금부터 재밌는 놀이를 하자고. 도망가는 널 쫓을 테니 이 숲을 벗어날 때까지 자신에게 잡히지 않으면 그나마 멀쩡한 상태로 보내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놀이는 무슨 놀이! 헛소리하지 마! 날 죽이겠다고? 아냐,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어. 공작이 나를 잡아서 데려오라고 명령했으니 내게서 얻어내고 싶은 정보가 있는 거겠지. 그걸 얻어내기 전까지는 나를 죽이지는 못할 거야.’

오베론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고 에머스 공자와 ‘그 애’라고 불리는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사과를 했다. 그것이 제 몸을 간수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과의 말을 끝마친 순간, 무언가가 베이는 소리가 들리고 잘린 옷자락이 허공을 날았다.오베론은 깜짝 놀라 따끔한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에 커다란 상처가 나있었다.

“흐, 흐어…… 흐아! 아아악!”

그제야 오베론은 자신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식……. 정말로 날, 죽일지도 몰라……!’

울부짖는 소리, 풀이 으깨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숲 속을 울렸다.

“시끄러워.”

이즐리는 오른손을 붙잡고 침을 흘리고 있는 상대에게 검을 겨눴다.

“누가 사과하랬어?”

달빛을 받은 검날이 하얗게 빛을 냈다. 그리고 붉은 눈도 그만큼 선명하게 빛냈다. 짐승의 것처럼.

“죽기 싫으면 도망쳐보라니까? 버러지처럼.”

순순히 잡히면 재미없을 줄 알아.

그때부터, 오베론은 원치도 않은 술래잡기에 참여하게 되고 만 것이다.

오베론은 이즐리를 등지고 미친 듯이 숲 속으로 달려갔다. 도망은 순조로웠다. 에머스 공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발걸음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베론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찾지 못한다고 방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이즐리가 나타나 오베론의 왼팔을 공격했다.

이즐리의 얼굴에 그가 가진 눈동자처럼 붉은 액체가 튀었다. 그 뒤로 오베론은 왼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실수했다.’

생각해보면 발소리가 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에머스 가의 둘째 공자는 전문적으로 검술을 배운 사람이었다.

심지어 황실 기사단에 소속되어 황제 곁을 지키게 됐을지도 몰랐던 인물이었으니 기척을 지우는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으리라.

그 후 다시 도망을 쳐서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망할, 자식…….’

오베론은 입술을 씹으며 분노로 몸을 떨었다. 다치지 않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려고 했으나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시야가 가물거리고 몸의 온도가 점점 떨어진다.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생각이 하나로 뭉쳐지지 않고 이리저리 흩어진다. 정신을 갉아먹던 고통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몸이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 사라져 가는 감각이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래, 죽음을.

죽음?

‘죽는, 다고?……내가?’

정말로? 이대로 정말 죽는 거란 말인가? 내 인생은 이대로 끝인 건가? 열심히 벌어둔 돈도 제대로 써보지 못했는데? 쉬는 일 없이 계속해서 일만 했는데? 죽도록 고생만 하면서 살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린다고? 한 번도 고생 같은 걸 해보지도 않은 놈한테 장난감처럼 굴려지다가 죽어버린단 말이야?

‘이렇게 되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게 아니었어!’

흐으, 오베론은 작게 신음소리를 흘리며 눈물을 흘렸다. 살고 싶다. 죽기 싫다. 죽고 싶지 않다. 계속 이 지상에서 발을 붙이고 숨을 내쉬고 싶다. 하지만 살아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이 자주 흥얼거리는 유명한 동요였다.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아기 토끼가 늑대에게 쫓기다가 결국에는 잡아먹힌다는 내용의…….

오베론은 한 번에 그것이 이즐리의 휘파람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긴장감으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그는 숨소리를 죽이고 힐끗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제복을 입은 소년이 칼로 수풀을 자르며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오베론이 숨어 있는 장소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다.

‘……눈치를 못 챈 건가? 아니면 눈치 못 챈 척하는 건가?’

눈치를 채지 못한 거라면 멀리 떠나 주기를, 제발.

그런 간절한 기도를 비웃듯, 이즐리는 몸을 돌려 바위 쪽으로 걸어왔다.

오베론은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숨을 죽였다.

어느새 이즐리는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다가왔다. 일어서기만 하면 바로 마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공자가 등진 채 서 있는 것을 본오 베론은 상의 속주머니에서 접이식 칼을 꺼냈다.

손잡이를 조작하자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왔다.

저 괴물 같은 공자를 죽일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죽어버릴 거라면 그전에 반격이라도 해보겠어…….’

오베론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의 목을 향해 단검을 내질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남자는 실패했다. 검이 살가죽에 닿기도 전에 이즐리가 등을 돌려 그의 팔을 잡아챈 것이다.

“이런 식이면 재미없다고 했잖아.”

퍽!

오베론은 다시 한번 배를 걷어차였다. 단검은 허공을 부유하다가 땅에 떨어졌고, 오베론은 바닥을 굴렀다.

이즐리가 그의 배를 지그시 밟았다.

“크으으……!”

“왜 이런 걸로 아파하지? 그 애는 이것보다 더 아팠을 텐데?”

“뭔데……. ‘그 애’, ‘그 애’, ‘그 애’! 그게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건데!”

이즐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궁금하면 한번 맞춰봐. 누구 때문에 이러는 걸까?”

검 끝이 오베론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아직 멀었어.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줘야 해.’

이즐리는 줄곧 발밑에 쓰러져있는 남자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모든 것에 화가 났다. 한 소녀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준 주제에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남자에게 화가 났고, 그녀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모르고 바보 같이 굴었던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단순히 자신이 싫어서가 아니라 니고르 백작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저택을 떠나려고 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가.

“맞춰보라니까!”

분노 어린 고함에 오베론은 다급하게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희미해진 이름들을 외치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지나갔다.

그러다 그의 입에서 ‘라일라’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 순간 이즐리는 머릿속에 있던 무언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검을 쥔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오베론의 목을 향해 매섭게 쏘아졌다.

팍!

“헉…… 허억…….”

오베론은 가쁘게 숨을 내쉬며, 그의 목 바로 옆에 꽂힌 검을 바라보았다.

잘 벼려진 검에 의해 베인 목에서 붉은 액체가 울컥울컥 새어 나왔다. 상처부위에서 나온 피는 가는 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이즐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검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는 정말로 눈앞의 남자를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니고르 백작의 하인을 산 채로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에머스 공작이 그에게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되겠지. 하지만 벌을 받는 게 무서워서 죽이지 못한 게 아니야. 뺨을 얻어맞든, 저택의 방에 감금당하든 다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어. 나는…… 나는 단지…….’

이즐리는 단지,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라일라의 복수를 해주자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충동적인 행동을 할 정도로 잔뜩 화가 나 있었으면서도 겨우 그런 이유로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그녀에게 얽매여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절망 어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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