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52 (5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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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52

    태초의 마법은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였다. 제국이 대부분의 영토를 집어삼키고 대륙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을 위주로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쓰임새가 바뀐다 하여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마법은 살인 무기다.

    무엇이든 본질에 가까운 쓰임새로 사용했을 때에야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리고 아서 에머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서가 백작을 향해 손을 뻗자 다시 한번 흙기둥이 솟아올랐다. 두텁고 뾰족한 기둥들은 단순히 백작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그의 한쪽 다리를 공격하여 행동을 제한시켰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운 비명 소리가 숲 속에서 울려 퍼졌다. 나무에서 쉬고 있던 새들이 깜짝 놀라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이, 이 자식이……. 내 다리를! 으, 아악! 아아아-!”

    니고르 백작은 눈물을 흘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는 다리를 향해 손을 뻗지만 차마 만지지는 못했다.

    아서는 물끄러미 짐승처럼 울부짖는 남자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평소에 사람을 상처 입히는 데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남자의 비명소리를 들어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정심도, 죄책감도 없다.

    그저 이유 모를 평온함만이 가슴에 머무를 뿐이다.

    ‘왜?’

    소년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왜 저 자가 저런 꼴이 되었는 데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거지?’ 

    아서는 제 어머니의 일을 도울 때면 최소한의 마법을 이용해 상대를 제압했다. 이번처럼 피가 튀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생긴다 하더라도 그가 원해서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일은 없었다. 고민을 하던 아서는 문득 한 하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라일라 핸슨…….’

    그래, 생각해보면 모두 그녀가 원인이었다.

    고양이를 보여주며 제 언니처럼 웃어보이던 그 소녀가, 가슴에 겨우 닿을 정도로 자그마한 소녀가, 수풀에 숨어 보는 사람의 가슴이 아릴 정도로 슬프게 울먹이던 그 소녀가…… 차마 입에 담기도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고 하자 미친 듯이 화가 났다.

    얼굴을 찌푸린 아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하 감옥에 갇혀서 고통을 당했다고 했지. 그럴 줄 알았더라면 빨리 꺼내 줄 걸 그랬어. 그곳에 갇혀 있으면 저택에서 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어.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면 안됐는데……. 젠장…….’

    그리고, 죄책감과 함께 그녀를 그렇게 만든 상대도 똑같이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일라를 불행하게 만든 원인을 짓뭉개 주고 싶었다.

    아서가 도망친 백작과 그의 하인 중 전자를 잡겠다고 나선 것은 그런 이유 탓이었다.

    다시 니고르 백작에게 시선을 준 아서는 왜 자신이 그를 상처 입혀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지를 깨달았다. 그가 라일라에게 저지른 짓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사람인 척하는 ‘무언가’라면 모를까. 그래, 분명히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닮은 괴물이다. 괴물을 해치우고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아, 아아, 아아아-! 그만!”

    백작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아파, 아파, 아프다고! 제발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백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노예 매매는 불법이다. 하지만 감옥에 가둬질 망정 이 정도로 아파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일평생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다. 하고 싶은 것은다 하고 살았고 누군가에게 크게 모욕을 당하거나 맞아본 적은 없었다.

    고위 귀족을 제외하면 모든 이들이 그의 발밑에 있었다. 그래서 제임스 니고르에게 이런 상황은 전혀 익숙지 않았다.

    제 발밑에 있던 인간들처럼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꼴이라니!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소년에게 그만 좀 괴롭히라고, 살려달라고 빌고 있다니!

    ‘추해!’

    이런 자신의 처지가 괴롭고 억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노예 경매 때문에 이러는 거야?! 어? 그러면 상대를 잘못 골랐어! 제일 처음 이 일을 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내 하인 놈이야! 난 노예 경매 같은 건 평생 생각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그런데 오베론, 그 쥐새끼가 날 살살 꼬드겨서 이 짓을 하게 만들었어. 고위 귀족만큼 돈을 잘 버니뭐니, 제국 최고의 부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느니……. 난 잘못이 없어! 나도 속았어! 나도 그 사기꾼한테 당한 거야! 똑같은 피해자라고!”

    “상관없어.”

    “뭐?”

    “뭐라고 변명을 하든 상관없다고. 내가 왜 이러냐고 물었지? 이유 같은 건 없어. 그저 네놈이 울부짖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그게…… 무슨…….”

    백작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서는 그런 남자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진짜 이유는 절대 알려주지 않을 거다.’

    라일라 핸슨이라는 하녀 때문에 이런다는 것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을 것이다.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고통받는 것이 더 괴롭기 때문이다. 이미 겪어보지 않았나. 이유를 알았을 때보다, 알지 못한 채 사랑받지 못하고 애정 한 점 어리지 않은 공허한 시선을 받는 편이 더 괴로웠던 것을.

    잠시 과거의 상념에 빠져 있던 아서가 정신을 차리곤 입을 열었다.

    “사람이 가장 큰 고통을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알고 있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백작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다. 상관없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이 아니 었으니까.

    백작은 불안한 기류를 느낀 사람처럼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한 쌍의 푸른 눈동자에 공포라는 감정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그는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를.

    ‘그래…….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맞아.’

    아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힉……!”

    백작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서는 앞으로 쭉 손을 뻗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라일라 핸슨이라는 소녀가 자신의 무엇이기에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인가? 그녀에게 단순한 호감을 가졌다고 지금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울화가 치밀 수 있을까? 일말의 동정과 옅은 호감 따위로 온몸이 달아오를 정도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 같은 이 분노를 느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동정이나 슬픔, 호감. 그런 보잘것없는 감정들이 사람을 이 정도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안심해.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 감정은 호감이 아니라…….

    “넌 사형을 당해야 할 몸이니까, 절대 죽으면 안 되거든. 나중에 포션이라도 부어주지.”

    애정일까?

    ……그리고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

    * * *

    불꽃이 타오르고 있을 때, 백작의 하인인 오베론은 저를 쫓는 괴물에게서 도망가는 중이었다.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지만 뜀박질을 멈출 수 없었다.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이건 그런 술래잡기였다.

    그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왼쪽 팔을 그러쥐었다. 다친 팔에 바람이 불어닥치자 아릿한 고통이 느껴진다. 일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베인 부위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지자 오베론의 얼굴도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피가 부족해…….’

    급하게 옷을 뜯어 지혈을 하기는 했지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베론은 몸이 차가워지고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 보여…….’

    인기척이 없다. 발에 걷어 차인 풀들이 스치는 소리도,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아까도 이런 식으로 안심하고 있다가 공격당하지 않았나.

    ‘어디 있는 거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발밑보다 주변을 탐색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던 오베론은 그만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윽……!”

    몸뚱이가 땅에 세게 부딪히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오베론은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보다 숨는 게 낫다고 판단한 남자는 기어서 앞에 보이는 거대한 돌 뒤편에 숨었다.

    등을기대어 앉은 오베론은 상처를 동여매기 위해 팔에 헐렁하게 묶인 천을 잡아당겼다. 아니, 잡아당기려고 했다.

    ‘망할, 손에 힘이 안 들어가잖아. 망할, 망할, 망할……!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오베론은 이로 천을 물고 쭉 잡아당겼다.

    ‘왜…….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뭔가 잘못했나? 아니. 잘못된 건 없어. 모두 완벽했다고. 등신 같은 귀족 놈 비위를 맞춰주며 사업을 시작했고 모든 일이 막힘없이 순탄하게 흘러갔어. 운 좋게 니케르만 공작의 마음에 들게 된 이후로는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지.’

    퉤, 팔이 아플 정도로 조여지자 천을 뱉어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딴 꼴이 되어버린 거지? 모든 건 그저 한순간의 꿈이었던 건가?’

    그는 엉망이 된 몸을 내려다보며 좀 전에 일어난 상황을 떠올렸다.

    경매는 평소와 다름없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저번과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에머스 공작과 그녀의 기사들이 사람들을 잡아가는 것을 본 그는 머리를 굴려 자신의 사업이 들켜 범죄자로 연행되게 생겼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래서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제 주인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 과정에서 죄책감이나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백작을 주인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멍청한 물주라며 우습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베론은 비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통로의 뚜껑을 열고 밖을 보고 있을 때, 그 틈새로 손이 들어오더니 그의 멱살을 잡아 쥐곤 끌어올렸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반항할 수도 없었다. 오베론은 순식간에 밖으로 끌어올려져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고통을 삼키고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제 색을 드러내는 붉은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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