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1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제복을 갖춰 입은 기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사이에서 나타난 여자가 경매장 안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그녀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모양새의 제복을 차려입고 허리춤에 기다란 장검을 차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가 평범한 기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꼿꼿이 서 있는 몸에서 범상치 않은 분위기와 위압감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마치 포식자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머리부터 발끝, 시선, 숨소리, 사소한 움직임, 그녀의 모든 것이 아니, 존재 자체가 사람의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때문인지 여자는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이도 감히 미모에 대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도, 입 밖으로도.
“로벨리카 에머스……?”
어떤 이가 무의식적으로 여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 작은 목소리를 들은 주변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로벨리카 에머스, 그녀가 누구인가.
전쟁의 화신이라 불리는 에머스 공작이 아닌가. 적군을 무참히 쓰러뜨리고 지나 온 모든 길을 피바다로 만든다는, 모든 제국민들의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 땅에 있는 그 누구도 백성을 노예로 삼고 사고팔 수 없다.”
그런 여자가 입을 열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숨을 죽였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을 제국법 45조항을 어긴 죄로 체포하겠다. 너희들에게는 변명을 할 자격도, 변호인을 구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공작은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매장을 홅는 눈동자는 불처럼 뜨거운 색채를 띠고 있지만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잡아라.”
그녀의 명령에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사람들을 하나둘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출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러던 도중 몇몇이 좌석이나 좌석 옆에 마련되어 있던 책상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인파에 밀려 벽에 부딪혔다. 책상이 넘어지고 그 위에 올려져 있던 잔들이 깨져서 바스러졌다.
은은한 클래식이 흐르던 고급스러운 경매장은 어느새 비명 소리와 고함소리로 어지럽게 변하고 말았다.
경비를 목적으로 고용된 직원들은 각자 무기를 들고 기사들에게 덤벼들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된 훈련으로 단련된 기사들에게 그들의 공격은 어린아이가 검을 휘두르며 장난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직원들은 무기를 휘두르기도 전에 쓰러졌다. 아수라장이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경매장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장소가 있었다. 바로 2층에 있는 박스석이다. 무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박스석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에머스 공작은 그곳에 앉아 있던 남자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려한 장미를 연상시키는 고혹적인 미소였건만 니고르 백작에게는 그저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 악!”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니고르 백작은 깜짝 놀라 뒤로 엎어지고 말았다.
쿵! 커다란 소리가 울리며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백작은 뒤통수와 등에 올라오는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다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네발로 기어 발코니로 향한 백작은 무릎을 꿇고 상체만 들어 올린 채 바깥을 내다보았다.
“왜……?”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달라지지 않는다. 기사들을 대동하고 경매장에 나타난 에머스 공작이 사람들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 에머스 공작이!
“왜 저 여자가 여기에 있는 건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설마 내 사업을 알고 여기 나타난 건가?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이때까지 잘 숨겨 왔단 말이야!”
하인과 뒷배를 자처하는 니케르먼 공작의 도움으로 증거는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곳에 숨겨두었고, 증인이 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백작은 자신의 사업이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고, 모든 일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에머스 공작의 행동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지 않은가.
‘도망, 도망쳐야 해. 잡히면 죽는다……!’
노예제도는 무려 평화주의자로 손꼽히던 선선대 황제가 무력까지 사용해 폐지했던 제도였다. 잡히면 최소 사형이다. 백작은 사형장 위에서 밧줄에 목이 매달린 채 발버둥 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남자는 공포로 떨리는 다리를 애써 세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은 자신의 하인에게 탈출 준비를 명령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방금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서서 와인을 따르던 하인, 오베론이 보이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이 박스석에 숨어 있던 탈출구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 자식이……!”
니고르 백작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감히, 제 주인을 버리고 도망을 가? 쥐새끼 같은 놈……. 일자리를 주고 사업을 이 정도로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배신을 해? 나만 아니었으면 도둑질이나 하고 살았을 더러운 쓰레기장 출신 주제에! 여기서 탈출하면 죽여버리겠어.’
백작은 근처에 있던 책상을 들어 벽에 던져버렸다. 제임스 니고르는 한참 동안 씩씩거리다가 급박한 상황을 상기하고 겨우 화를 진정했다.
‘에머스 공작과 기사들이 2층에 오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 해.’
그는 재빨리 탈출구 쪽으로 발을 놀렸다. 그 안에는 지하로 향하는 사다리가 늘어져 있었다. 탈출구에 드리워있는 어둠이 짙어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았다.
백작은 두려운 마음을 눌러 담고 조심스레 아래로 내려갔다.
100kg이 훌쩍 넘는 몸을, 근육 하나 없는 흐물거리는 팔다리로 지탱하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백작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다리에 매달리듯 몸을 움직였다. 벽에 고정되어 있던 사다리가 백작이 움직일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덜덜 떨려왔다.
이윽고 그는 발을 디딜 수 있는 평평한 돌바닥에 도달했다. 백작은 벽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좁은 복도를 걸어 나갔다. 복도 끝에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 천장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자 풀밭이 보였다. 남자는 슬쩍 주변을 둘러본 후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백작은 경매장을 등지고 정면에 보이는 숲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숲 안쪽에 타고 왔던 마차가 있어! 그걸 타고 여길 벗어나면 될 거야.’
탈출구 쪽과 숲 속에는 이상하리만큼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보통 범죄자를 잡으려고 할 때면 기사들에게 범죄자가 있을 만한 장소나 도망칠 만한 곳을 철저히 감시하라고 시키는 법이었다. 숲은 경매장과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수색 범위에서 제외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니고르 백작은 도망치느라 바빠 이상한 점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밤의 어둠이 잔혹한 사건이 일어난 풍경을 숨겨준 탓에 그가 묘한 위화감을 느낀 것은 마차가 서 있는 장소에 도착하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헉, 헉……."
백작은 몸을 숙이고 튀어 나가려고 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오랜만에 무리를 한 탓에 무릎이 삐걱거렸고 다리가 미친 듯이 떨려왔다. 그는 비처럼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로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떠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마차가 눈앞에서 있었다. 백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헉, 헉……. 혹시 그, 후우……. 그 쥐새끼가 타고 도망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 헉, 다행이군.”
남자가 마차를 향해 걸어가려던 순간- 콰직! 갑자기 마차가 서 있던 위치에서 거대하고 날카로운 흙기둥 여러 개가 쏟아져 나왔다. 그 충격으로 마차는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나무파편이 흙바닥에 떨어지고 가루가 허공에 휘날린다. 니고르 백작은 엉덩방아를 찧고 멍하니 박살 난 마차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내 마차가 부서졌다고? 이제, 이제 어떻게 도망을 가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뭘 해야 하지?
백작은 몸을 덜덜 떨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제 마차를 박살 낸 물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 그것보다…….’
저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어떻게 생겨난 거지? 저런 흙기둥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런 게 가능한 건…….
‘마법……!’
그래, 오직 마법뿐이다.
마법이라 생각하자 니고르 백작의 머리에 스치는 이가 하나 있었다. 공작의 아들 중에는 마법사가 하나 있었다. 뛰어난 실력으로 마탑의 차기 후계자 중 하나로 선택받았으나 마탑주가 되면 평생 그곳에서 지내야 된다는 이유로 모든 걸 포기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천재.
“그걸 타고 도망갈 생각이었나?”
아서 에머스.
백작은 퍼뜩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푸른 후드 아래 기사단의 제복을 갖춰 입은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걸음걸이는 무척이나 우아하여, 누구라도 그가 귀족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건 안 되지.”
그가 후드를 벗어내자 금발 머리가 밤바람에 흩날렸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얼굴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얗게 빛을 내는 그에게서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덧없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니고르 백작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아서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가축, 혹은 벌레 이하의 무언가처럼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다리를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잡힐 수는 없어. 조금 아깝긴 하지만 그걸 사용해야겠어.’
그는 품에서 두 개의 마법 스크롤을 꺼내 겹쳐 찢었다. 그러자 찢어진 스크롤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주변을 하얗게 덮어버리고 허공에서 얼음 화살이 생성되어 추격자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파바박, 화살이 어딘가에 박히는 소리가 들려온 후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된 거지? 죽은 건가?’
백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연기가 너무 짙어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최소한 행동불능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
바보 같을 정도로 희망적인 상상을 한 백작은 이때다 싶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뒤로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사이, 아서는 연기 속에서 손을 가로로 가볍게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자 바람이 휘몰아치며 그를 두르고 있던 연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백작이 쏜 얼음의 화살이 나타난다. 총 스물네 발의 화살들은 그의 주변에 둘러진 투명한 배리어에 꽂혀 있었다. 고슴도치 같은 꼴이었다.
“마법사한테 스크롤을 사용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지.”
어차피 스크롤도 마법사가 만든 것을.
그 말을 끝으로 화살은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