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50 (5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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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0

차가운 한기와 딱딱한 바닥, 벽면에 달린 횃불만이 겨우 앞을 비추는 어두운 공간에서 로버트는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을 다잡고 몸을 일으킨 아이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 여기는 어디지……?”

좁은 방이었다. 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사면이 거친 돌벽으로 막혀있었다. 그 공간의 가장자리에 지푸라기가 풍성하게 쌓여 있다. 그 무리에 속하지 못한 지푸라기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 명쯤 됐을까, 낯선 얼굴의 아이들이 몸을 웅크린 채 따개비처럼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중 한 아이와 눈이 마주친 로버트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아이의 눈이 죽은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보는 그 눈은 로버트에게 미지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철컹!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던 로버트는 무언가에 등을 부딪치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소년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낯선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난 아까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이랑 놀고 있었는데?’

그래, 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로버트는 자신의 동네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놀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노인을 따라 골목길로 들어간 순간, 그는 무슨 일인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이른다.

로버트는 자신에게 닥친 일이 무섭고, 혼란스러워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는 훌쩍거리면서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문이다!’

로버트는 쏜살같이 문가로 달려갔다.

덜컹, 덜컹, 덜컹, 덜컹!

로버트는 문고리를 쥐고 흔들어보았다.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굳세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그 소리의 주인공은 로버트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귀찮은 듯이 한숨을 내쉬곤 저 멀리 떠나버렸으니까. 로버트는 엉엉 울면서 점점 작아지는 발소리를 향해 소리쳤다.

“가지 마세요! 이 문 좀 열어주세요! 제발요!”

그때, 소년의 뒤편에서 짜증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시끄럽네.”

로버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구석에서 등 돌려 자고 있던 아이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너 때문에 잠을 못 자겠잖아!”

혀를 찬 소녀는 로버트 옆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깔려있던 지푸라기가 바스락거리며 소녀의 몸 아래에서 짓눌렸다.

“야, 그만 질질 짜.”

“흐윽…….”

소녀는 지저분한 소매로 로버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소녀는 젖은 소매 쪽을 두세 번 접고는 로버트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로버트가 조금 진정했을 무렵 소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갑자기 여기 오게 돼서 많이 놀랐나 봐? 너 이곳이 어딘지 궁금하지?”

로버트는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노예 경매에 나가기 전에 아이들을 대기시켜놓는 장소야.”

“노, 노예?”

노예라니!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이야기에서나 들어봤던 단어였다.

로버트는 이를 달달 떨었다.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노예 경매는 오래전에, 황제 폐하가 금지했다고 들었는데…….”

“거짓말 아니거든? 이딴 걸로 왜 거짓말을 하는데? 너 같은 걸 속여서 뭐한다고. 그리고 금지돼서 뭐? 황제가 금지시키든, 신이 하지 말라고 하든, 어차피 할 놈은 하는 걸!”

소녀가 상체를 일으켜 짜증 어린 얼굴로 로버트를 째려보았다. 그러다 한숨을 쉬며 다시 바닥에 누워버렸다.

“믿기 싫어도 현실이야……. 울보, 너 이름이 뭐야?”

“……흑, 울보 아니야…….”

“싫으면 찌질이로 하든지. 난 루시야. 성은 없어. 고아거든.”

"……."

“나는 빈민가에서 태어나서, 왕초 밑에서 소매치기를 하면서 살았어. 평소처럼 작업을 하는 도중에 검정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한테 들켜버렸지 뭐야. 그 사람한테 잡혀서 골목길로 끌려간 후로는 기억이 없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여기였어. 너는?”

“……나는, 로, 로버트…… 훌쩍, 커터. 나도 너랑 똑같아.”

로버트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곤 루시처럼 여기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털어놓았다. 한번 말문이 트이자 다른 이야기들도 술술 흘러나왔다. 그 뒤도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장소에 대한 것부터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또 뭔지, 가족들과 어떻게 지내왔는지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그 과정에서 로버트는 가족들이 떠올라서 슬퍼지기는 했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무서운 애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로버트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의 꿈을 꿨다. 동그랗게 부푼 배를 가진 어머니와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들과 공을 차며 뛰어놀았다. 농사를 하는 아버지에게 새참을 가져다주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아주 행복한 꿈이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운 풍경들은 사라지고 낯선 방의 천장만이 소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

로버트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직도 여기야. 전부 꿈이었어…….’ 

몸을 옆으로 누인 로버트는 가슴을 쥐었다. 그리움과 슬픔, 괴로움이라는 바늘이 그의 심장을 미친 듯이 찔러댔다.

‘집에 가고 싶어……. 엄마랑 아빠가 보고 싶어.’

천장을 보며 훌쩍거리던 로버트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깼냐?”

“루시……?”

루시는 커다랗게 하품을 하고 말했다.

“너 배고프지 않아?”

마침 꼬르륵, 로버트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지.’

루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의기양양하게 웃더니 로버트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 간수가 막 먹을 거랑 물을 놓고 갔어.”

문과 가까운 곳에 아이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루시가 그들 중 몇몇을 거칠게 밀쳐내자 로버트는 그들이 둘러싸고 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중심에 커다란 나무 그릇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하나엔 물이 들어 있었고, 다른 하나엔 음식이 들어 있었다. 아이들은 그 음식을 손으로 쥐고 허겁지겁 입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아이들의 더러운 모습과 음식이 들어 있는 그릇을 본 로버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돼지죽……?’

계란 껍데기, 풀, 콩, 잘린 빵 조각, 수프 등 먹다 남은 음식물이 그릇 안에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는 다른 아이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돼지죽 같은 음식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저런 걸 어떻게 먹어!’

로버트는 차마 저 음식들을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아 무리에서 멀리 떨어져 털썩 주저앉았다.

벽에 기댄 로버트는 자신의 손등에서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게 뭐야?’

로버트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언제부터 있던 걸까? 로버트는 그림을 지우기 위해 손등을 마구 비볐다.

‘이 정도면 됐겠지.’

로버트는 살갗이 뻘겋게 변할 때까지 마찰을 일으키다가 손을 뗐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뭉개진 곳 하나 없이 로버트의 손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로버트는 곧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문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뒤, 식사를 마친 루시가 로비트 옆에 앉았다.

“저기 루시.”

로버트는 루시에게 자신의 손 등을 보여주며 다급하게 물었다.

“나, 나 손등에 이상한 게 새겨져 있어. 이게 도대체 뭐야?”

“너 진짜 둔하다. 이제야 그걸 눈치챈 거야?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새겨져 있었을 텐데.”

루시가 조소했다.

“그건 노예의 낙인이야.”

로버트의 얼굴이 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렸다.

“뭐, 뭐야! 그런 걸 왜 내 몸에 새긴 거야? 이거 지울 수 있지? 그렇지?”

“글쎄. 나도 잘 몰라. 마법으로 그려져서 절대 지울 수 없다고 하던데. 하지만 마탑의 마법사들이라면 지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울 수 있다고 해도 돈이 많이 들걸?”

“그럼 결국은 못 지우는 거잖아…….”

로버트는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렸다.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진짜 싫어……. 짜증 나……. 왜 그딴 게 내 몸에 있는 건데……! 더 이상 여기 있기 싫어. 언제까지 이렇게 더럽고 이상한 곳에 있어야 하는 거야. 빨리 누가 와서 꺼내 줬으면 좋겠어. 경비병들은 언제 오는 거야?”

루시가 무심하게 말했다.

“아무도 안 구해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때까지 경매가 두 번 정도 열렸지만 아무도 온 적이 없어.”

“왜?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사라졌으면 부모님들이 신고를 했을 거 아니야. 그럼 누군가 우리를 찾으러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신고했겠지. 근데 그래도 아무도 안 구하러 왔다니까? 귀족들이나 돈 많은 평민들도 노예 경매에 참여한다고 했어. 그 정도로 판이 크면 우릴 찾으러 온 경비병을 돈으로 매수해서 내쫓아버리는 것도 쉬울 거야.”

"……."

“여기 있는 애들도 누군가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다가 현실을 깨닫고 전부 포기했어. 그러니까 너도, 괜한 희망 같은 거 품지 않는 게 어때?”

그것은 로버트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진실이었다.

“거짓말이지……?”

그래서 그는 눈앞에 드리워진 진실을 애써 거부하려고 했다.

루시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분명히 누군가 우리를 구하러 와줄 거야. 엄마랑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돌아갈 수 있을까?’

로버트가 눈물을 흘렸다.

* * *

시간은 순식간에 흐른다. 어느덧 로버트가 이 장소에 온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그날 저녁, 남자가 로버트를 비롯한 아이들을 방에서 내보냈다. 마침내 그날이 온 것이다. 오늘은 경매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이들은 차가운 복도를 지나고 높다란 계단을 올라 어딘가로 향했다.

복도의 끝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하얀빛이 새어 나왔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지내온 아이들에게는 조금 따갑게 느껴지는 빛이었다.

로버트는 입구로 걸어갔다. 두터운 천이 그의 몸을 쓸어내리고 뒤로 젖혀졌다. 더욱 강해진 빛은 뾰족한 바늘처럼 안구를 쿡쿡 찔렀다. 로버트는 눈을 감고 따끔거리는 감각이 사라졌을 때쯤 다시 눈꺼풀을 열었다. 그러자 넓고 고급스러운 경매장이 그를 맞이해주었다.

아이들이 서 있는 무대 아래에 몇십, 아니 몇백이나되는 사람들이 좌석에 앉아 물건을 보듯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직원들이 와인잔에 든 샴페인을 손님에게 건네주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은 손에 든 번호판을 만지작거리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아래를 바라본 로버트는 갑자기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노란 조명을 쐬던 순간, 훅 현실감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정말 팔려가는 거구나.

그는 자신이 노예로 팔려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던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은 달랐다. 막상 무대 위에 서자, 로버트는 이 상황이 너무나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무대 한쪽에 마련된 단상, 그곳에서 있던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자, 이번 상품들은 각각 20 실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서 있는 순서대로 경매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 다. 마음에 드는 상품이 있으면 번호표를 들고 구매 가격을 외쳐주세요!”

로버트는 불안한 듯 눈을 돌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저 멀리,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커다란 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 문을 통해 밖에 나가거나 안으로 들어왔다. 저 문이 바로 바깥과 통하는 유일한 출입구인 것이다.

로버트는 그 문을 보는 순간, 다시 한번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오기를 바라게 되었다. 누군가 저 문을 열고 많이 고생했다며, 구하러 왔으니 이제 안심하라고 말해주기를…….

‘아니야…….’

로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기적 같은 일……. 일어나지 않을 거야! 루시가 말했잖아. 그동안 아무도 아이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고. 정말 그 아이 말대로 우릴 구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희망을 가져봤자 다시 실망하기만 할 것이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이곳에서 노예로 팔려, 평생을 괴롭게 살아갈 것이다. 로버트는 눈을 꾹 감고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래야만 지금의 상황과 앞으로 일어날 참혹한 일들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퍽!

그때, 딱딱한 물건이 박살 난 것같은 소리와 함께 경매장의 문이 열렸다.

마치 기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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