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9
그것을 깨닫자 사그라졌던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유리아를 이곳에서 탈출시키고 싶었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도 괴로웠지만 그 아이도 괴롭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오베론의 이야기 속 유리아는 항상 니고르 백작에게 제대로 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가 뭔데 내 가족, 유리아를 그렇게 대하는 거야? 나도 그 아이를 한 번도 때린 적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나는 눈을 굴려 의무실 안에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백작의 명령으로 의사는 내게 수액이나 진통제만 좀 주입할 뿐 의무실에 거의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백작에게 내 상태를 보고하기 위해 간간이 찾아오는 오베론이나 의사,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가끔, 아주 가끔 문틈으로 나를 보고 가는 알렉산더를 제외하면 남의 눈을 생각하며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망가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의무실 찬장을 뒤졌다.
탈출을 위해서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돌려놔야 했다. 그래서 찬장 안에서 진통제를 찾아 입안에 욱여넣고 의사가 하던 대로 약이 들어 있는 주사를 팔에 찔러 넣었다.
그제야 몸을 불태우는 것 같은 고통이 사그라진다.
무기로 쓸 만해 보이는 메스를 챙기고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때, 타이밍 나쁘게 오베론이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매섭게 몰아붙이던 오베론은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서워할 때가 아니다.
무서워도, 죽을 만큼 무서워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공포를 삼키고 메스를 그가 있는 쪽으로 들이밀었다.
“헉, 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오베론이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몸싸움을 벌였고 서로를 해치려고 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나였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당한 사람은 오베론이 아니라 내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동 없이 누워 있는 그를 보고 있자 몸이 떨리고 가슴이 턱 막혀왔다.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그것이 격렬한 몸싸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탓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잠시 제자리에 선 채 숨을 골랐다. 이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을 수는 없다.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나는 새로운 메스를 쥐고 도망치듯 의무실을 벗어났다. 의무실을 나가자 바로 하인이 보였다. 그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벽으로 몰아붙였다. 누군가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고민할 겨를은 없다.
나는 재빨리 상대를 제압했고, 당황한 남자는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그대로 꼬꾸라져버렸다.
그 뒤로 나는 사람들의 눈을피해 저택을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고용인이 백작의 성격을 버티지 못해 나가 버렸기 때문에, 저택 안은 휑했다. 내게는 행운인 일이었다. 의무실을 벗어났으니 이제 유리아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유리아가 지내고 있는 장소를 몰랐다. 오베론은 간간히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어디에서 지내는지에 관해서는 꺼내놓은 적이 없다. 일일이 방을 다 뒤져 보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크다.
사람 하나를 위협해 물어봐야 하는 걸까? 이것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갑작스레 욱신거리는 고통을 느꼈다.
진통제의 효과가 슬슬 떨어지는 걸까? 약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겠다고 진통제를 마구 들이부었다가 오히려 효과가 반감된 걸지도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고는 메스를 고쳐 쥐었다. 그러다 나는 복도가 꺾이는 장소에서 알렉산더를 마주치고 말았다. 메스를 들고 그에게 달려들기도 전에 그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항복.”
알렉산더는 백작에게 내 탈출을 알리는 대신,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는 곧바로 탈출 방법과 유리아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털어놓던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영지를 쉽게 벗어날 수 있도록 마차도 준비해드리죠.”
“……거짓말이지?”
“거짓말 아닙니다. 전 지금 진실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놈을 어떻게 믿는데? 네가 날 도울 이유가 없잖아. 백작 앞잡이 새끼가……!”
“왜 돕느냐고요? 불쌍해 보여서라고 하면…….”
알렉산더는 내 얼굴을 훑었다.
“……당연히 믿지 않으시겠군요.”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내 손목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나는 알렉산더에게 안겨 벽 뒤로 숨게 되었다.
“뭐하는……!”
“쉿, 하녀입니다.”
벽에 살짝 고개를 내밀자, 정말 하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진작 소리를 내 하녀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그러지 않고 나를 돕자 아주 조금 경계심이 풀렸다.
그렇기에 하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그가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줬던 것이다.
“제가 왜 당신을 돕느냐고 했죠?”
“……그래.”
“그럼 말해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당신이 두 번째네요.”
알렉산더는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누나가 하나 있었습니다. 저랑 다르게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존경하는 사람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언제나 누나를 고를 정도였습니다. 저희 집은 한때 명망 높은 귀족가였지만 몇 세기 동안 천천히 망해가고 당시에 이르러서는 허울만 남은 상태였죠. 그래도 과거의 영광을 살려보겠답시고 있는 살림, 없는 살림을 모아 누나를 아카데미에 보냈습니다.”
꿈꾸는 듯한 목소리였다.
“……만약 누나가 아카데미에서 그런 일을 겪을 줄 알았더라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 목소리가 어떤 감정을 싣고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제 누나는 동기인 제임스 니고르와 그의 무리에게 끔찍한 짓을 당했습니다. 제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됐을 때, 누나는 다시는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렸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전 복수를 위해 이 저택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제게서 소중한 가족을 앗아갔으니까요. 그것만을 위해 모든 불의를 참고 동정심 같은 감정들을 참아왔는데…….”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으나 마주한 눈에는 분노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당신들을 보고 있으려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와서라도 당신을 도우려는 것뿐입니다.”
눈을 내리까는 알렉산더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들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돌에 맞은 수면처럼 파동을 일으키던 기억들은 이내 하얗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에 재빨리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하얀 천장이 보였다.
하얀 방, 약 냄새와 푹신한 침대. 의무실이었다. 나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옆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내가 누운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유리아가 내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계속해서 뇌를 찔러오는 두통과 혼미한 정신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었지만 나를 보고 있는 유리아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걱정 말라는 의미로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