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8
다시 막이 올랐을 때 나는 갓난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인에서 아기로, 서민정이라는 이름에서 라일라 핸슨으로, 대한민국에서 빈센 제국으로. 나를 구성하던 모든 것이 달라져있었다. 한순간에 낯선 환경에 떨어졌다.
“아, 눈 떴다. 유리아 네 동생이야. 귀엽지?”
“당연히 귀엽지. 당신을 닮았으니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새로운 가족은 따뜻하게나를 환영해주었기 때문이다.
즐거운 나날들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이별과 비극이 찾아온다.
정든 고향은 새로운 통치자에 의해 망가졌다.
웃음소리만 가득하던 마을에는 사람들의 비통한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부모님의 무덤을 외면하고 가방에 짐을 싸게 된 것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지를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거의 매일 열중해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실패했다.
탈출을 돕기로 약속한 병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도중에 니고르 백작의 사람에게 붙잡히고 만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우스울 따름이다.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정신을 차렸다. 내 몸은 의자에 단단히 고정되어있었다.
고개를 들자 내 앞에 무료한 얼굴로 앉은 오베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베론과 나 사이에 있는 책상 위전 등만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옅은 노란색으로.
그의 입이 움직인 것은 의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구 몸을 비틀던 것을 그만두고 오베론을 째려보았을 때였다.
“난 말이야. 빈민가에서 태어나서 자랐어.”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 왜. 제국의 치부 아니면 쓰레기장이라고 불리는 곳 있잖아.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귀족의 말 한마디면 단체로 약 처먹은 쥐새끼처럼 우수수 죽어나가곤 했지. 아니면 지팡이로 호되게 얻어맞아 불구가 되거나……. 그러니까 나만큼 귀족 무서운 걸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이거야.”
딱, 그가 펜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어? 위대하시고 대단하신 귀족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무서운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거든.”
그가 내 손을 그러쥐고는 웃었다.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숨이 거칠게 내쉬어졌다.
백작의 저택에서 있었던 시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지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 정말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다. 끔찍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와중에, 오베론은 가끔 자신의 이야기를 해줬다. 처음에는 내게 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후에 생각해보니, 백작이 나를 없애고 싶어 했으니 자신의 옛이야기를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대부분이 그가 빈민가에서 살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의 소년은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지만 빈민가 출신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영영 쓰레기장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뒷골목 깡패로 일하던 그는 빈민가에서 자주 일어나던 납치 사건에서 사업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오베론은 제 이야기를 꺼내놓는 와중에도 그게 무슨 사업인지 절대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제가 생각해도 괜찮은 사업이었고, 필요한 건 돈 뿐이었다. 그래서 멍청한 투자자를 구해 일을 진행하기로 한다.
그 투자자가 바로 제임스 니고르였다. 두 사람이 수도에서 조그맣게 시작한 사업은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다.
수많은 현금을 끌어 모은 것도 모자라 높은 분의 눈에 들어 거대한 뒷배를 얻기도 했다.
“재밌지 않아? 평민들은 이런 이야기 좋아하잖아. 밑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온 이야기.”
오레론은 잔혹하게 웃었다.
지하 감옥에서 눈을 뜬 뒤 가짜로 나를 저택 밖으로 내보내는 행세를 하거나, 저택의 의무실로 옮겨가기 전까지 계속 그랬다.
지옥 같은 시간을 겪으며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어떤 감정도 폭력 앞에서는 쉽사리 매몰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고 싶은 마음도,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소리 지르는 분노도, 유리아가 나를 구하기 위해 저택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후 느끼는 슬픔도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만다.
모든 것이 무너져 껍데기만이 덜렁 남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용서를 비는 것뿐이다. 비명을 지르느라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계속해서 용서를 비는 것뿐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미안합니다.
무서워요.
용서해주세요.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뭘 하면 저를 용서해주실 건가요?
“편지.”
오베론은 바닥에 펜과 종이를 던져주고는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손목을 옥죄는 족쇄가 풀린 나는 바닥을 기어 물건을 쥐었다.
“백작님께서 내게 편지를 쓰라고 하셨어. 대충, 저택 밖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만 써두면 될 거야. ‘언니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언니가 보고 싶어요’이렇게.”
그래서 나는 수십 통의 편지를 썼다.
유리아, 저택에서 잘 지내고 있어? 난 잘 지내고 있어. 네가 없어서 조금 외롭지만…… 그래도 괜찮아…….
“흡, 끄윽, 흐어…….”
그런 바보 같은 내용들을 썼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써 내려갈 때마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바보 같았고 어이가 없었고, 그저 유리아가 원망스러웠다. 이 모든 일이 그 아이 때문에 일어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유리아가 백작의 눈에 띄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이런 꼴을 당할 이유는 없었을 텐데.
그 아이만 없었으면 내가, 내가 여기 잡혀올 일도 없었을 테고, 가짜 편지나 쓰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 펜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유리아 탓을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밉고 미워서 하루에도 몇 번씩 유리아를 머릿속에서 괴롭혔다.
하지만 왜일까.
유리아를 원망하면 원망할수록,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더 그 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어지는 까닭은. 점점 더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그리워지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의무실에 실려가 오랜만에 유리아를 보게 되었을 때는 가슴이 벅차올라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유리아에게 느꼈던 감정이 미움이나 증오였는지, 심장을 저릿하게 만드는 강렬한 열정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감옥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유리아가 미친 듯이 그리웠고, 지금 이 순간도 몸만 괜찮았다면 그 아이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말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유리아의 눈 밑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가 걱정되고 전보다 더 마른 몸에 슬퍼지고 만다.
그래, 아마 이건, 정말 믿기지 않지만, 사랑이었다.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화를 냈어도 그만큼 미워하고 원망했어도 유리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무너지고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 감정들. 누군가를 아껴주고 소중히 해주고 싶은 마음은, 누군가를 떠올리기만 해도 애틋해지는 사랑은 그토록 괴롭던 시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내 마음속에서 숨어 있던 것뿐이다.
그래, 어떤 감정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