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47 (4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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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47

    공작의 보좌관은 잔에 미지근한 차를 따라 유리아에게 건넸다. 숨 좀 돌리라는 의미였다.

    “……감사합니다.”

    깊게 심호흡을 두어 번 정도 한 유리아는 차를 홀짝이고 내려놓는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저택에서 탈출했는지. 누가 그들을 도와줬는지, 탈출 후 어떻게 됐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미 노예와 관련된 이야기는 끝났지만 집무실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만 각자 듣는 목적이 틀렸다. 보좌관은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비극적인 이야기에 심취해 있었고, 공작은 혹여나 더 일에 관련된 내용이 나올까 몰라 유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 문장도 빠짐없이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감정이 일반인보다 심하게 무딘 그녀는 유리아의 이야기에서 어떠한 감정적인 감상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화자의 입이 다물릴 때면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기며 쓸 만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할 뿐이다.

    그에 비하면 세 공자는 무척이나 흥분해 있었다. 호감이 가는 소녀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소녀가 끔찍한 일을 당하며 세상 누구보다도 불행해지는 이야기에 분노를 느끼지 않는 소년은 없으리라.

    이즐리는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리고 손아귀에 쥐고 있던 소파의 손잡이를 바스러뜨렸다. 아서는 팔짱을 낀 상태로 분노로 몸을 떨었으며, 오세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세 사람 모두 제임스 니고르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미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복수하고 있었다. 복수의 방법은 각자 달랐겠지만 그것만은 공통점일 것이다.

    그 사이, 이야기 속 유리아는 자유로워진 몸으로 방을 나서고 있다. 동생과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 손을 맞잡고는. 그 온기가 닳고 갈라지고 썩어버린 유리아의 마음을, 그 조각을 정성 하나하나 꿰매 주었다.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어릴 무렵 유리아는 방문 옆에 서 있던 알렉산더를 보게 된다.

    짙은 갈색 머리에 녹색 눈, 짙은 눈썹이 돋보이는 훤칠한 남자는 분명히 백작의 보좌관이었다.

    별장에 오기 전, 백작저에 있을 때 유리아는 가끔 알렉산더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언제나 유리아를 피하기 바빠 보였다. 눈이 마주치면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고, 우연히 스치기라도 할라 치면 몸을 빼곤 했다. 그래, 마치 그녀에게 닿으면 오염될 것 같은 사람처럼 굴었다.

    “오랜만입니다.”

    분명 그랬을 텐데. 알렉산더는 언제 그랬냐는 양 담담한 태도로 유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도망가려는 걸 들킨 건가……?’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라일라가 유리아의 손을 세게 쥐었다.

    “괜찮아. 날 여기까지 데려와준 사람이야.”

    "……."

    “우릴 도와주겠다고 했어.”

    “……응.”

    누구보다 수상하고 믿기지 않는 남자는 라일라와 유리아의 탈출을 도와주었다. 타고 갈 마차를 준비해주었고, 높다란 성벽을 지나칠 방법을 찾아주었다.

    라일라가 마차에 올라타고 뒤이어 유리아가 마차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녀는 알렉산더가 알려준 마차 안의 비밀 공간에 숨으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저흴 돕는 거예요? 당신은 백작의 보좌관이잖아요. 저흴 도와 봤자 당신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그건, 그쪽 동생분께 듣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곳을 나가면 어디로 가실 겁니까? 정착할 곳은 있나요?”

    “아…….”

    유리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탈출하는 것에만 급급해서 정해진 게 없는데……. 만약 있다고 해도 저 사람한테 말해줘도 되는 걸까?’

    유리아가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라일라가 대신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의 집에 갈 거예요. 에머스 공작령으로…….”

    마부에 의해 좌석 안에 숨겨진 비밀공간에 들어간 라일라는 육체의 괴로움을 억지로 꾹꾹 눌러 담는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저택 안에 있을 때만 해도 쌩쌩해 보이던 소녀는 마차에 타고난 뒤에야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알렉산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마차의 문이 닫혔다.

    그리하여 자매는 무사히 영지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탈출했다고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 었다. 라일라는 며칠 동안이나 죽을 듯이 앓았다.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알렉산더에게 받은 돈으로 포션을 사지 않았으면 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포션은 비쌌다. 유리아가 얼마 없는 돈으로 살 수 있던 것은 저급 포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라일라를 회복시킬 수는 있었지만 몸에 난 흉터까지 온전히 치료할 수는 없었다.

    덕분에 아직도 라일라의 등에는 흉터가 몇 개나 남아 있었다. 유리아는 그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미어지고는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과거의 일을 말할 때마다 모르겠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동생의 얼굴이었다. 라일라는 일어난 이후 대부분의 기억을 잃었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몇 가지의 추억과 가족에 대한 것, 그리고 저택에 잡혀가 오베론에게 괴롭힘 당한 일뿐이다. 그마저도 흐릿하다고 했다.

    ‘잊어버릴 거라면, 저택에서의 일을 전부 잊어버리면 좋았을 텐데…….’ 

    세상은 원하는 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유리아가 계속해서 공작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나가는 동안, 라일라는 단단한 철창을 붙잡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나는 눈을 감고 철창에 머리를 기댔다. 상처 난 이마는 작은 충격에도 커다란 고통을 가져왔다.

    “……그래, 내가 틀렸어.”

    저렇게 강한 아이를 잘못 건드리면 깨질 물건처럼 대해왔다는 게 우스웠다.

    내가 해야 했던 일은 유리아를 저택의 기억에서 멀리 떨어뜨려놓는 게 아니라 마주 보게 하고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줘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유리아를 여린 아이라고 제멋대로 확신하고 공자들의 일이나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 이직 건에서 소외시키는 게 아니라 함께 상의하고 일을 헤쳐 나가는 게 옳은 게 아니었을까? 그게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유리아를 내 곁에서 눈물을 흘리던 어린아이로만 보고 있었다. 변명을 해보자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그 아이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걸. 게다가 이미 굳은 이미지를 지우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나이가 많은 사람은 쉽게 편견에 사로잡힌다고 하지 않던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고는 눈을 떴다.

    용기를 낸 유리아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기억을 되찾아서 공작에게 필요한 내용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소설의 내용을 기억해내 전생의 일을 알아내고 지금 삶의 기억까지 완벽하게 떠올리게 되면 앞으로의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동안은 기억을 찾는 일에 열중하지 않았다.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까지 다다르자 반드시 과거의 기억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철창을 쥐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몸을 통해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무서웠다. 과거의 기억을 찾게 되면, 당연히 저택에서의 일까지 들추게 될 테니까. 그러나 유리아도 용기를 낸 마당에 한참 어른인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앉아 있기만 하는 꼴은 너무나 우스웠다.

    철창에서 손을 떼고 두 손을 마주 쥐고 깍지를 꼈다. 진정, 진정하자. 무서워하지 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기억을 되찾는 일이니까. 어떻게 기억을 되찾으면 좋을까. 나는 등을 돌렸다. 그러자 거칠고 단단한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에 충격을 받으면 돼.”

    실제로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을 때마다 기억이 조금씩 돌아왔다. 레몬 무리와 싸우다 머리를 다쳤을 때 처음이 세계가 소설 속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벽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는 과거의 기억이 약간이나마 떠올랐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해야 할 행동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벽으로 다가갔다. 두 손을 벽 위에 올리자 차가운 냉기가 흘러들었다.

    “……후…….”

    심호흡을 하고 이를 악물었다. 괜찮다. 고통은 한순간일 것이다. 이를 상기하고 생각하던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퍽!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며 눈앞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뒤이어 찾아오는 따끔한 느낌에 소리를 지를 것만 같다.

    퍽!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삼키고 다시 한번 머리를 움직였다. 퍽, 퍽, 퍽! 아직, 아직인가? 기억이 돌아오려면 아직 먼 걸까?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마의 감각이 점점 무뎌졌다. 이젠 고통보다 열기만이 느껴졌다. 같은 행동을 반복할수록 안개 낀 듯 흐릿했던 기억들이 점점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깥에 서있던 기사의 짜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또 왜 이래?! 젠장……. 정신 나갔군…….”

    공작에게 잘 대해 달라는 소리를 들은 탓인지. 무심하던 남자는 내가 있는 곳으로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나를 말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한번 머리를 박았다.

    날 막지 마!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단 말이야!

    퍽!

    그 순간, 달칵, 마치 전등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확 눈앞이 어두워졌다.

    어느새 나는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그런 나의 눈앞으로 파노라마처럼 과거의 기억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필름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던 평범한 직장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32살의 여자, 서민정. 바로 전생의 나였다. 일은 고됐지만 나름대로의 성취감이 있었고, 취미인 웹소설 보기로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게다가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주는 가족들이 있었다. 엄마랑 아빠는 매일같이 안부를 물어왔고 나이 차이가 많이나는 동생은 즐거운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내게 연락을 해주었다.

    완벽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죽었다.

    남자 친구와의 다툼이 원인이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가 남몰래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집까지 찾아가 불 같이 화를 냈다.

    남자 친구는 적반하장으로 내게 짜증을 내었고 분노해 달려드는 나를 밀쳐버렸다. 몸이 뒤로 넘어갔다. 퍽, 난 서랍에 머리를 박았고 그대로 절명했다. 그렇게 서민정의 삶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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