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6
퍽, 퍽, 퍽.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유리아가 벽에 머리를 박았다. 하녀들은 그녀를 말리기 위해 팔을 마구 잡아당겼다. 짙은 갈색 곱슬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강아지처럼 순한 눈매를 한 하녀들은 유리아에게는 너무나 낯선 얼굴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자유를 잃었고 하녀는 다른 사람들로 바뀌었다. 엠마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흘린 죄, 탈출을 도왔다는 죄로 먼 곳으로 쫓겨나버렸다. 유리아는 이제 다신 엠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다시는.
죄책감에 가슴이 아려왔지만 이것을 신경 쓰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유리아는 자기 자신과 동생을 생각하기에도 벅찼다.
유리아는 하녀의 손을 뿌리치고 미친 듯이 문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어줘요. 제발 이 문 좀 열어줘……."
나를 내보내 줘.
유리아는 흐느끼며 주먹으로 문을 후려쳤다.
‘라라……!’
처음 백작은 죽었다 깨어난 유리아에게 사과를 하며 동생을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포션을 써주지는 않았지만 의사의 치료를 받게 해 주었다.
병실로 인도된 라일라는 마취제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눈만 굴리며 주변을 탐색하는 것뿐이다. 한참을 그러던 라일라는 제 언니를 발견하자마자…….
“유이아…… 유…… 아…….”
단어가 되지 못한 말들을 웅얼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부모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게 된 자식처럼 유리아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울고 있어.’
그렇게나 단단하던 아이가 비처럼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충격은 슬픔과 괴로움으로 변해 가슴을 옥죄었다. 유리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짐승도 그렇게 소리 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라일라의 상태는 처참했다. 유리아는 그렇게 설명하는 것 외에 무어라도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엉망이다? 끔찍하다? 잔인하다? 그저, 처참했다.
유리아는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원망스럽고, 또 원망스러워서 복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누군가에게 복수할 힘이 없었다. 무력하고 하찮고 울기만 하는 멍청한 평민 여자가 할 수 있는 복수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유리아는 자기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백작의 동의하에 매일 같이 라일라의 병실에 찾아갔다. 그러나 일주일도 되지 않아 백작은 다시 유리아를 방에 가두고 동생을 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유가 뭐라고 했더라? 그래, 자기보다 동생을 찾는 꼴이 짜증 난다고 했다.
‘왜, 왜 보지도 못하게 하는 거야? 왜?’
그녀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을 때, 방문이 열리고 백작이 들어왔다.
“그만해!”
유리아의 행동을 본 백작은 하녀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무능한 것들!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서 이거 하나 못 막아?! 니들 다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고 싶어?”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백작은 가까이 있던 고용인의 뺨에 손을 올리고 나서야 진정했다.
“빨리 가서 붕대나 가져와, 쓸모없는 것들아!”
하녀 중 하나가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갔다. 남자는 이를 지켜보다가 숨을 골랐다. 그러다 유리아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또 그러는 거야……? 그렇게 동생이 보고 싶어? 뭐가 걱정이라서 자꾸 이러는 건데? 내가 잘 치료해준다고 했잖아.”
“……전에도 그렇게 말하셨지만 제 동생을 놓아주지 않으셨잖아요…….”
“야, 너……. 날 못 믿겠다는 거야? 어?”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리아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마르고 가냘픈 몸이 공포로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사랑한다고 고백한 뒤로 백작의 태도는 전보다 부드러워지기는 했으나 그는 여전히 오만하고 난폭했다. 자신의 행동에 따라 동생의 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유리아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아니에요……!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동생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가족을 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제발 라라를 보게 해주세요. 백작님, 사랑해요……. 진짜예요! 당신을 사랑해요. 이렇게, 사랑한다고요……. 그러니까 제발요…….”
“……라라, 라라, 라라……. 시끄러워! 그 소리가 날 짜증나게 만든다고!”
남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백작은 무섭게 화를 냈다.
날카로운 고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하녀들은 숨죽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유리아는 덜덜 떨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백작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왜 그렇게 가만히 있지? 어? 전처럼 또 동생을 안 보게 해 주면 콱 죽어버리겠다고 협박이라고 하지 그래?”
"……."
“하, 그래……. 못 하겠지. 제가 끔찍하게 아끼는 동생이 더 잘못되는 건 원치 않을 테니까!”
아까 나갔던 하녀가 포션을 들고 돌아왔다. 이를 건네받은 백작은 유리아의 이마에 포션을 확 부어버렸다. 옅은 푸른빛을 띠고 있는 액체가 얼굴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안에든 모든 액체가 사라지자 백작의 손이 포션 병을 놓았다.
쨍그랑.
포션 병이 깨지며 파편이 방 여기저기에 튀었다.
“그딴 식으로 시위해도 소용없어.”
백작은 바닥에 침을 뱉고 나가버렸다. 한동안 침묵이 방 안에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하녀들의 불만 어린 목소리였다. 그들은 짜증이 담긴 눈으로 유리아를 내려다보며 툴툴거렸다.
“……왜 자꾸 난리야…….”
“저것 때문에 우리만 자꾸 피해 입잖아.”
작은 목소리였지만 유리아가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그런 비난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동생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동생을 생각하느라 그녀는 밤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편히 잘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밤, 달이 유난히 환하게 빛나던 밤에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알아채는 이가 없었다.
누군가 이를 눈치채고 저택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을 때, 범인은 이미 유리아의 방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유리아는 평소와 같이 잠들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리듯 눈 밑은 새까맸다. 유리아와 함께 지내며 그녀의 행동을 감시하던 하녀는 총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밖에 나간 상태였다. 유리아는 하녀의 눈치를 보았다.
‘저 하녀가 푹 잠든다면 라라를 보러 갈 수 있을 텐데…….’
탈출은 바라지도 않는다. 몸 상태가 엉망인 동생과 함께 도망가는 것은, 그리고 이 커다란 저택에서 백작의 기사들을 모두 피하고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울먹이고 있던 유리아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밖에 나간 하녀이겠거니, 하고 추측할 뿐이다. 그런 생각은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라졌다.
“유리아…….”
“……라일라……?”
쇳소리 가득하고, 무척이나 지쳐 있는 목소리였지만 유리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너무나 그리워했던 상대의 목소리였다. 여기 그 아이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순간 벅차오르는 기쁨과 그리움에 고개를 돌린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동생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막 치료받았던 그때와 다를 바 없이 엉망이었다. 백작이 유리아가 병실에 들렀던 일주일 이후로는 전혀 라일라를 치료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유리아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때 졸고 있던 하녀가 정신을 차렸다. 문가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사람을 발견한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너 뭐야?!”
그 순간, 라일라가 화장대에 놓여있던 단단한 보석함을 들었다. 유리아는 가만히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뒤, 아까의 소동이 거짓말인 것처럼 방 안은 조용해졌다. 유리아는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는 라일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든 간에, 그녀는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저 동생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과 엉망이 된 동생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슬픔뿐이었다.
“……구하러 왔어.”
유리아를 향해 몸을 돌린 라일라는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다가온 뒤, 유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작은 손이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자 피가 번진다.
“여기서 나가자.”
“날 구하러 왔다고……?”
“응, 구하러 왔어……. 그동안 힘들었지? 이제 괜찮아. 내가 왔으니까……. 이미 탈출구를 다 구해놨어! 너만 오면 돼!”
“그런 이유로……. 그렇게 엉망이 된 몸을 겨우겨우 끌고, 나를, 찾으러 온 거야?”
유리아는 엉엉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왜……?!”
유리아에게 지금 이 상황은 꿈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 언제나 라일라가, 아니 다른 사람이라도 상관없이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오기를 바랐다.
저택에서 탈출하자고 손을 내밀어주기를 바랐다. 오늘 그녀는 꿈을 꿀 정도로 바라던 일을 직접 겪게 되었다.
그것이 너무나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누가, 누가 도와 달랬냐고!”
유리아는 가슴을 쥐고 고개를 저었다.
“왜 나 같은 걸 구하러 온 거야……! 나는, 난, 라라 너를 위험에 빠뜨렸어. 끔찍한 일을 당하게 만들었어……. 나만 없었으면 너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전부 나 때문이야…….”
“……끄러……."
“나 같은 건 그냥 두고 가버려……. 나 때문에 네가 이런 고생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잖아…….”
“……시끄럽다고!”
라일라가 유리아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분노를 억지로 꾹꾹 눌러 담은 것 같은 얼굴로 제 언니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네 의견 같은 거 듣고 싶대?”
“……흐윽…….”
“네가 어떤 생각이든,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어. 난 널 구할 거야.”
“난…….”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언제나 그랬다. 라일라는 다른 사람의 기분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버리고 가라는 말을 했는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생각해주는 척하다가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밀고 나간다. 유리아는 그런 라일라가 너무나 짜증 나고, 화가 나고, 미안한 마음이 들고, 슬프고, 싫고, 너무나…….
“……나한테 미안하면 그냥 따라오란 말이야.”
……좋았다.
제멋대로인…….
유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안아오는 라일라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나의 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