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5
그곳에 있는 사람은, 바로 유리아의 언니 같은 동생, 유일한 가족, 그녀의 태양인 라일라였다. 라일라는 정신을 잃은 듯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축 늘어져 있었다.
유리아는 비명을 지르고, 또 지르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동강 나버린 것 같은 가슴을 쥐고는 앞으로 엎어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울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누군가 말해줘……. 저건 라라가 아니라고 해줘. 그래, 저건 라라가 아니야. 여기 잡혀 있을 리가 없어. 저런 꼴일 리가 없어. 라라는 저택을 탈출했는걸? 라라는 바깥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일주일에 한 번씩 나한테 편지를 보내주고……. 자기 대신 저택에 남은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
누군가 유리아의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
“봤구나. 어때?”
유리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베론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동생을 다시 보게 되니까 기분이 어때? 역시, 소중한 동생을 다시 보게 되니 기쁘겠지?”
유리아의 눈이 흐려졌다. 곧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오베론은 그녀를 끌어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엠마한테 일부러 네 동생 이야기를 흘린 거 알아? 백작님에게 네가 점점 소중해지는 것 같았거든. 이러다가 멍청한 나의 사업 파트너가 이상한 말을 흘릴까 걱정되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엠마에게 말을 흘려서 네가 별관에서 탈출하게 만들었어. 걔가 널 좀 아끼는 것 같더라고. 고문 이야기를 흘리면 반드시 네게 얘기해줄 거라고 생각했지. 너도 동생을 소중히 여기는 것 같으니까, 동생을 보러 오기 위해 탈출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백작 그새끼 자기 말을 어기는 사람을 되게 싫어해. 절대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렇게 탈출해서 지하까지 왔으니……. 아가씨를 버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지?”
유리아의 손이 파르르 떨리며 오베론의 목을 향해 다가갔다. 이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해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충격을 받으면서도 이 감정을 주체할 수없다.
“쓰레기…… 죽어, 죽어버려……!”
그는 자신의 목을 노리는 손을 가볍게 잡아 쥐어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렇게 제대로 걸려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뭐, 아무튼……. 계획대로 돼서 즐겁네.”
그때 등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베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입자를 잡으러 온 기사들과 그들을 헤치며 앞으로 다가온 백작을 바라보았다.
“내가 절대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백작은 유리아를 억지로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호통은 유리아의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에 멈추고 만다. 그는 짜증 나는 듯 혀를 차더니 유리아를 데리고 별관으로 떠났다.
오베론의 생각과는 달리 백작은 유리아를 버리지 않았다. 그저 별관의 방에 밀어 넣고는 욕설을 퍼부었을 뿐이다. 유리아는 가만히 모욕적인 말들을 듣고 있다가 눈물을 흘렸다. 손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유리아가 우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백작은 잠시 당황한 것 같았다. 그 감정은 뒤이은 비명에 더욱 커졌다.
“왜! 왜! 왜에에에!”
유리아는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방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부수기 시작했다.
커튼이 찢어지고, 베개가 이리저리 던져지고, 테이블 위에 있던 꽃병이 깨졌다. 그동안 기만당하고 있었다는 괴로움과 누구보다도 소중한 동생이 안전하지 않았다는 분노, 그럼에도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슬픔, 동생이 그렇게 만든 백작을 향한 원망, 또한 백작의 말을 어겼으니 이제 죽을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그녀를 이렇게 행동하게 만들었다.
유리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어요?! 나만 잘하면 동생은 놔준다고 했잖아!”
유리아는 깨진 화병 조각을 들어 올렸다. 꽤나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백작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허, 그걸로 나를 위협해보겠다는 거야?! 그럼 네 동생을…….”
백작은 그 뒷말을 하지 않았다. 유리아의 분노는 백작이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길게 상처가 난 유리아의 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나랑 라일라야……?”
유리아가 절규했다.
“……내가 예뻐? ……내가, 내가, 내가……. 내가 예뻐서 그렇다고?”
유리아의 하얀 얼굴에 생채기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한다고? 그럼, 이렇게 하면 안 예뻐? 이제 날 놔줄 거야? 나랑 라일라를 놔줄 거야?!”
“그만해!”
백작이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새파랗다. 유리아는 그가 이렇게나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제발 그만하라고!”
유리아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마치 기적처럼 그 오만하고 이기적인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흐릿한 시야에서도 선명하게 저에게 다가오는 손이 있었다. 애원하는 손이 있었다. 백작의 손이다. 자신을 기만하고, 모욕한 남자의 손이다.
유리아는 그것을 다급하게 쳐냈다.
그러자 갑자기 머리가 빙 돌기 시작했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지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며, 몸이 점점 추워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이다.
유리아는 비틀거리다가 화병 조각을 떨궜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진 것은 그와 동시였다. 유리아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백작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유리아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상처는 모조리 치료되어 있었다. 포션을 잔뜩 쏟아부은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제 옆에는 백작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유리아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혐오스러웠지만, 뿌리치지는 못했다. 백작이 그녀가 기절한 사이에 안정제와 수면제 등 여러 약을 잔뜩 투여해서 힘도 없었고 정신도 혼미했기 때문이다.
“죽지 마라……. 정신 차려……제발. 난…… 난 널…… 사랑…… 하는 것 같다 아니, 사랑해…….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유리아는 백작의 말을 듣고 입을 벌렸다.
‘사랑?’
사랑한다고?
“……지금 저한테 사랑한다고 한 거예요?”
약 기운이 돌고 있는 탓에 굳은 입에서 말이 어눌하게 흘러나왔다. 백작은 퍼뜩 고개를 들어 유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난 너를 사랑해.”
사랑. 어떻게 하면 그 말이 그렇게 끔찍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유리아는 라일라가 가끔 제 손을 잡고 속삭여오는 애정 어린 말들을 좋아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따뜻해지곤 했는데, 백작의 말을 듣자 심장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혐오감에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유리아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사랑한다고요?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지?”
“……짐승만도 못한 사람도 사랑을 할 수 있는 건가요?”
“뭐?”
몽롱한 정신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속마음을 그대로 내보이고 말았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때릴 수 있나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을 납치하고 괴롭힐 수 있나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가두고 그런 짓을 하죠? 그게……. 그게 사랑이야?”
유리아가 끔찍하다는 듯 내뱉었다.
“당신이 하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니야…….”
그녀에게 사랑이란 서로 아껴주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양보하고 내주는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리아는 장담할 수 있다. 백작이 하는 것은 분명히 사랑이 아니다. 저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어떤 역겨운 감정일 뿐이다.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침대를 거세게 후려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제 감정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여자를 손가락으로 겨누고는 금방이라도 고함을 내지를 것처럼 입을 벌렸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곧이어 유리아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제발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요. 전 당신이 싫어요. 끔찍하게 싫어요. 역겨워. 당신은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잖아요. 그런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최소한 염치라도 있다면서로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가지지도 말아야 해요…….”
유리아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제 귀에 가져다 댔다.
“당신이라는 사람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게 너무 끔찍해……. 귀를 뜯어버리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그 말을 듣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점점 목소리의 크기가 작아진다. 유리아는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백작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마치, 어쩌면, 만에 하나, 혹시 모르게 자신과 그녀가 같은 마음이었을지 모른다는 착각을 한 사람처럼. 절대 혐오스럽다는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