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44 (4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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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4

기분 나쁠 정도로 친절하게 굴던 남자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우울하고 칙칙한 어느 월요일에 유리아는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전날 밤 비가 많이 온 탓에 바닥이 미끄러운 게 문제였다.

유리아는 바닥에 미끄러져 발목을 삐었다.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엠마는 잠시 어딘가에 간 상태였기 때문에 부축해줄 이도 없다. 유리아는 바닥에 손을 짚고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킬려고 애를 썼다.

그때 지나가던 하인이 그녀를 돕지 않았더라면 아마 하녀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그 꼴로 있었을 것이다. 유리아는 하인에게 업혀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 계단을 올라가던 두 사람은 따가운 시선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백작이 있었다. 빨개진 얼굴과 울긋불긋 이마에 도드라진 핏줄은 그의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유리아와 하인 둘 다 공포로 몸을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백작이 으르렁거리며 명령했다.

“내려놔.”

하인이 침을 삼키고 유리아를 내려두었다. 동시에 하인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하인의 몸이 바닥에 있던 물웅덩이에 나동그라졌다.

더러운 흙탕물이 터지듯이 파동을 일으키며 백작의 신발에 물방울을 튀겼다. 물방울이 흐물흐물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백작의 발은 하인의 몸을 향해 내질러졌다.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놀란 유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절뚝거리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눈앞의 끔찍한 장면에 정신이 팔려 발목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이 느끼지 못했다.

“지하에 가둬버려!”

소란에 몰려온 고용인들이 백작의 명령으로 하인을 데려갔다. 백작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는 유리아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뭐 했어?”

“아악……!”

“그 자식이랑 뭐 했냐고?!”

“무슨, 무슨 소리세요……? 악!”

백작은 유리아를 제 방으로 끌고 가서, 그 하인과 뭘 했는지 똑똑히 밝히라며 무섭게 추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럼 왜 그 새끼 얼굴이 그렇게 빨간 거지?”

"……네……?”

“왜 그놈한테 업혀서 들어오고 있던 거냐고! 얼굴 번듯한 놈을 보니까 좋았나?”

백작은 유리아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유리아는 그가 왜 이렇게 화내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억울한 마음 반, 무서운 마음 반으로 백작의 방에서 지옥 같은 사흘을 보냈다.

그래, 그리고 그때. 그때 유리아는 백작에게 노예와 관련된 말을 들었다.

백작은 사흘 내내 술에 취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할 말 못 할 말을 가려서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무시무시한 사업 내용을 내뱉으며 노예가 된 사람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삶을 사는지 말해주었다. 앞으로 그런 모습을 또 보게 된다면 네 동생을 노예로 만들어버리겠다며 마구 협박을 해댔다.

노예가 불법인 제국에서 그가 하는 일은 큰 죄악이었다. 유리아는 백작의 약점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무언가를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평민인 자신이 귀족을 고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며, 백작과 함께했던 사흘의 밤이 너무나 끔찍해서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에 깬 백작은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만약 기억했다면 알아선 안 될 비밀을 알게 된 유리아를 없애 제 죄악을 숨겼을지도 몰랐다.

그 뒤로 그는 유리아의 방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잘 사용하지 않는 낡은 별관, 3층에 있는 방에 유리아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절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방 안에 가둬뒀다.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겨 이런 일을 실행했는지 유리아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에게 찾아온 새로운 불행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백작은 별관에는 소수의 여자 고용인만 데려와 일을 시키고 유리아가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도록 입단속을 확실히 시켰다.

백작의 행동이 얼마나 은밀하던지 본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은 유리아가 백작을 무섭게 화나게 한 날에 저택에서 내쫓겨 어딘가에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일주일이 흘렀을 무렵, 어느 밤에 백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유리아의 방에 들어왔다.

백작은 그녀에게 커다란 선물 상자를 쥐여주었다. 그 안에는 보석 달린 화려한 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백작은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어때?”

“……네?”

“쯧, 짜증나게……. 마음에 드냐고 묻잖아!”

“……감사합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유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하나도 고맙지 않은데도 말이다. 정말 아름다운 드레스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조금도 울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딴 건바라지도 않는데.’

그녀가 바라는 것은 이 지옥에서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리아는 저택에서 나가서 동생을 만나고 싶었다.

사랑스러운 동생의 얼굴을 떠올린 유리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뭐? 이렇게 더러운 내가, 그 아이를, 라라를 만날 자격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라라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을 거야. 나 때문에 끔찍한 일을 당했는걸…….’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백작이 말을 걸었다.

“유리아.”

유리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입어봐.”

“아……. 네…….”

방 한구석에 서 있던 엠마가 유리아에게 다가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백작은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대놓고 바라보는 모습은 유리아에게 옅은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유리아가 드레스를 갈아입자 백작은 만족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봐줄 만하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유리아는 치밀어 올라오는 공포와 혐오감을 감추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백작은 자주 별관에 찾아왔다. 유리아의 방에 찾아와서 제멋대로 스킨십을 하거나 그녀가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일을 하러 갔다. 어느 날은 백작이 유리아가 라일라의 편지를 보고 있을 때 들어왔다. 눈부시게 웃으며 동생의 편지를 읽는 유리아의 모습이 백작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다음 날부터 백작은 편지를 받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왜요?!”

유리아는 그날 처음으로 큰소리를 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제 가슴을 퍽퍽 쳐가며 백작에게 반항을 했다.

“백작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잖아요!”

“내가 제임스 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나?”

“제…… 제임스 님이 동생의 안부를 받아 봐도 상관없다고 하셨으면서 갑자기, 갑자기 이렇게 끊는다고 하시면……. 저는.”

“누가 보면 내가 식사라도 끊는다고 하는 줄 알겠어? 그깟 편지가 뭐라고 이렇게 유난을 떨어? 내가 그런다면 그런 거야.”

“싫어요! ……힉!”

그 반항은 백작이 손을 올리는 행동에 곧바로 잠잠해졌다. 그러나 백작을 바라보는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백작의 얼굴이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이……!”

그는 유리아를 밀쳤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유리아는 그대로 서랍에 부딪혀 바닥에 엎어졌다. 백작은 잠시 주춤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다가 이내 바닥에 침을 뱉고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망할 것.”

그렇게 유리아는 한순간에 동생에게 향하는 유일한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 편지는 유리아의 마음을 지탱해주던 물건이었다. 그것이 사라지자 그녀는 날이 갈수록 우울해했고 점점 웃는 일을 힘겨워했다. 백작이 찾아가도 전처럼 억지웃음을 짓는 일이 없어졌다. 그것이 백작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는 찾아올 때마다 선물을 가져와서 유리아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얼굴에 표정이 없다. 백작이 윽박을 질렀을때서야 유리아는 겨우 웃었다. 백작은 유리아의 행동을 짜증나게 여겨도 다시 편지를 돌려주지는 않았다.

하루하루 우울하고 불편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유리아의 마음을 무너뜨릴 사건이 찾아온다.

사건은 하녀인 엠마에게서 시작되었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거리감 있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엠마는 사실은…… 언제나 유리아를 동정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생기 넘치던 소녀가 꽃병에 꽂힌 꽃처럼 날이 갈수록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그녀의 동생이 사실은 마을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저택의 지하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차마 유리아에게 전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던 것이다. 이렇게 불쌍한 소녀가 학대를 당하는 것도 모자라 기만까지 당하고 있었다니! 유리아가 엠마에게 그것을 들었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부정하고, 또 부정하다가 결국 눈으로 사실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감히 별관에서의 탈출을 감행했다. 고용인들에게 잡혔을 때나 백작에게 들켰을 때의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은 행동이었다.

모두가 곤히 자고 있을 무렵의 시간, 유리아는 이불과 옷장에 들어있는 드레스를 엮어서 창밖에 늘어뜨렸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팔로 천으로 만든 줄을 붙들고 겨우겨우 지상에 발을 디뎠다.

유리아는 저택에 온 뒤로 살이 많이 빠졌다. 저택에 잡혀온 뒤로는 입맛이 없어 제대로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줄을 붙들고 있는 일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유리아는 몇 번이나 줄을 놓칠 뻔했다. 그때마다 유리아는 잘못 떨어지면 크게 다친다는 생각으로 겨우 버텼다.

엠마는 본래 감시인으로서 유리아의 행동을 막고 백작에게 이를 알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는 대신 유리아를 도와주었다. 엠마는 똑같이 줄을 타고 내려와 유리아를 지하의 방으로 인도했다.

동정심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쩌면 그녀는 유리아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마음을 빼앗겨버린 걸지도 모른다.

동정심과 함께 애정을 느끼게 되어버린걸지도 모른다. 백작이 눈독을 들였을 정도로 아름답고, 부당한 일을 당하면 화를 내는 대신 그저 슬프게 웃어 버리는 처연한 소녀를, 백작의 사람이나 다름없는 하녀에게도 웃어주는 마음 착한 소녀를 사랑하지 않는 일은 어 려웠으니까.

한 기사가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 앞을 지키고 있었다.

“다, 당신은……."

기사는 유리아를 발견하자마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택 밖으로 쫓겨난 줄 알았던 사람을 만나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엠마가 기사의 주의를 돌려 막고 있는 사이에 유리아는 지하로 들어갔다.

기다란 계단을 내려가자 차가운 복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왼쪽 벽에는 횃불이 걸려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두꺼운 문이 줄을 서고 있었다. 유리아는 횃불의 희미한 빛을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다.

오른쪽으로 크게 꺾이는 길을 만났을 때,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서 오베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백작이 가장 좋아하는 하인이었다. 한 손에 채찍을 들고 있는 오베론은 피투성이였다. 피를 흘렸다기보다는 누군가의 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유리아를 발견하자 재미있다는 양 웃었다.

“어? 아가씨가 왜 이런 곳에 있어? 백작님이 별관에 가둬 뒀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 설마 탈출한 거야? 들키면 엄청 혼날 텐데 괜찮겠어? 이번만큼은 백작님도 가만히 있지 않을걸? 빨리 돌아가.”

오베론은 유리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유리아는 그 손길이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져서 뒤로 물러났다.

어째서 그가 동생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 튀어나오는 걸까? 설마, 설마…….

아, 믿고 싶지 않다.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유리아는 이미 진실을 짐작하고 있다.

“굳이 탈출까지 해서 여기까지 온걸 보니, 내가 아가씨 동생한테 하고 있는 짓을 알게 됐나 봐! 엠마가 말해줬지? 나 걔랑 알렉산더한테 밖에 안 말해줬거든.”

유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아주 괴상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오베론을 홱 밀쳐버리고는 복도 끝에 있는 문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남자는 여자의 뒷모습을 그냥 멀뚱히 지켜보다가 낄낄거렸다.

곧 유리아는 복도 끝에 다다라 그곳에 있는 문을 홱 열었다.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그 안에 마련되어 있던 방이 보였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유리아는 머리를 쥐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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