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3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깬 유리아는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옆에 누워있었던 백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이며 커튼을 거둔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이 있었다. 유리아는 그 환상적인 풍경을 향해 손을 뻗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더럽혀진 자신이 닿는 순간 오염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러워…….’
제 손을 내려다본 유리아는 갑자기 기분이 축 처지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언제나 새하얗던 손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손만이 아니다. 창문에 희미하게 비치는 제 얼굴도, 몸도 모두 흑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렇게 더러워진 손으로는……. 이렇게나 역겹고 악취가 나는 몸으로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닿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슬퍼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유리아는 주먹을 그러쥐곤 애써 좋은 생각을 하려고 했다. 그래, 예를 들면 어제 백작과 했던 약속을. 그녀는 어젯밤 백작에게 동생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놓아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앞으로 하는 행동에 따라서 아예 놔줄 수도 있다고 했어…….’
정말로, 정말로 자신이 잘하기만 하면 동생을 놔주는 걸까?
똑똑똑.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겠습니다.”
유리아는 뒤를 돌아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제 자신에게 충고를 해준 하녀였다. 하녀는 한쪽 팔에 걸쳐뒀던 겉옷을 유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유리아가 겉옷을 입자, 하녀가 말했다.
“이제 절 따라오세요.”
유리아는 하녀를 따라 저택 2층에 위치한 방에 도달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방 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누군가 머물렀던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리아의 생각을 읽었는지 서랍에서 수건을 꺼내던 하녀가 대뜸 말했다.
“이전에 백작님이 초대한 여자들이 지냈던 곳이에요. 이제부턴 그쪽이 지낼 방이고요.”
하녀가 서랍을 닫곤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찝찝한가요?”
유리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연한 소리를…….’
그도 그럴 것이 잡혀온 여자들이 지내던 방이 아닌가. 다들 좋지 않은 끝을 맞이하기도 했다. 유리아의 얼굴을 훑은 하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뭐, 찝찝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미 방은 정해졌으니까요. 백작님께서 이 저택에서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계속 여기서 지내야 할 거예요.”
하녀는 방 한쪽에 있는 문을 열었다. 욕실이었다.
“이리로 들어오세요. 끈적끈적해서 불편하죠? 씻겨드릴게요.”
“……괜찮아요. 제가 씻을 수 있어요.”
“제게 맡겨요. 오늘부터 전 당신의 전속 하인이 됐으니까요. 앞으론 당신의 곁에서 시중을 들어야 해요. 식사도, 목욕도요. 얼른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예요.”
하녀가 유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유리아는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렸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손. 그 손이 옷 틈새로 파고들어 몸을 어루만지던…… 끔찍한 기억이! 유리아는 소리를 지르며 하녀의 손을 뿌리쳤다.
“괜찮다고요!”
짝!
얼얼한 손을 붙잡고 하녀를 바라보는 유리아의 얼굴은 당황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기가 이런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는 듯이.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힘없이 내뱉었다.
“……미안해요…….”
하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유리아에게 수건을 건넸다.
“그럼 오늘은 혼자 씻는 걸로 해요. 씻고 나오면 상처를 치료해드릴게요.”
하녀의 갈색 눈동자에 유리아의 얼굴이 비친다. 아픈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도화지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여러 색깔이 번져 있었다. 빨간색, 보라색, 푸른색. 이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유리아가 그리 좋지 않은 밤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건을 받아 든 유리아는 욕실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그곳은 목욕 준비가 끝나 있었다. 딱 사람 하나 들어갈만한 욕탕에는 미지근한 물이 채워져 있었고, 그 주변에 목욕 용품이 놓여있었다.
유리아는 살이 빨개질 때까지 비누칠을 했다. 그렇게 하면 몸이 조금이라도 깨끗해질까 해서. 하지만 몸에 붙은 더러운 것들은 어젯밤의 기억처럼 절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곧이어 제 행동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 쉬고 비누를 물로 닦아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상처 부위에 물이 닿을 때마다 따끔한 통증이 밀려왔다.
유리아는 얼굴이 구기다가 몸을 푹 담갔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고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유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밖에 있는 하녀는 욕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빛을 발하는 태양, 참으로 맑은 날씨였다.
* * *
유리아는 2주가 넘어도 저택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백작은 질리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매일같이 유리아를 방으로 불러냈다. 심지어는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찾아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가끔은 백작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끔찍함이나 행위 자체의 역겨움을 참지 못해 백작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면 바닥에 엎드려 속을 게워내기도 했다.
유리아는 바닥을 적시는 위액과 함께 백작과 같이 있었던 기억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는 헛된 상상을 하면서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했다. 그럴 때면 엠마는 유리아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곤 했다.
그런 지옥 같은 시간들을 버틸 수 있던 것은 모두 동생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라일라, 하나뿐인 소중한 가족. 자신의 희생으로 라라가 무사하다는 사실만이 유리아를 지탱해주었다.
백작은 약속대로 라일라를 지하 감옥에서 풀어주기까지 하는 자비를 베풀었다. 유리아는 저택에서 떠나기는 라일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백작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세게 그러쥐며 귓가에 속삭였다.
- 명심해라. 난 언제든 네 동생을 잡아 올 수 있어.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경고였다. 유리아는 어째서 백작은 자신을 잡아 두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질리거나 짜증 난다는 이유로 많은 여자들을 내쫓았던 남자가 아닌가.
도대체 왜?
‘……얼굴 때문인가?’
유리아는 멍하니 거울 속에 비친 것을 바라본다. 허리 근처에서 살랑거리는 기다란 연갈색 머리카락와 바다처럼 푸르른 눈동자. 피부는 창백하리만큼 새하얗고 입술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다크서클이 눈 밑을 가리고, 먹은 것마다 대부분 토하는 탓에 볼이 홀쭉하게 들어갈 정도로 말라 있었지만 소녀의 미모를 감추지는 못했다.
유리아의 손이 소녀의 뺨을 스치듯 쓰다듬고는 무릎 위로 떨어졌다.
백작은 때때로 유리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하곤 했다. 아름답다고, 예쁘다고. 그녀를 선택하고 데려온 이유는 모두 그 미모 때문이라고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짜증나게 굴 때마다 지하 감옥에 던져버릴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 말들이 흘러나온 뒤에는 항상 수도에는 너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그러니까 잘난 척하지 말라는 식으로 깎아내리고는 했으나 백작이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감탄을 내뱉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유리아의 아름다움은 가족을 상처 입히고 그녀가 원치 않는 사람의 곁에서 썩어가게 한 비극을 불러온 한편, 그녀의 몸을 그나마 온전히 보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유리아로서는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작은 이상해졌다. 친절하게 구는 날이 많아졌고, 어쩌다 유리아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비싸다는 포션을 뿌려주기도 했다. 그뿐일까, 은근히 유리아의 취향을 신경 쓰기도 했다.
누군가 테이블 위에 꽃병 안에 놓아둔 하얀 백합이나 옷장에 마련된 분홍색의 원피스, 식사 때마다 꼬박꼬박 나오는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는 유리아를 불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역겨운 친절은 가끔 유리아에게 득이 되는 일을 만들어주곤 했다.
바로,이것이다. 유리아는 하녀인 엠마에게 편지를 받아 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백작은 특별히 동생에게 편지를 받아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주고받을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거기까지 바랄 수 없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유리아는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한 문장씩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으며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을 음미했다.
편지에는 라일라의 간략한 안부와 함께 제 언니를 걱정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모든 문장을 다 읽어 내린 유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편지가 무슨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았다.
엠마는 가만히 유리아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평소처럼 상자를 건넸다. 유리아는 라일라의 편지로 가득한 상자에 새로운 편지를 집어넣은 뒤 옷장 깊숙한 곳에 보관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