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2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최선의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
긴장감으로 심장이 쿵쾅거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공포감이 손을 떨게 만든다.
그녀는 지금 니고르 백작의 응접실에 앉아 있다. 저택에 도착하자, 집안의 노집사는 유리아를 응접실로 데려가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복도를 거닐며 살펴본 저택은 이상하도록 고요했다. 분명 고용인이나 요리사 등 사람이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모두가 두려운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숨죽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주 잡았을 무렵 문이 열리고 하녀 두 명이 들어왔다. 한 사람은 얼굴에 막 치료한 듯 붉은 얼룩이 나있는 거즈를 붙이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그에 비하면 깔끔한 행색이었으나…….
‘다리를 절뚝이고 있어.’
유리아는 싸늘한 한기를 느끼고 절뚝이는 다리에서 시선을 뗐다. 그들은 유리아를 욕실로 데리고 갔다. 하녀 중 한 사람이 흙으로 더럽혀진 유리아의 옷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던 유리아는 깜짝 놀라 몇 발자국 물러났다.
거즈를 붙인 하녀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담담히 말했다.
“몸을 씻겨드리겠습니다.”
“……네? 아뇨, 괜찮아요. 씻기만 하면 되는 거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씻겨드리겠습니다. 백작님의 명령이에요.”
하녀들이 몸을 잘게 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유리아는 눈을 내리 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유리아는 미지근한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 그들의 시중을 받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먼지와 흙이 씻겨 내려갔다.
고개를 내린 유리아는 파동이 이는 수면에 우울하기 짝이 없는 소녀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처진 눈썹, 입꼬리가 내려간 입, 물기 어린 눈동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하녀 중 한 사람이 조용히 속삭였다. 거즈를 붙인 쪽이었다.
“계속 그렇게 우울한 얼굴이면 백작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욕실이라는 장소의 특성 때문인지 목소리가 벽에 튕겨 웅웅 울리면서 귓가에 박혀 왔다.
“……네.”
유리아가 손에 물을 담아 얼굴에 뿌리자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빛이 번쩍였다.
‘저 사람 말이 맞아……. 백작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게 없어.’
입꼬리를 올려보았지만 물가에 비치는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우울해 보였다.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래, 제대로 웃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잡혀온 동생이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앞으로 끔찍한 일을 당할 게 뻔한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목욕을 마친 뒤에는 수건으로 몸을 닦이고 다리를 절뚝이는 하녀가 가져온 잠옷을 걸쳐 입었다. 무릎을 겨우 덮는 하얀 원피스 형태의 잠옷은 천이 너무나 얇은 나머지 속살이 거의 비쳤다. 수치심이 절로 드는 의상이었다.
전신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본 유리아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웃어요.”
거즈를 붙인 하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작님은 무서운 분이에요. 상대가 평민에다가 힘도 약한 여자라면 더더욱 무서울 게 하나도 없죠. 절대 반항하지 말고 그분이 하자는 대로만 하세요. 당신은 아름다우니까, 잘 웃고, 잘 따르고, 얌전하게 행동하기만 하면 조금은 친절히 대해주실 거예요.”
“……왜 저한테 그런 충고를 해주시는 건가요?”
“그야, 당신이 다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죠.”
"……."
“동생분 얘기가 많이 궁금하시겠지만, 오늘은 묻지 말아요.”
동생이라는 이야기에 유리아가 퍼뜩 하녀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녀는 걱정과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유리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외투처럼 보이는 옷을 입혀주었다.
“라일라는…… 제 동생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저도 잘 몰라요. 지하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동생분의 상태는 백작님이나 그분의 보좌관인 알렉산더…….”
동생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왔던 남자다. 알렉산더, 그 이름이 나오자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혹은, 감옥을 담당하는 하인인 오베론 외에는 모를 거예요.”
오베론, 유리아가 잘 아는 이름이다. 수도에서 백작과 함께 사업을 하다 니고르 영지로 내려온 평민 출신의 하인이며 별로 좋지 않은 소문이 도는 사내였다.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강약약강 타입의 인간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백작에게는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지만 그 외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않고 무시한다고 했다.
소문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베론에게 물을 생각은 말아요. 어차피 그 뱀 같은 남자는 답 대신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을 테니까요…….”
조소 섞인 목소리에서 오베론이라는 사람에 대한 혐오감이 은근히 풍겨왔다. 하녀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젓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보좌관은 쓸데없는 일에 엮이고 싶어 하지 않으니 그나마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는 건 백작님뿐이죠. 오늘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시니까 밤을 지낸 다음 날에 물어보는 게 나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표정이 아직도 굳어 있네요.”
전신 거울 속의 소녀가 머뭇거리다가 웃었다. 아직 어색하기는 했으나 아까 전에 지었던 표정보다는 훨씬 웃음에 가까웠다.
유리아는 하녀들을 따라 백작의 방으로 갔다. 목적지를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까워질수록 숨이 턱 막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가 뇌를 헤집어놓는 것 같은 두통이 일었다. 유리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쥐곤 흐트러지는 숨을 고르게 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방에 도착하기 전 일행은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두 명의 남자들을 만났다. 검고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은 하나로 대강 묶고 앞가슴 단추를 몇 개 풀어놓은 불량스러운 차림새의 남자는 백작이 아끼는 것으로 유명한 하인인 오베론이었고, 그와 반대로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남자는 보좌관 알렉산더였다.
알렉산더는 유리아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고, 오베론은 히죽 웃었다.
“그래! 여기 있으면 만날 줄 알았지.”
그는 유리아와 하녀들에게 다가왔다. 다리를 절뚝이던 하녀가 겁에 질린 듯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였다.
“이 여자가 유리아 핸슨 맞지? 이 영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자! 과연, 내가 수도에서 본 귀족 아가씨들보다 훨씬 예쁜걸. 백작님이 좋아하시겠어.”
남자가 유리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아가씨, 그런데 말이야…….”
“오베론.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어서 갑시다.”
“쯧, 알았어. 알았다고.”
알렉산더가 경고하듯 짧게 이름을 부르자 오베론은 짜증 난다는 듯 혀를 찼다. 남자는 유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백작의 방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이만 가죠.”
하녀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려는 유리아를 데리고 다시 방까지 안내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보좌관님, 백작님이 언제 저 여자한테 질릴지 내기할래?”
“그런 바보 같은 내기 안 합니다.”
“재미없는 놈……. 고지식한 것들은 하나같이 반응이 똑같단 말이야.”
“……당신은 참 할 일도 없는 인간이로군요.”
“하하.”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남자들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남의 불행을 재미있는 내기 거리로 치부하고 있는 거야? 끔찍해…….’
눈을 질끈 감은 유리아는 불안한 마음이 더욱 거세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말대로 여자들은 2주를 다 버티지 못하고 저택에서 쫓겨나고는 했다.
과연…… 언젠가는 동생을 볼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동생은 괜찮을까?
‘그만. 더 생각하지 마. 저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말자. 무서워하면 안 돼. 얼굴에 그대로 드러날 거야. 진정하자. 진정해, 유리아.’
그녀는 라일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애써 그 마음을 억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자 부정적인 마음이 억눌러지기는커녕 울컥 올라오려고 했다.
그때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아는 번쩍 눈을 떴다.
섬세하게 문양이 새겨진 문이 눈앞에 드리우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은 백작의 방 앞에 도달한 것이다.
“손님을 데려왔습니다.”
마음의 준비 같은 건 하나도 되지 않았지만, 방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하녀는 참으로 무심하게 문을 열어젖힌다. 새것처럼 보이는 문이 어딘가에 긁히는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고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두운 방 안을 붉은색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온갖 비싸고 화려한 가구와 사치품들로 가득 차 있는 방은 주인의 과시적이며 사치스러운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작은 원형의 테이블에는 와인 잔 두 잔과 와인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옆에는 사람 세 명쯤은 충분히 누울법한 거대한 침대가 있었다.
바로 그곳에 니고르 백작이 앉아 있었다. 하녀가 유리아의 등을 밀치고 문을 닫았다. 유리아는 잠시 비틀대다가 중심을 잡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 자리에서 우물쭈물하는 유리아를 본 백작이 히죽 웃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리 와서 앉아라."
유리아는 주춤거리다가 백작의 옆에 앉았다. 그는 와인 잔에 와인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퍼뜩 하녀의 충고가 떠올린 유리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 잔을 받아들였다. 상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와인을 마시고 잔에서 입에서 떼어냈을 때,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아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고 그 안에 담겨있던 액체가 바닥을 축축이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