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41 (4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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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41

    유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충격으로 겨우 멎었던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다.

    그녀는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손안에 담았다. 소중한 것을 끌어안는 양 움켜잡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라를 구해야 해……. 지금도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몰라. 어서, 백작저로 향하지 않으면…….’

    저택에 가야 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속절없이 덮쳐오는 두려움이 그녀의 행동을 막아섰다. 그 감정은 저 멀리 웅장히 서 있는 저택을 눈에 담자마자 집에 들어가 문을 닫게 만들었다. 문에 기댄 유리아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갈 수 없어…….”

    유리아는 라일라가 소중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니고르 저택에 가는 것이 무서웠다. 그곳에 가면 다른 피해자들처럼 끔찍한 꼴을 당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저택에 끌려간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나? 모두 입에 담을 수 없이 끔찍한 일을 당하고 돌아왔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분명 라일라는 그녀의 가족이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이가 자신 때문에 온갖 폭력을 당한다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구하고 싶다. 그러나, 저택에 가봤자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백작이 그녀의 말을 들어줄 확률은 낮았고, 감히 자신을 무시해 놓고 그런 부탁이나 하냐고 비웃음 당하고 맞지 않는 게 용하다.

    동생을 구할 수 없다면 그저 의미 없이 몸을 날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평소 제 언니를 살뜰히 챙기던 라일라는 그런 일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라일라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도망치는 게 아닐까? 다치지 않고, 안전하기를 원할 테니까.

    홀린 듯이 2층에 올라간 유리아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제 방 침대 위에 놓인 가방을 잡았다.

    이미 라일라가 영지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전부 알려준 상태였다. 사람이 뜸해지는 시간대에 찰리라는 병사를 만나 도와달라고 하기만 하면 된다.

    보좌관이 그에 대해 언급하거나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같은 말은 하지 않은 걸 보니 탈출 루트를 들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병사에게 가서 도와달라고 말하기만 하면……. 도망갈 수 있어.’

    그런 생각을 하던 유리아는 질린다는 듯 웅얼거렸다.

    “도망……?”

    가방끈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도망이라고? 어떻게 그딴 생각을 할 수 있어? 가족을 버리고 도망치는 게 옳은 행동이야?”

    유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유리아, 너 그 정도로 쓰레기였니……? 라라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다가 변명을 하듯 내뱉는다.

    “하지만……. 라라는, 라일라는 내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 가족이 다치기 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잖아. 게다가, 라일라는 똑똑하니까 이미 자신이 그렇게 잡힐 걸 알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나한테 미리 자신의 계획을 말해준 게 아닐까? 그럴 때를 대비해서 도망가라고……. 그렇지? 그렇잖아……?”

    정말로 그럴까?

    “……모르겠어.”

    유리아는 알 수 없다. 유리아는 라일라가 아니기에 알 수 없다. 애초에,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지 않는 소녀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도망가야 한다, 저택에 가야 한다.

    두 가지 상충되는 생각이 유리아의 머릿속에서 부딪히며 두통을 만들어냈다. 소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침대에 기댄 채 계속해서 자기 자신과 싸웠다. 그녀는 결국 저택에 가는 대신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나는 겁쟁이야…….’

    밤의 장막이 드리우고 세상은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였다. 유리아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영지를 둘러싼 벽으로 향했다. 죄책감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아왔지만 공포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그토록 고민했던 시간이 우스울 정도로 유리아는 그리 어렵지 않게 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입구에서 다섯 번째로 있는 기둥에는 중년의 남자가 벽에 기댄 채 기우뚱하게 서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얼굴에 큰 상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찰리라는 사람이다. 유리아는 숨어 있던 풀숲에서 빠져나와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저기…….”

    “……뭐야, 너. 벽에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는 말 못 들었어? 죽고 싶어?”

    남자는 재빨리 허리춤에 매고 있던검을 꺼내 유리아에게 겨누었다. 유리아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고, 남자는 등불을 들어 상대를 비춰보았다.

    얼굴을 보자 감탄사를 내뱉는다.

    “잠깐……. 그 유명한 유리아 핸슨이로군.”

    “찰리…… 맞나요?”

    “맞아. 찰리 그레이슨.”

    “라일라에게 들었어요. 영지에서 도망가는 걸 도와주신다고 했죠?”

    “그래, 그랬었지. 네 동생에겐 예전에 빚을 졌으니까……. 그런데 라일라는 같이 안 왔나?”

    찰리는 실수했다는 뜻 혀를 찼다.

    “아, 이런…… 백작 놈 명령으로 지하감옥에 갇혔다고 했었지. 그래서 너 혼자만 온 거로군.”

    순간, 심장에 비수가 꽂힌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가슴을 쥔 유리아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어젯밤에 나한테 들리고 돌아가는 길에 잡혔던 모양이야. 운이 나빴지. 뭐, 아무튼…… 나갈 생각 맞지?”

    “……네.”

    “그럼 몸을 낮추고 날 따라와.”

    찰리는 등불을 바닥에 버려두고 유리아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쭉 걷다가 수풀이 무성한 어느 곳에 멈춰 섰다. 찰리는 수풀을 마구 헤집어놓곤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수풀 뒤에 숨겨진 부분을 만지작거리자 벽이 분리되어 작은 개구멍이 생겼다.

    “여기로 나가면 돼.”

    찰리가 유리아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자, 그녀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기 전에 얼른 나가.”

    하지만 유리아는 나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우물쭈물할 뿐이다.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던 병사는 짜증 나는 듯 얼굴을 구겼다.

    “왜 이렇게 우물쭈물 대는 거야? 안 나가?”

    “나가고…….”

    탈출구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순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던 라일라의 얼굴이 유리아의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함께 지내던 시간들이 하나둘 떠오르자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유리아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나가고 싶어요……. 그런데, 갈 수 없어요.”

    “뭐?”

    “그냥, 이대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건데……. 자꾸 그 아이가 눈에 밟혀서 차마 그럴 수가 없어요. 바보 같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유리아는 울면서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라일라는 내 동생이라고요. 제 하나뿐인 가족이에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그 아이는 부모이자 동생이었고, 언니였고, 선생님이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제 모든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병사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말하는 것에 가까웠다. 유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속삭이듯 내뱉었다.

    “전 그 아이를 사랑해요…….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거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머리 아프게 고민하는 대신 영지를 빠져나가버렸을 테니까요……!”

    두려움보다 죄책감보다 자신을 덮쳐오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들보다도 지금에서야 눈치챈 사랑이 너무나 큰 탓에 그녀는, 유리아는 병사를 등지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는 가방을 내던지고 니고르 백작의 저택으로 달려가고 있다.

    사랑이라고 하는 이 잔인하고 끔찍한 감정 때문에 제 발로 지옥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다.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다. 아니면, 어딘가 모자라다. 밤새 머리를 다친 걸지도 모른다. 가면 무슨 짓을 당하는 줄 알면서도, 라일라를 확실히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니고르 백작에게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맞고, 무시당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을 거야. 온갖 끔찍한 짓을 당하겠지. 계속 갇혀 살다가 시체가 되거나 나가고 나서야 그 저택을 나갈 수 있을 게 분명해.’

    그때, 유리아는 돌부리에 걸려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다급하게 달리다 보니 미처 아래를 살피지 못한 것이다. 요란한 소리가 나며 몸뚱이가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에 엎어진 유리아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며 웅얼거렸다.

    “알고 있어…….”

    그녀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아귀에 쥐어진 흙이 손 틈새로 흘러나간다. 이미 뻘겋게 부어오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자. 다시 돌아가기만 하면 영지를 빠져나갈 수 있다.

    저택에 가지 않아도 된다. 동생이든 뭐든 다 버리고 도망가면 끔찍한 짓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에는?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 해서 잘 살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을 거야. 난 평생 라일라 널 잊지 못할 거야. 너에 대한 죄책감에 미쳐버릴 거야. 미치지 않아도 끔찍하게 살아갈 게 뻔해.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좋은 직장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나는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거야. 어느 쪽이든 지옥이라면…….’

    하하, 유리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지옥이 훨씬 나아.”

    소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연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입고 있는 치마가 움직임에 따라 요동친다. 그녀는 계속해 서울고 웃으며 지옥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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