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40 (4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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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0

백작이 집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집에 돌아온 라일라는 아무 말도 없이 망가진 문과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은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이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몰려 시끄러운 집 주변과는 대비되게 집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불안한 듯떨리는 유리아의 목소리가 그 정적을 깼다.

“라라……. 백작이, 오늘, 오늘 밤에, 저택에 오라고…….”

“괜찮아.”

라일라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 울먹이고 있는 유리아 앞에 앉아 다시 한번 말했다.

“괜찮아.”

유리아는 언제나 라일라가 “괜찮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정말 괜찮아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착각하기가 힘들었다.

괜찮아?정말로?

저택에 끌려간 여자들처럼 돼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저택에 갇혀 지내다가 망가진 채로 쫓겨났다.

귀족이 평민을 상대로 저지르는 모든 행동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두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다.

아무리 라일라라도 귀족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가만히 유리아의 얼굴을 바라본 라일라가 다시 한번, 힘 있게 말했다.

“괜찮아, 유리아.”

“……라라……."

눈물이 시야를 흐린 탓에 유리아는 라일라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계속해서 괜찮다는 말을 하는 동생이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괜찮다고 말하는 건지, 혹은 불안한 감정을 감추고 자신을 달래주기 위해 애써 그러는 건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라일라는 유리아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밤에 도망가자.”

그제야 유리아는 라일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지켜줄게. 절대 그 자식이 널 건드리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응……."

힘 있는 목소리, 각오에 찬 얼굴, 자신의 말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는 눈을 보고 나서야 유리아는 안심할 수가 있었다. 울기만 하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그 품에 안기지 않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강한 사람에게 어떻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유리아를 달랜 라일라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문을 고치는 일이었다. 강제로 열린 탓인지 문에 달려 있던 잠금장치는 망가져 있었다.

라일라는 우그러진 경첩에 겨우 매달린 상태로 달랑거리는 문을 대강 고쳐놓고는 유리아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제 언니를 창고 대용으로 쓰던 방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창고 한편에 숨겨뒀던 물건을 본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내가 할 일은 없던 거구나.”

라일라가 들고 온 것은 2인용 여행가방이었다. 가방 안에는 돈과 옷, 각종 필수품들이 들어 있었다.

라일라는 이미 도망칠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가방을 유리아에게 건넨 라일라는 짧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나랑 거래한 병사는 영지를 둘러싸고 있는 벽을 지키고 있어. 입구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에 있는 기둥으로 가면 만날 수 있어. 병사의 이름은 ‘찰리’고 뺨에 길게 칼자국이 나 있으니까 알아보기 쉬워. 그 사람한테 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할 거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밤에 이동하자. 밤이 되려면…… 앞으로 몇 시간만 더 지나면 되겠네.”

라일라는 커튼을 걷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 병사한테 가서 오늘 밤에 나갈 예정이라고 말해둬야겠어.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줘.”

하지만 노을이 지고, 하늘이 붉게 물들 때 나간 라일라는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왜 돌아오지 않는 거지……?’

분명 오늘 밤 함께 도망가기로 약속했으면서.

‘이야기가 길어지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뭔가, 잘못된 걸까?’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으로 거실을 돌아다니던 유리아는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다 어느새 아침이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동생을 걱정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유리아는 커튼을 걷어 창밖을 내다보다가 현관으로 달려갔다.

“나갈까……?”

그녀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다 눈을 꾹 감고 손을 거 둬들인다.

“……아냐, 안 돼. 라라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밖을 돌아다니다가 백작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특히나 그에게 직접 저택에 오라는 말까지 들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짐은 되지 말아야지.

유리아는 제 자신에게 그리 되뇌며 나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라라?”

유리아는 퍼뜩 눈을 떴다. 문을 열자 나오는 사람은 그녀가 그토록 기다렸던 대상이 아닌, 아주 익숙한 얼굴의 사내였다.

똘마니 라도 되는 양 항상 니고르 백작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남자였다.

보좌관인 알렉산더라고 했던가? 그는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백작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편지였다. 이건 감일까? 단순히 사랑 고백이나 협박이 담긴 편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것을 건네받는 순간, 유리아는 싸한 기분을 느꼈다. 이 안에 든 게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다. 편지를 열게 되면 정체가 드러나리라. 이상하게 안에 든 것을 보기 두려워 한참 동안 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뭐죠?”

“……직접 열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유리아는 편지의 입구를 다급하게 뜯어냈다. 그리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손이 미친 듯이 떨렸기 때문이다.

편지에서 끈으로 묶여있는 연갈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나온 것이다.

“헉!”

유리아는 혼란스러웠다. 뭐야? 이런 걸 왜 나한테 보낸 거야?

‘그런데, 이건 누구의 것이지? 혹시…….’

왜 이때 동생이 떠오른 것인가. 유리아는 알 수 없다. 알고 싶지 않다.

“줍지 않으십니까? 선물을 보셨으니 안에 들어 있는 쪽지도 보셔야지요.”

남자는 편지를 집어 들어 유리아에게 건넸다. 유리아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없다. 유리아는 편지를 집어 들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냈다. 머리카락이 엉겨 붙은 쪽지에는 매끄러운 글씨체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라일라 핸슨의 머리카락은 잘 받으셨습니까?'

유리아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아 멍한 얼굴을 한 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아…….”

손으로 눈을 비비고 쪽지를 들여다보고, 다시 또 비비고 들여다보는 행위를 계속했다. 믿을 수 없다. 믿고 싶지 않다. 믿고 싶지 않았는데……. 니고르 백작은 지금 제가 생각하고 있는 행동을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보복으로 사람을 납치하고 상처 입히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인간이다. 지금 라일라는 어떤 상태일까? 과연 머리카락만 잘린 걸까? 니고르 백작에게 심한 짓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유리아는 알 수 없다.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아…….”

유리아의 얼굴이 고통과 괴로움으로 일그러지고,

“아악!”

입에서는 끔찍한 비명소리가 튀어나왔다. 유리아는 니고르 저택에 끌려가 억지로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녀의 얼굴을, 심한 짓을 당해 괴로워하는 소녀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러자 도저히 역겨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유리아는 그 자리에서 속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게워냈다. 걸쭉한 위액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입에서 위액과 침이 뒤섞여 뚝뚝 흘러내렸다.

유리아는 그것을 소매로 닦아냈고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웃었다.

“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이거 거짓말이죠? 거짓말이잖아……. 거짓말이라고 해주세요! 제발!”

웃는 얼굴에 물기가 어렸다.

“그냥 절 협박하려고 만든 가짜죠? 제 동생은 안전하죠? 이건 그냥…… 그냥……. 꿈이잖아요?”

눈물을 흘리며 남자의 다리에 매달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백작은 라일라를 데려갔으며, 유리아는 하나뿐인 동생이 그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 안에만 처박혀 있던 쓸모없는 언니였다. 언니도 아니다. 쓰레기다. 짐 덩어리다.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반항하지 않았어도, 그냥 백작에게 가기만 했어도! 아, 라라……. 라라!”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리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게 왜 오지 않으셨습니까? 당신도 보지 않았습니까. 백작님의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를요.”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다.

“오늘은 저택에 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백작님께서는 인내심이 그렇게 길지 않으셔서, 늦게 오면 동생분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유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얼굴선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어떻게 나한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나한테……?’

하나뿐인 동생이 잡혀 가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아, 저 인간은 아주 끔찍한 인간이다. 감정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라면 저렇게 말할 수가 없다. 아니, 분명 사람이 아니다. 저건…….

“……괴물…… ”

“전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남자는 뒤돌아 유유히 떠나버리고 유리아는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영지의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리아를 쳐다보면서도 백작과의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아 외면하며 지나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방향을 잃은 나침반처럼 유리아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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