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8
커다랗고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어두침침한 분위기나 사람들이 머리에 얹은 검은 베일, 깔끔하게 갖춰 입은 칙칙한 검은 옷이 아니었다면 파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유리아는 백작과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친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장례 행렬을 보며 기분이 우울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하나뿐인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가족들은 얼마나 슬플까?’
백작 부인은 둘째를 낳고 죽어버렸다. 그 뒤로 백작은 아내를 들이지 않았고 그 옆자리는 계속해서 비어 있었다. 백작은 니고르 남매에게 유일한 부모였다. 그런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땅에 묻어야 한다. 얼마나 괴로울까? 얼마나 슬플까? 공감에서 비롯된 아픔이 유리아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는 하얀 꽃으로 뒤덮인 관을 쳐다보며 니고르 백작에 관한 정보를 떠올렸다.
니고르 백작은 그리 좋은 영주는 아니 었지만 나쁜 사람도 아니 었다. 어느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음씨 좋은 영주처럼 세금을 감면 시켜주거나 작물 수확 상황이 좋지 않으면 창고를 열어 그 안에 있는 모든 곡식들을 분배해주지는 않았지만 적절히 영주민들의 삶을 둘러봐주었다. 그냥 그는 적당히 오만하고, 적당히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어디에서나 쉬이 볼 수 있는 평범한 귀족이었다.
그에게는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있었다. 딸은 그의 옆에서 후계자 수업을 들었고 아들은 수도의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개인 사업을 하고 있었다.
백작의 아들인 제임스 니고르는 유리아가 아주 어렸을 적에 아카데미로 떠났고 한 번도 영지에 돌아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또래의 아이들은 한 번도 제임스 니고르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백작의 장례식은 유리아가 처음으로 제임스 니고르의 얼굴을 보게 된 곳이었다.
장례 행렬이 모두 끝나고 제임스 니고르와 나타샤 니고르는 공작의 관 앞에 서서 헌화를 했다. 남자는 키가 아주 컸고, 그만큼 덩치도 커다랬다. 다리와 팔뚝은 정장이 작아 보일 정도로 두터웠고 커다란 배는 퉁 튀어나와 있었다. 그렇다면 얼굴은? 얼굴은 어떠할까?
점잖고 조용한 니고르 백작의 후계자, 나타샤 니고르에 비해 베일에 감싸인 니고르 백작의 영식을 둘러싸고 있는 소문은 아주 많았다. 제 아비와 사이가 나빠 그동안 돌아오고 있지 못하다든가, 오히려 사이가 너무 좋아 사업을 성공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든가 하는 낭설뿐만 아니라 외모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니고르 백작가의 하녀였던 노인은 그가 끝내주는 미남이라고 말했고 그 이야기를 듣던 과일 가게 점원은 어릴 때 이야기니 지금은 추남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시시덕거렸다.
전통에 따라 장례식이 치러지는 인물의 가족들은 검은 베일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서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니고르 남매의 얼굴은 누구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훤히 드러나 있었다.
니고르 백작 영식의 얼굴은 살에 파묻혀 있어서 외모가 어떠한지 가늠을 하기 어려웠다.
- 아주 잘생겼지! 잘생겼고말고. 그렇게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는 처음이었어. 황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금발머리에, 바다처럼 깊고 파란 눈…… 피부는 또 어찌나 하얗고 부드럽던지. 짓궂은 장난을 많이 치기는 했지만 귀엽게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어.
태양 아래에 있는 금발 머리는 황금처럼 반짝였고 눈은 확실히 하늘보다도 푸르렀다.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유리아는 제 실수를 깨닫곤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유리아 핸슨? 남의 얼굴을 평가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잖아. 심지어 장례식 날에…….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유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옆에 서 있던 라일라는 그 모습을 우는 것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그녀는 유리아를 달래주기 위해 평소처럼 손을 꽉 잡아주었다.
“괜찮아?”
“응. 나는 괜찮아, 라라. 걱정하지 마. 나 우는 거아니야.”
“알았어.”
“안 울어…….”
“알아.”
그래도 라일라는 손을 놓지 않았다.
정말 우는 거 아닌데. 검은 베일이 얼굴을 가리고 있기에 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유리아는 해명하는 대신 동생의 손을 마주 잡았다. 울기만 하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제 손을 감싸 쥔 온기가 너무나 따뜻했기 때문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영식의 옆으로 검은 베일을 뒤집어쓴 남자가 다가왔다.
차림새와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하인인 게 틀림없었다. 그는 제 주인에게 물을 한잔 건넸다.
유리아는 영식이 하인을 “오베론”이라 부르는 걸 듣고서 자리를 떠났다.
‘오베론이라면, 저 분과 함께 수도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람이라고 했지…….’
성대한 장례식 뒤, 또다시 장례식이 치러 졌다. 이번에는 나타샤 니고르의 장례식이었다. 선대 백작의 장례식이 끝나고 딱 2주쯤 되는 날이었다. 백작이 된 그녀는 다른 영지에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 무슨 일인지 마차 바퀴가 빠져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원인은 마차 관리 소홀이었다. 마차를 관리하는 이는 반죽음 상태로 쫓겨났고 마부는 백작과 함께 죽어버렸기 때문에 벌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백작위에 오른 사람들이 연달아 죽어버리자 남은 것은 제임스 니고르밖에 없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백작이 되었다.
계속되는 백작의 죽음에 영지의 분위기가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둘로 갈렸다.
“이건 저주야, 저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2대가 한 번에 가버리겠어? 누군가에게 크게 원수를 져서 저주라도 받은 모양이지.”
“저주일지도 모르네요. 이런 일이 흔하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우 무서워라.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
첫 번째는 니고르 백작에게 저주가 내려진 게 아니냐 하였고, 두 번째로는…….
“아까 그 여자는 무슨 헛소리를 해대는 거야? 저주는 무슨! 너도 그런 우습지도 않은 말에 말 맞춰주지 말란 말이야. 분명 그 집 장남 짓이 틀림없어……. 귀족들 자리싸움하는 게 한두 번이야? 백작 좀 해보겠다고 제 누나를 죽여버린 게지……. 쯧쯧쯧, 푸른 피를 가진 짐승들 같으니라고…….”
“어머! 할머님, 그런 얘기 하다가 귀족 모욕죄로 잡혀가면 어쩌려고 그래요? 조금 목소리를 낮춰서 얘기하죠.”
“내가 보기에는 전대 백작이 죽은 것도 다 그놈 짓 같아. 나이 60이 넘도록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게 이상하잖아?”
“뭐, 그건 그렇죠.”
“계속 얘기하다 보니까 목이 아프구먼. 큼큼, 물 한 잔 주고 옷 좀 골라줘.”
“네~ 네~”
유리아는 옷가게 주인과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 들어온 옷을 마네킹에게 입혔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유리아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제임스 니고르가 백작이 되기 위해 제 누나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였든 죽인 게 아니든 그녀에게는 너무나 먼 세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가족들을 모두 잃은 남자의 슬픔만 생각할 뿐이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제임스 니고르가 백작위에 오르면서 일어날 일을 몰랐을 것이다. 몰랐기에 영지에서 일어난 죽음에 공포에 떨거나 웃고 떠들 수 있었던 것이다.
오전 여섯 시도되지 않은 새벽, 저택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끝없는 악몽의 시작을 알린 것을 영지의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사람들은 비명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저택에서 일하던 소녀가 정원에서 싸늘하게 식어있는 모습을 발견한 이가 소리를 지른 것이다.
하녀의 이름은 메리. 짙은 갈색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소녀는 예쁜 얼굴과 쾌활한 성격으로 저택의 고용인들이나 마을의 상인들에게 많은 귀여움을 사고 있었다. 유리아도 가끔 옷을 사러 온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자주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인가 유리아는 아이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 대대로 백작가의 고용인으로 일했기 때문에 집안 사정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가족과의 관계는 나쁘기는커녕 싸워도 다음 날 바로 화해할 정도로 화목했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왜 죽어버린 걸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유리아는 눈물을 흘렸고 라일라는 옆에서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사람들은 곧 그 죽음의 이유를 알게 된다.
제임스 니고르는, 새로운 백작은 끔찍한 난봉꾼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두 번의 장례식과 백작이 되고 난 후 한 달 동안 조용했는지 신기할 정도로.
그는 영지를 돌보기보다는 흥청망청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세금을 영지민들의 삶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쓰는 대신 사치와 방탕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저택에 있는 하녀들을 추행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있으면 곧바로 폭력을 휘둘렀다.
옆에 있던 오베론이라는 전속 하인은 그의 행동을 말리는 척하며 옆에서 부추기는 일을 했고, 제임스 니고르가 백작이 된 이후 새로 고용된 보좌관 알렉산더는 가만히 백작의 행동을 관망했다.
백작을 말리는 하인들은 모두 쫓겨나고 두 사람처럼 그의 비위를 맞추는 자들만 남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백작은 여자를 좋아했다. 특히 예쁜 여자. 그는 가끔씩 마을로 나와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골라 저택으로 불렀다. 상대가 유부녀이든 그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런 건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말을 따르지 않으면 큰 벌을 내렸기 때문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저택으로 끌려간 여자들은 돌아오지 않거나 망가진 채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