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36 (3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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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36

    유리아는 니고르 백작령에서 태어나 자랐다. 엄격하지만 자상한 어머니와 자애로운 아버지를 두었고 아래에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유리아,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수학 성적이 별로 좋지 않구나? 우리 같은 평민이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공부밖에 없다고 엄마가 말했잖니. 특히 수학이 중요해. 수학만 좀 잘하면 어디에서든 데려가려고 난리란 말이야.”

    어머니인 레이샤는 공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간혹 학교에서 나오는 성적표를 보면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라일라는 언제나 훌륭한 점수를 받아왔기 때문에 지적을 당하는 것은 유리아뿐이었다.

    등교하기 전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부엌으로 나온 유리아는 무어라 변명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다가 제 아빠처럼 방긋 웃어 보였다.

    “또 그렇게 귀엽게 웃는 걸로 넘어가려고 그러고…….”

    “여보, 여보. 진정해. 성적이 뭐가 중요하겠어? 잘 자라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에 비하면 아버지인 마틴은 그런 부분에서는 관용적이었다. 그가 생글생글 웃자 얼굴에서 빛이 났다. 유리아에게 뛰어난 미모를 물려준 그는 제 얼굴을 이용해 아내의 기분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레이샤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잘 자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

    “그리고 유리아는 의상 디자이너가 꿈인걸?”

    “그것도 수학이 중요해.”

    두 사람은 한참을 투닥이다가 짧은 키스로 싸움의 막을 내렸다. 성격과 외모 둘 다 극과 극이었지만 자매의 부모는 잉꼬부부라 소문이 날 정도로 사이가 아주 좋았다.

    유리아는 부모님의 애정 표현을 아주 좋아했다. 미래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동생인 라일라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쉰 다음 식탁 위에 올려진 아침 식사와 점심용 도시락을 냉큼 들고 오곤 했으니까.

    “잠깐 애들아, 가기 전에…….”

    자매는 뺨에 부모님의 키스를 차례로 받은 뒤 집을 떠났다.

    학교에 가면 열두 시까지 수업을 듣는다.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난 후에는 바로 집에 돌아갈 수 있다. 유리아는 학교에 가는 게 좋으면서 싫었다. 친구들과 놀 수 있는 한편…….

    “괴롭, 괴롭히지 마……!”

    “야, 뭐라고?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리는데? 못난아. 너 또 우냐?”

    “쟤는 맨날 울어.”

    “하하하! 못생겼다.”

    남자아이들이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괴상한 별명을 지어주며 괴롭혀댔기 때문이다.

    선생님이나 부모가 호통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유리아는 남자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울면 웃고, 무시하는 척이라도 하면 물건을 던지며 관심을 끌려는 사람을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야! 이 자식들아!”

    짓궂은 괴롭힘을 버틸 수 있는 것은 두 살이나 어린 동생 덕분이다.

    “힉, 라일라다!”

    “도…… 도망쳐……!”

    “야, 도망치지 마. 우리는 다섯 명이나 되는데, 왜 도망을 쳐? 저번에는 세 명이라서 졌지만, 이번에는 다를걸?”

    라일라는 유리아를 괴롭히는 사람을 참지 못했다. 평소에는 “폭력은 절대 안 돼!”라고 하면서 남자아이들이 하는 꼴을 보면 주먹을 들지 않고는 못 배겼다.

    “어린애들한테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에이 몰라! 그러면 남의 가족을 건드리지 말아야지. 꼬맹이들이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예쁘게 땋아 내린 머리는 다 헤쳐지고, 코피는 우스꽝스레 번진다.남자아이들을 때려눕힌 채 짓궂게 웃는 라일라의 얼굴을 볼 때마다 유리아는 미안함과 동시에, 그녀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교 시간, 유리아를 괴롭혀대는 망나니들을 두들겨 팬 라일라와 맞은 남자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불려 가는 것은 이제는 흔해져 버린 이야기다.

    집에 돌아간 뒤 유리아가 상처투성이인 라일라의 얼굴을 치료해주는 것도, 얼굴에 밴드와 약을 잔뜩 발라준 후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것도.

    “왜 울고 그래.”

    “미안해……. 나 때문에 다치고 얼굴도 이렇게…… 흐윽…….”

    “그게 왜 너 때문이야? 널 괴롭히는 그 못돼먹은 애들 때문이고, 화를 참지 못하고 덤벼든 내 잘못이지.”

    그런 날이면 유리아의 눈은 제대로 뜨기 어려울 정도로 퉁퉁 붓고는 했다.

    라일라는 그녀를 달랠 겸 맛있는 음식을 해주거나 수건을 차가운 물에 적셔서 눈 위에 올려주었다.

    라일라와 남자아이들이 싸우지 않은 날은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또래 친구들과 놀거나 마을을 돌아다녔다.

    유리아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동생과 함께 이것저것을 해보며 보내는 시간도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한 일은 집에서 다양한 옷을 그리고 직접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아직은 바느질 실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서, 제대로 된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유리아의 부모는 원단 상인이었다.

    정확히는 커다란 원단 공장을 가진 상단의 직원이었다. 주로 여러 거래처를 방문해 원단을 보여주며 영업하는 일을 했다.

    어렸을 적 유리아는 부모님을 따라 여러 옷가게와 공방을 쏘다녔다.

    그러다 보니 일상복에서부터 드레스까지 이르는 다양한 옷들을 구경할 수 있었고 선과 면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세계에 푹 빠져 의상 디자이너를 꿈꾸게 되었다.

    바느질 삼매경에 빠져 있다 보면 금세 저녁이 찾아온다.

    자매의 부모님은 아침 일찍 나가 저녁에 돌아왔다. 언제나 손에 간식이나 책, 바느질 도구 등 딸들에게 줄 선물을 들고 들어온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가족끼리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누며 안 좋은 일에는 화를 내주고 좋은 일에는 덩달아 행복해했고, 밤이 되면 서로를 꼭 껴안아준 뒤 침대로 들어갔다.

    유리아는 생각하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꿈이 있었고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가지고 있었다. 네 가족은 행복하게 살았다. 유리아는 평생 자신이 이렇게 살 거라 확신했다.

    원하는 걸 모두 할 만큼 부유하지는 않고 웃는 날이 있는 만큼 슬픈 날들도 많겠지만, 이렇게 소소하고 평화롭게 평생을…….

    평생을-.

    그리고 유리아는 어느 시끄러운 새벽에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참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깼다. 새벽이었다. 창밖의 하늘은 옅은 파란색과 다 걷히지 않은 검은색이 뒤섞여 묘한 색채를 자아내고 있었다. 평소에 그녀는 라일라와 함께 자고는 했는데, 그날에는 옆에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아는 의문을 느끼며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았는지 혹은 돌아온 후 깊은 숙면에 들어있는지 쓸쓸한 고요함이 집 안 가득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부모님의 방에 가보기도 하고 1층으로 내려가 거실, 부엌에 들르기도 했다. 어느 곳에도 가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까부터 밖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깨닫는다.

    유리아는 엄마의 신발 속에 발을 욱여넣고 밖으로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무언가의 주위를 감싼 채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누군가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의 품을 파고들어 기웃거리는 어린아이들을 낚아채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 건가? 무엇이 있기에 다들 저런 반응을 보이는가? 유리아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너무 끔찍하군…….”

    “누가 알았겠어. 레이샤와 마틴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유리아와 라일라는 이제 어떡하라고 이렇게……. 어휴, 나는 차마 못 보겠어요. 장의사랑 신부님은 언제 오신답니까? 얼른 이걸 수습해야 하는데.”

    “일단 급한 대로 저희가 시체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 된다. 손상이 너무 심해……! 함부로 만졌다간 장의사도 손대기 힘들어할 거다.”

    주위가 싸늘해졌다. 그리고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한겨울 같은 추위가 온몸을 감쌌다.

    ‘저게 다 무슨 소리야? 마치 우리 엄마 아빠가…….’

    유리아는 몸을 덜덜 떠느라 제 옆에 다가온 라일라의 존재를 뒤늦게 깨달았다.

    “……언제 나온 거야?”

    라일라는 유리아의 앞을 가로막고는 매섭게 말했다.

    “집에 들어가 있어.”

    “라, 라라…….”

    유리아는 동생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 저기 뭐가 있길래 그러는 거야? 내가 가면 안 되는 거야? 왜?”

    “들어가 있으라고!”

    “……싫어……!”

    “유리아! 가지 마!”

    사람은 어째서 호기심이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난 걸까? 그것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든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든다.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고 살린 것은, 희망을 가지게 만들고 절망으로 나락에 빠뜨린 것은 호기심. 라일라의 손을 뿌리친 그녀는 그 호기심 때문에 절망하게 된다.

    아직 소녀는 세상에 굳이 덮어둬야 할 진실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유리아는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간혹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손이 나왔지만 이를 밀치고 뿌리치며 계속해서. 그리고 곧 하얀 천을 뒤집어쓴 두 물체와 당도하게 된다.

    유리아는 자신을 쫓아오는 동생의 존재나 무서운 얼굴로 손을 뻗어 오는 어른들의 모습에 다급해져, 천 아래에 있는 존재에게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이 천을 거뒀다.

    그러자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난다. 자신의 부모인 레이샤와 마틴이었다.

    유리아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신음 소리조차 흘리지 못했다. 제 눈앞에 드러난 것이 너무나 참혹한 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황급히 그녀의 눈을 가리고 몸을 덜렁 들어 올려 자리를 피하게 했지만 때는 늦었다. 유리아는 자신을 들어 올린 남자의 품에서 망가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다가 마구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아악!"

    남자는 제 가슴을 마구 후려치는 주먹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싫어……! 싫어, 싫어……. 엄마…… 아빠……!”

    마차 사고였다.

    갑작스레 나타난 사슴 때문에 마차는 방향을 급하게 돌렸고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마부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부부는 사망했다.

    사슴이 나오지 않았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길 바로 옆에 절벽이 있지 않았으면 단순한 부상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마부가 연륜 있는 사람이었다면 방향을 트는 대신 그냥 사슴을 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낸 비극……. 신은 어째서 이러한 비극을 만들어낸단 말인가? 왜?

    ‘신이시여,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주세요. 이건 단지 꿈일 뿐이라고 해주세요. 눈만 뜨면 엄마와 아빠가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이런 게 재미있어서?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이?

    유리아는 곡소리 가득한 장례식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기도를 하고, 누구의 마음도 바꾸지 못할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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