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35 (3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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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35

    유리아는 깨끗이 몸을 씻었다. 지하감옥에 며칠 있지 않아서 심하게 더럽지는 않았지만 귀족을 만나러 갈 정도로 깨끗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린 찬물과 비누로 씻던 그녀는 문득 감옥에 있을 동생을 생각했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유리아는 빵과 물 한 컵을 받았다.그것을 한 입 베어 물고 나서야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감옥에서 먹을 것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입맛이 없어 뭔가를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또 얼마나 기억을 더듬는 일에 집중해 있었나? 라일라 역시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으니 자매는 며칠 동안 쫄쫄 굶은 셈이었다.

    기사들은 이를 알았는지 음식을 건네는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갓 나온 빵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빵을 전부 먹어치운 후 물로 입을 헹궈낸 그녀는 다시 동생을 떠올렸다.

    유리아는 항상 약해질 때 라일라를 떠올리고는 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듯, 추위 속에서 불을 찾듯, 그건 유리아에게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제 동생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라일라의 얼굴을 떠올릴수록 더욱 굳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잘 해내자. 공작님을 만나도 떨지 말고. 잘.’

    서로가 있기에 약해지고 서로가 있기에 강해진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준비를 끝마친 유리아는 곧바로 기사들과 함께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은 이상한 생물이 라도 보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그 시선에 움츠러들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일에도 지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유리아는 곧 근심 어린 얼굴로 복도를 오가던 에밀리를 만났다. 깊은 한숨을 내쉬던 에밀리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곧 두 팔을 뻗어 유리아를 안으려고 했지만 차마 하지 못하고 손만 그러잡았다.

    “……유리아……!”

    “에밀리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세상에, 네가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나온 거니? 다들 절대 너희를 내보내 주지 않을 것처럼 굴었는데……! 혹시 누명이 풀리기라도 한 거니?”

    그녀는 유리아를 경계하듯 양쪽에서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건 아닌 것 같구나. 아무튼 어떻게 된 거니…….?”

    유리아는 답을 하는 대신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마주한 에밀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미안해.”

    기사들이 급하게 유리아에게 손을 뻗는 그녀를 막아섰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하단다. 하녀장님께 너희가 그럴 애들이 아니라고, 오해가 있는 거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해봤지만 들어주시지 않고……. 감옥 안에는 절대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하고……! 먼저 떠나버린 두 사람에게 정말 할 말이 없구나. 특히 레이샤에게…….”

    “……아니에요. 그 정도만 해도 정말 많이 도와주신걸요.”

    “왜 나오게 됐는지 말해주지 않을 거니? 말하기가 곤란한 거니? 그럼 이거 하나만 말해주렴. 벌을 받으러 가는 거야? 그게 아니면…….”

    “저는 벌을 받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그것만은 확실히 말해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유리아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은 후 다시 놔주었다. 에밀리는 떠나가는 유리아의 뒷모습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뒤 집무실 앞에 도착한 유리아는 그 앞에 서 있는 두 남자를 보고 잠시 고민하다, 기사들과 함께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남자 중 멍한 얼굴을 한 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는 이 저택의 둘째 도련님인 이즐리 에머스였고 그 앞에 얼굴을 찌푸리고 서 있던 하나는 셋째 도련님인 아서 에머스였기 때문이다.

    아서의 눈이 유리아의 얼굴을 흘기며 지나갔다. 최종적으로 시선이 다다른 곳은 기사들의 얼굴이었다.

    “그 하녀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공작님의 집무실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왜지? 어머니께서 그 하녀를 만나서 뭘 하겠다고? 그렇게 물으려던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시키는 일만 하는 그들이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이유를 묻기보단 이즐리를 추스르는 편이 더 좋다는 걸 깨닫고 행동으로 옮겼다. 그때 기사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공작의 허락을 받고 왔다. 그제야 유리아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집무실 안에는 공작과 그녀의 보좌관, 그리고 오세스가 있었다. 공작은 손을 뻗어 집무실 안에 있는 다인용 소파를가리켰다.

    “소파에 앉도록.”

    “네.”

    유리아는 잔뜩 긴장한 탓에 오세스가 평소와 달리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소파에 앉은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방 안은 기분 나쁠 만큼 고요했다. 말을 전하기 위해 왔음에도 입을 열어도 될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선명한 붉은 눈 두 쌍이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상황은 그녀에게 묵직한 압박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공작은 보좌관을 불러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보좌관이 밖으로 나가 잠시 뒤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즐리 에머스와 아서 에머스였다. 그들은 묘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와 유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자신들을 불렀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한 얼굴은 곧이어 이어진 공작의 말에 황당함, 혹은 조소로 물들었다.

    “너희들을 부른 이유는 저기 앉아있는 유리아 핸슨이라는 하녀 때문이다. 그녀는 1년 동안 니고르 백작의 연인으로서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내왔지. 니고르 백작이 노예 경매와 연관됐다는 걸 증명해줄 증인이고 오늘 그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그동안 일을 함께 해왔던 너희들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세 공자는 꽤 놀란 상태였다. 그들이 유리아와 라일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간단한 기본 정보나 두 사람이 니고르 백작령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밖에 없었다. 관심은 가졌으나 그 이상으로 알아보려고 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놀라기는 했으나 잘 생각해보면 유리아와 니고르 백작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제임스 니고르는 포악한 성정에 여자를 밝히는 음흉함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보나 아름다운 유리아에게 치근덕거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 왜 그런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하시는 겁니까?”

    아서는 아까 전의 오세스와 마찬가지로 서운함을 토로했고, 이즐리는 얼굴을 찌푸린 채 소파에 늘어져 앉았다.

    “이렇게.”

    그때 어디선가 작고 여린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다섯 쌍의 눈동자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듣는줄은 몰랐어요.”

    유리아였다. 그녀는 고위 귀족들에게 둘러싸이게 된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잘게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심지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공작을 제외하면 그냥 귀족도 아닌, 귀족 남자였다.

    ‘심호흡을 하고 진정하자. 그래도 진정이 안 되면 라라를 떠올리자.’ 

    유리아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자 슬그머니 눈을 감고 라일라를 떠올렸다. 부드러운 연갈색 머리카락과 언제나 붉게 물들어있는 뺨, 품에 안으면 풍겨오는 포근한 냄새를 떠올린다. 그러자 곧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싫은가?”

    “……아뇨.”

    “그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어떻겠나.”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우선 확신을 주세요. 저희를 감옥에서 빼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이때, 아서와 오세스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머니, 언제 그런 약속을 하신 건가요?”

    공작은 아들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유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뿐이면 되는 건가?”

    “저랑 동생은 물건을 훔친 적이 없어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요. 저희의 억울함도 풀어주실 수 있는 거죠?”

    “그래.”

    “저희는 이 일이 마치면 곧바로 저택을 떠날 거예요. 저희를 얌전히 보내주시겠다고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일이 원만히 끝나면 보내 주도록 하지. 상을 내려줄 수도 있다.”

    유리아는 공작에게 집중하느라 공자들이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그들의 얼굴을 봤더라면, 그 눈을 마주했더라면 그 안에 담긴 질척거리고 기분 나쁜 감정에 섬뜩함을 느끼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도망치지 않더라도 겨우 진정시킨 마음이 다시 요동쳤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정말인가요? 그럼…….”

    유리아는 다음 말을 내뱉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눈을 꾹 감고 말했다.

    “에머스 공작가의 이름을 거실 수도 있나요?”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묵직해졌다. 네 쌍의 붉은 눈이 유리아를 싸늘하게 주시했고, 그러한 시선을 느낀 그녀는 손을 들어 목을 만지작거렸다.

    갑작스러운 압박감에 숨이 막혀 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얼굴은 긴장감으로 뜨끈하게 달아오르고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공작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주제넘는군.”

    귀족들은 명예를 중시했다. 이름을 건다는 것은 명예를 건다는 것. 그들은 절대 어기면 안 되는 약속에 이름을 걸고는 했다. 이름을 거는 행위는 귀족끼리, 혹은 황족끼리 이루어졌다.

    평민과의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약속에 쓰일 리가 만무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불신이 깊은 사람이라 쉽게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요. 공작님께서 이름을 걸어주신다면, 저는…… 공작님을 온전히 믿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어지는 침묵. 침묵. 침묵…….

    기껏 낸 용기가 사라진 유리아는 더 이상 그 따가운 시선과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턱 선을 타고 손등으로 떨어지는 땀방울만을 바라볼 뿐이다. 손톱으로 축축한 손등을 긁어 내린 그녀는 다시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짓궂어 보이는 미소였다.

    ‘……라라, 나 너무 무서워.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하지만 너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힘낼게.’

    그러자 용기가 차오른다. 유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공작은 싸늘한 시선을 거두고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좋다. 에머스 가의 이름을 걸겠다.”

    “……감사합니다.”

    “이제 말해봐라. 네 이야기를.”

    “네, 알겠습니다……. 저는.”

    유리아는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니고르 백작령에서 태어났어요. 엄격하지만 자상한 어머니와 자애로운 아버지를 두었고 아래에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죠. 저희는 아주 행복했어요.”

    툭, 툭, 툭.

    공작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내게 필요한 건 네 출생 이야기가 아니라 니고르 백작과 관련된 이야기다.”

    “……네, 알고 있어요.”

    그 사실은 유리아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아 자신이 겪어온 불행은 빼놓고 필요한 정보만 가져간다는 것은 너무나 치사하지 않은가? 그 불행 속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불행도, 원하는 것도 전부 가져가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유리아는 공작이 원하는 정보를 알려주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도 바라지 않고, 원하지 않고, 그저 불행하기만 한. 듣는 이는 그 불행이 닿을까 급급해하며 피할 게 분명할 이야기를.

    단순히 동생과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지도 모를, 안 좋은 기억을 애써 떠올리게 만든 그녀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을 응시하는 붉은 눈과 마주하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공작님께서 바라시는 이야기는 반드시 할 테니까요.”

    마침내 공작은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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